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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Jul 12. 2021

역사탐방에세이 17화

 헌릉 - 남편을 왕으로 만들었지만 팽 당한 원경왕후 민씨


   홍살문 앞에 서서 헌릉을 바라보니, 웃음이 나왔다. 역사에 기록된 부부싸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 역사상 이 부부만큼 치열하게 다투고, 부부싸움의 내막이 소상하게 기록된 왕과 왕비가 있었나 싶다. 그런데 왕릉은 쌍릉 양식인데, 홍살문 앞에서 바라보니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어 보인다. 누가 보면 엄청 사이좋은 부부가 누워있는 것 같다. 좀 전에 지나온 순조의 인릉은 태종의 헌릉과 같은 능역 안에 조성되어 있어 '이건 아니다' 싶었는데, 헌릉의 쌍릉을 바라보니,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헌릉과 정자각 


  “아우, 모르고 보면 엄청 사이좋은 부부 무덤 같아요.”

  “그러게. 죽어서라도 화해하라고 그리 만들었나 보네.”

  “근데, 원경왕후가 남편을 반겼을까요? 말년에는 거의 만나지도 않고 지냈는데.”

  “그야 모르지요. 다 용서하고 품어주었을지도.”     

  태종 이방원의 비인 원경왕후 민씨는 한 마디로 남편을 왕으로 만든 여걸이다. 그녀는 고려말 10대 명문가에 속하는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의 부친 민제는 신진 사대부로 예문관 제학을 지낼 정도로 학문이 높은 인물이었다. 원경왕후 민씨는 1382년 18세가 되었을 때 두 살 아래인 이방원과 혼례를 올렸다. 이때는 고려가 요동을 치던 시기로 이성계가 고려의 도읍인 개경까지 진출하여 신흥귀족으로 진입하던 때였다. 함경도 변방의 장수였던 이성계는 개경 명망가인 민제 집안과 사돈을 맺고 싶어 했는데, 세력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세자로 방석을 세울 때까지 민씨의 활약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성계가 두 번째 부인인 강씨 소생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세웠을 때 민씨는 오히려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이방원을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이방원에게는 동복형이 네 명이나 있어 나이를 따져 세자 책봉을 한다면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여긴 민씨는 ‘형님들이 세자로 책봉되면 우리는 궐기할 명분조차 없게 된다’며 궐기를 염두에 둔 발언을 했다. 


  세자로 방석을 옹립한 정도전 일파는 세자 방석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방원의 형제들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이방원과 민씨는 정도전 일파가 자신들을 언제 죽이러 올지 몰라 불안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제1차 왕자의 난은 정도전 쪽에서 먼저 공격 계획을 세웠고, 이방원 쪽에서는 그 정보를 입수하여 대책을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1398년 8월 26일 태조 이성계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왕자들에게 대궐에 들어와 숙직하라는 영이 떨어졌다. 이방원은 단신으로 대궐로 들어갔다. 민씨는 왕자들이 대궐로 불려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동생 민무질을 불러 군사를 동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저쪽에서 우리를 친다는 증거가 없다"는 민무질의 말에 "증거를 찾기 위해 어물거리다가는 우리 집안이 몰살을 당한다. 선즉제인(先則制人)도 모르느냐?"며 다그쳤다. 선즉제인은 진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항량이 항우를 시켜 회계군수의 목을 베고 거병을 한 고사에서 비롯된 말로, 먼저 손을 쓰면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으나 나중에 손을 쓰면 상대방에게 제압당한다는 의미다. 

  민씨는 대궐에서 숙직을 하라는 것은 이방원과 형제들을 제거하려는 음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민씨는 민무질에게 지시하여 안산에 있는 이숙번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비밀리에 상경하게 하고, 진천에 있는 하륜에게도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무예가 뛰어난 노비를 불러 대궐로 달려가 이방원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민씨의 지시를 받은 이숙번은 도성의 군대 장악에 나서 왕궁을 제외한 모든 군영을 신속하게 접수했다. 이방원은 한밤중에 대궐을 포위하고 소수의 병력으로 남은의 첩 집에서 술을 마시던 정도전 등을 기습하여 살해하였다. 이때 민씨는 이방원과 생사를 같이하겠다면서 그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이방원의 휘하에 있던 장수들이 극구 만류했으나 듣지 않고 있다가, 정도전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혁명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숨 가쁜 상황 속에서 생사를 같이하겠다고 군영을 떠나지 않았던 민씨야말로 혁명의 주역이었고, 남편이 죽을 수도 있었던 밤에 기지를 발휘해 혁명의 밤으로 바꿔놓은 책사 중의 책사였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하자 이방원은 민씨의 손을 잡고 “죽어도 이 공로를 잊지 않겠다”고 치하했다. 그러나 민씨는 “아직 장부의 뜻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군께서는 왕의 기상을 타고 났으니, 치하는 군의 소망이 이루어졌을 때 해주셔도 됩니다”고 하며, 이방원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조 이성계의 넷째아들 회안대군 이방간은 동생 이방원이 권력을 좌지우지하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방간은 형제들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지지자들을 은밀하게 끌어모았다. 민씨는 “앓던 이는 뽑아 버려야 한다”며 망설이는 이방원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동복형이라 칼을 뽑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이방간이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동복형제끼리 칼을 들고 싸운 이 사건을 역사는 '제2차 왕자의 난'이라 이름 지었다.  

  제2차 왕자의 난이 이방원의 승리로 마무리되자  조선의 제2대 왕 정종은 이방원이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생각하고 선위 교서를 내렸다. 정종은 스스로 임시 왕으로 앉아있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여 눈치 없이 자칫 머뭇거리다가는 비명횡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서둘러 선위 교서를 내린 덕분에 상왕으로 나앉은 정종 부부는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태종과 원경왕후 헌릉  안내표지판과 상설도해설


  신생국가 조선의 국모가 된 민씨는 왕후로서 할 일도 많았을 것이고, 이루고 싶은 꿈도 있었을 것이다. 이방원과의 사이에서 자녀들도 계속 태어나 민씨는 4남 4녀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원경왕후 민씨의 행복한 날들은 금세 지나갔다. 왕이 된 남편 이방원의 여성 편력으로 인해 원경왕후 민씨는 가슴앓이해야 했다. 궁능유적본부에서 정리한 ‘조선왕릉과 왕실계보’에 의하면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 이외에 20명의 후궁을 두었다. 원경왕후 민씨는 남편의 바람기에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격렬하게 항의하며 싸웠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왕이 되도록 도왔는데 이방원의 여성 편력은 배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원경왕후 민씨는 궁녀들 앞에서도 지엄한 왕이 된 이방원에게 소리를 지르며 반발했고, 패악질을 부리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제 민씨는 이방원에게 더이상 젊고 지혜로운 여인이 아니라 투기에 눈먼 본처에 지나지 않았다. 

  

  태종 부부의 불화는 민씨의 남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결국에는 이방원에 의해 친정 남동생 네 명이 사사되거나 자결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죄명은 정안군 시절에 집안의 여종이 이방원의 아이를 임신하였을 때 그 여종을 한겨울에 내쳐 하마터면 왕자를 잃을 뻔하였다는 것이었다. 10년 전의 사건을 들먹이며 처남들을 압박한 것은 다분히 의도된 면이 강했다. 처음에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귀양 보냈을 때, 민씨는 그들을 구하고자 애원도 하고 사정도 했지만, 태종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자 독기를 뿜으면서 저항했다. 민씨의 거친 반발에 뒤끝 작렬 태종 이방원은 귀양보냈던 두 처남을 사사하였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민씨의 나머지 두 남동생까지 처결을 명하고 그들의 처자들을 관노로 만들어버리는 것으로 답했다. (태종 8년에 위로 두 남동생이 유배형을 당했다가 사사되었고, 태종 15년에는 아래로 두 남동생의 처결을 명하여 자결하였다고 보고되었다.) 그 와중에 원경왕후 민씨의 친정아버지는 병을 얻어 사망하였고, 친정어머니는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그렇게 해서 이방원을 보위에 올리고 양녕대군을 통해 권력을 이어가고자 했던 민씨 일문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태종은 그 참에 자신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원경왕후 민씨까지 폐출하려고 하였다. 



   태종은 중신들이 세자와 왕자들의 생모를 폐출하는 것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어려울 때 자신을 도운 공을 생각해 민씨를 폐위하지 않는 대신 그 투기를 실록에 남기게 하였다. 그리고 원경왕후 민씨를 수강궁(창덕궁의 동쪽 궁궐) 별전에 유폐시켜 버린다. 우리가 조선왕조실록판 태종과 원경왕후 주연의 <사랑과 전쟁>을 알게 된 게 태종이 명을 내려 기록으로 남기게 한 덕이다. 아, 기록되지 않은 비사가 얼마나 많겠는가. 이성계에게 정도전이라는 책사가 있었다면 이방원에게는 민씨라는 책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남편에게 팽 당하고, 고려 10대 명문가였던 친정은 왕이 된 남편으로 인해 멸문의 화를 당했으니 그 원통함이 어떠했을지…….

  원경왕후 민씨는 말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느꼈으리라. 그녀는 억울하게 죽은 네 남동생의 극락왕생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다 1420년(세종 2년) 7월에 학질에 걸려 수강궁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향년 56세였고, 왕비로 책봉된 지 21년 만의 일이었다.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나란히 잠들다


  죽어 나란히 묻히면 뭔 소용인가. 살아서 사랑하지 않은 것을……. 친정의 재물과 인맥을 동원해 왕을 만들었더니 외척을 경계하고 왕권을 강화한다며 후궁을 열심히 들이고, 그에 반항하자 한술 더 떠 친정을 몰락시켜버린 남자. 원경왕후 민씨 입장에서 태종은 ‘나쁜 남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인의 자존감을 짓밟아 버린 남자. 친정 가문을 멸문지화 시켜버린 남자,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남자, 그게 노년의 민씨에게 남은 남편 이방원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너무나 가까이 붙어있는 쌍릉. 어쩌면 저승에 가서라도 화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붙여놓았을 수도 있지만, 기록된 두 사람의 성정으로 보아서는 영 화해하였을 것 같지가 않다. 

  “나는 왕이야!”

  “그래, 왕 맞아. 근데 그 왕 내가 만들어 준 거거든!”

  고요한 왕릉, 두런거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말싸움이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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