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담 Jul 06. 2021

역사탐방에세이 16화

헌릉 가는 길 – 정도전의 나라인가 이방원의 나라인가

  헌릉을 찾아 걸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헌릉은 꼭 와보고 싶었어요.”

  “왜요?”

  “태종에 관한 이야기가 많잖아요. 사극으로도 많이 다루어졌고.”

  “가장 최근에 만든 게 <육룡이 나르샤>였을 걸. 그 드라마 보았어요?”

  “저는 보다 말다 했어요. 유동근이 맡았던 <용의 눈물>에서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게 남아있어서 <육룡이 나르샤>에는 집중도가 떨어져서.”     


지호맘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는 뒷모습을 경찬맘이 찍다


   조선 개국에 공이 많았으나, 세자를 세움에 있어 그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자 스스로 칼을 들고 나서서 기어이 왕좌를 차지한 사람, 바로 태종 이방원이 묻힌 곳이 헌릉이다. 태종이 이복형제를 죽이고, 아버지 눈에 피눈물을 쏟게 한 일이 정당했다고는 보지 않지만,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보다는 더 수긍이 간다. 태종이 역사적 평가에 관심이나 있었을까? 전혀 관심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연연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태종은 남의 평가나 이목 따위에는 관심을 끄고, 자기가 원하는 삶을 미련 없이 살다 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쁜 남자 면모가 다분한 데도 그가 내뿜는 카리스마에 압도당한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 배우 유동근이 보여준 이미지가 어쩌면 이방원의 이미지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태종 이방원 하면 뒤따라 떠오르는 인물이 너무 많아, 다 거론할 수가 없을 정도다. 나는 태종 이방원, 하면 삼봉 정도전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태종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한 책임이 정도전에게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군권을 쥐고 있었지만 새 왕조를 열겠다는 의지는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품고 있던 인물은 무학대사와 정도전이었다. 이들은 출신이 미천했다. 출신 성분 탓에 능력과 상관없이 배척의 대상이 되었고, 항상 주변 세력으로 머물러야 했다. 이들의 이런 상황은 변방 세력이란 이유로 끊임없이 전쟁터를 전전해야 했던 이성계와 처지가 같았다. 그래서 이들은 힘은 있으나 주변 세력으로만 머물러 있던 이성계를 찾아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것을 역설하였다. 정도전은 사상적인 부분에서, 무학대사는 이성계 개인의 인성과 천명론을 들먹이며 그를 부추겼고, 결국 이들의 설득과 논리가 이성계의 불만과 일치되면서 비로소 조선의 개국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 과정은 공민왕 때 벌어진 친원파와 반원파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친원파의 대표격인 기씨 가문과 반원파의 대표격인 공민왕의 싸움은 원의 몰락으로 말미암아 공민왕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 공민왕파에 속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이성계와 최영이었다. 하지만 이들 반원 세력은 다시 둘로 나뉘었다. 이성계는 근본적으로 변방 세력이었기에 언제나 전쟁터로 내몰렸으며, 최영은 중앙의 권력을 잡고 있었다. 이는 곧 조정의 주변 세력과 고려왕조를 중심으로 한 중앙 세력으로 구별될 수 있다. 이 주변 세력에는 이른바 성리학 이념에 바탕을 둔 개혁론자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중앙 세력에는 왕족을 비롯한 훈구 세력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양대 세력은 요동성 공략에 대한 이견으로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중앙 세력의 수장인 최영(우왕의 장인)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한다. 

  이들 개혁론자들은 다시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왕조를 주창해야 한다는 역성혁명론자들과,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성리학 사상을 중심으로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고려개혁론자들로 나누어진다. 

  역성혁명론의 대표격은 정도전이었고, 고려개혁론의 대표격은 정몽주였다. 이들은 모두 이색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지만 대립은 극을 향해 나아갔다. 결국에는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역성혁명론자들의 승리로 끝난다. 이렇게 해서 세운 나라가 ‘조선’이었다. 

  조선의 개국은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역성혁명론의 결정체였으며, 이러한 논리를 고려왕조에 대입한 사람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고려 멸망과 조선 개국'은 정도전의 역성혁명론의 실천임과 동시에 그가 염원하던 유교적 왕도 정치의 실습장이었다. 정도전은 꿈에도 그리던 새 왕조 주창에 성공하자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해 매진했다. 우선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였고, 『경제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또한 명의 공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 확보, 진법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추진해 병권 집중운동을 펼쳐나간다. 최영 장군이 요동정벌을 주장할 때는 요동정벌에 반대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 장군을 죽여 놓고, 이제는 요동정벌을 할 때라고 본 것이다. 


  정도전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자 이방원은 위기를 느꼈다. 조선 개국 10개월 전에 숨을 거둔 이성계의 향처였던 한씨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정도전의 견제로 인해 공신 대접은커녕 대군 칭호도 받지 못하였다. 대군 칭호는 경처 강씨의 두 아들에게만 봉해졌다. 특히 정도전의 사병혁파는 이방원 입장에서 보면 이방원의 손발을 자르겠다는 것이며 이방원의 날개를 꺾는 것이었다. 사병으로 조선창업을 한 그들이 아니던가. 사병을 잃는다는 것은 권력을 잃는다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배극렴 등 공신들이 이성계의 아들 중에서 조선 창업에 공을 가장 많이 세운 이방원을 세자로 세울 것을 주장하는 데도 반대하고, 강씨의 11세 둘째 아들을 세자로 만들었다. 세자자리를 빼앗겼다고 여겼을 이방원으로서는 사병마저 빼앗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이게 이방원의 생각은 아니었을까. 창업 1등 공신인 자기가 아버지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하는데, 정도전한테 그대로 내줄 수는 없다고 이를 갈았을 것이다. 이방원은 그의 동복형제들을 규합해서 사병을 이끌고 급습하여 정도전을 살해하고, 정도전이 세자로 내세웠던 이복동생 방석도 죽여버렸다. 정도전의 나이 62세였고, 세자 방석의 나이 17세였다.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의 실현을 꿈꾸었던 정도전의 입장과 절대 왕권을 꿈꾸었던 이방원의 입장은 마주 오는 기차처럼 멈추지 않으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누구의 나라인가를 놓고 그들은 목숨을 건 싸움을 한 것이다. 재상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것을 꿈꾸었던 정도전과 절대군주제를 꿈꾸었던 이방원은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되어야 끝나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 함경도 동북면에 갔을 때 이성계 옆에는 그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함께 있었다. 그날의 만남으로 정도전은 꿈을 이루었지만, 또한 목숨을 잃었으니, 이것도 운명이랄 수밖에.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조선의 개국에 자신의 공이 가장 컸음을 공공연하게 자랑하곤 했다. 그리고 한나라 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했다고 역설하였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고 해도 겸손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지나친 정도전의 자부심이 결국 화를 자초했다. 


인릉을 거쳐 헌릉을 가다 


  ‘제2차 왕자의 난’까지 제압하고 왕이 된 이방원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그리고 정몽주를 우상화하고 정도전은 깎아내리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조선왕조는 역성혁명을 도모할 정도전 같은 혁명가가 필요한 게 아니라, 정몽주 같은 충성파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태종은 왕이 되어도 정도전에 대한 분노가 풀리지 않았던지, 서얼들의 등용을 법으로 막아버렸다. 정도전이 바로 서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정말 뒤끝 작렬이지 않은가. 고려 시대에는 서얼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의 부인만 해도 고향에 있는 부인을 ‘향처’라 하고, 개경에 있는 부인을 ‘경처’라 했지, 본처와 첩의 관계는 아니었다. 정도전이 지은 경복궁의 전각들 이름과 도성의 성문들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게 한 것이나, 정도전의 편찬한 법 제도를 없애지 않고 그 틀을 유지한 것을 보면,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의 공적은 인정한 것 같기도 하고. 여하간에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신원이 복권되지 않은 정도전의 설계도대로 이방원의 후손들이 나라를 다스리게 했으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다. 


  “근데, 왜 정도전은 방석이를 세자로 세우면서 이방원을 제거하지 않았을까? 누가 보아도 이방원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알았을 텐데. 이방원의 그런 성정 때문에 세자자리를 반대했던 것 같은데. 그러려면 미리 확실히 제거하던가. 어정쩡하게 두었으니 반격을 하지.”

  “설마 이방원이가 그렇게 반격해 오리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정도전의 자부심이 이방원을 제거하는 쪽이 아니라 견제해서 팔다리만 없앨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고 보면 역사는 타이밍이야.”      

  나는 공감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헌릉 홍살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헌릉 홍살문 앞에 서다


이전 05화 역사탐방에세이 15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