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릉과 경릉 – 그들의 단명이 문제였나, 나라의 운이 다했던 걸까
동구릉을 탐방 갔을 때만 해도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수릉, 그리고 헌종과 두 왕비가 묻힌 경릉에 대한 글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혹은 살아온 사연이 기구해 나를 울린 몇몇 왕과 왕비에 대해서 써보려고 나선 길이라, 애초에 수릉과 경릉은 염두에 두었던 왕릉이 아니었다. 헌릉을 탐방하러 갔다가 들르게 된 인릉. 합장릉 양식으로 되어있는 인릉 앞에 서서 순조와 순원왕후가 묻힌 능침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서글픈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돌아오는 전철에서도 내내 인릉에서 느꼈던 서글픔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의 뒷모습이 여러 상념을 일으키는 것처럼, 탐방하면서 마주한 왕과 왕비의 무덤들이 그러했는데, 인릉 앞에 서니 그 상념이 가지를 치면서 뻗어 나갔다.
인간만 생로병사의 여정을 걷는 게 아니라, 나라도 생성 성장 쇠퇴 소멸에 이르는 긴 여정에 오른다. 어쩌면 순조 효명세자 헌종의 3대가 걸었던 인생 여정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이 쇠퇴기에 다다른 시점과 맞물려 더 불행했던 것은 아닌지, 그들의 의지나 능력의 역부족이 아니라 나라의 운에 의해 그들의 운명이 좌우되었던 것은 아닌지. 그들의 운명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하기에는 …….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을 탐방하러 갔을 때 제일 먼저 들른 곳이 효명세자가 묻힌 수릉이었다. 매표소와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순조의 외아들 효명세자는 훗날 외아들이 할아버지 순조를 이어 보위에 올라 익종(고종 대에 문조)으로 추존되었다. 1855년(철종 6년)에 양주 용마산 아래에 있던 무덤을 지금의 자리로 천장하였고, 1890년(고종 27년) 신정왕후가 사망하자 합장하였다. 효명세자가 1830년에 사망하였으니, 남편 곁에 60년 만에야 망자가 되어 누웠다. 여드름 자국도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22세에 사망한 남편을 83세의 노부인이 쭈글쭈글한 얼굴을 하고 찾아간 것이다. 서로를 알아보기는 했을까. 노할머니를 본 효명세자가 놀라 덥석 절을 하지 않았을까. 부인이기는 한데, 상석에 앉혔을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수릉의 왕과 왕비는 위치가 바뀐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보통은 왕과 왕비를 같은 곳에 묻을 때, 왕은 오른쪽, 왕비는 왼쪽으로 배치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탐방객이 바라볼 때는 왼쪽이 왕, 오른쪽이 왕비 자리다. 산 사람에게는 왼쪽이 상석이지만, 죽은 자에게는 오른쪽이 상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릉은 왕과 왕비의 위치가 보통의 왕릉과는 다르다고 한다. 효명세자와 신정왕후가 사망할 당시의 신분이 왕세자와 대왕대비였기 때문이다.
1827년(순조 27년) 순조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당시 순조의 나이 38세, 세자는 19세였다. 전례에 따라 순조는 인재 등용, 형벌 집행, 군사권을 관장하고 나머지 서무는 모두 세자가 직접 처결하게 되었다. 효명세자는 우선 안동 김씨 일파가 장악하고 있던 비변사 당상들을 감봉 조치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세자는 또 세도가문의 등용문으로 변질된 과거제도의 부정과 비리를 혁파하고, 50여 차례의 과거를 실시하여 전국의 인재들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1828년(순조 28년)부터 전국을 휩쓴 천재지변으로 인한 피해가 세자의 발목을 잡았다.
“2016년인가, 효명세자를 모델로 드라마 하지 않았나요?”
“맞아요.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이 세자 이영 역을 맡았어요.”
“효명세자도 박보검처럼 잘 생겼으려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조선왕조 최고의 미남이라는 헌종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니. 잘 생겼겠지요.”
헌종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그리워 울고 있으면 궁녀가 거울을 가져다가 얼굴을 비추면서 “마마, 거울을 보시옵소서. 그러면 아버님 얼굴이 보일 것이옵니다.”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터넷에서 헌종의 어진이라고 떠도는 사진을 보았다. 여러 기록을 토대로 합성한 사진이라는데, 비현실적으로 잘 생겼다. 짙은 눈썹과 깊은 눈매, 오뚝한 콧날, 박보검하고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외모다. 조선왕조 최고의 미남이었다는 헌종,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니, 분명 효명세자도 잘 생겼을 것이다.
“저는 효명세자가 무척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누이들과 시문을 주고받았다고 하잖아요. 여염집 오라비도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은데, 왕세자가 누이들의 보낸 시문을 읽고 평을 달고 일일이 첨삭을 해서 답장을 보내주었다니, 좀 놀라워요. 그냥 전해오는 이야기도 아니고, 그 증거물들이 내려오고 있으니, 참 대단한 거 같아요.”
“그런 말을 들으니, 더 안타깝네요. 그가 너무 일찍 죽은 게.”
“너무 갑자기 죽어버렸다는데, 저는 왠지 효명세자의 죽음이 예사 죽음으로 느껴지지 않아요.”
“그럼, 무슨 음모나 독살설이라도?”
“일각에서는 소현세자나 경종처럼 독살설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그러기에는 근거가 너무 없다네요.”
“어떻게 죽었는데요?”
효명세자와 안동 김씨 세도정권 사이에 긴장감이 짙어지던 1830년(순조 30년) 4월 22일 밤, 잦은 기침을 하던 세자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 급히 탕제를 대령했지만, 증세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갖은 처방에도 효험이 없자 향리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정약용까지 불러들였다고 한다. 정약용이 급히 입궐해 세자의 증세를 살폈는데 이미 백약이 무효할 정도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한다. 결국 5월 6일 새벽 효명세자는 향년 2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독살설보다는 과로사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거 같다.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겠지만, 효명세자가 22세 창창한 나이에 과로사했다는 것이, 그가 단명하여 그리된 게 아니라, 왠지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이 다하여 그의 명을 재촉한 것은 아니었나, 의심이 간다.
조선의 중병을 치유하고 왕권을 회복하려 했던 원대한 포부도 효명세자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효명세자, 효명세자……, 혀를 굴려 그의 이름을 연호하여 보았다. 참 아름다운 이름이다. 잘생긴 외모를 가진 세자에게 어울렸음 직한 시호다. 그러나 ‘효명(孝明)’이란 시호가 죽음 이후에 내려지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 이름이다. 어찌 보면 칭송을 닮은 시호 같은데, 어찌 보면 나라를 향한 충이 아니라 어버이에게만 향한 효를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예악정치로 왕권을 회복하려고 한 그를 비꼬는 이름 같기도 하다.
“아, 아깝다, 아깝다, 너무 아깝다.”
지호맘이 발을 구르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언제나 확실한 의사표시를 하는 지호맘이라 죽은 지 190년이나 되었는데도 마치 어제 효명세자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발을 굴렀다.
“아, 할아버지 정조는커녕 아버지 순조만큼도 왜 못 살았냐고? 좀 더 오래 살지.”
“인명은 재천이라잖아요.”
“그래도 너무 안타깝다. 25세 정도에 왕위에 올라 30년 정도 다스리다 아들 헌종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태종처럼 딱 버티고 서서 힘을 실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텐데. 아이고, 아까워라.”
지호맘의 한탄을 들으니, 당시 개혁을 꿈꾸던 지식인들이 효명세자의 비보를 전해 듣고 느꼈을 절망감이 상상되었다. 오죽하면 그의 부음을 들은 박규수가 자신의 호에서 굳셀 환(桓)자를, 입을 다문다는 뜻의 재갈 환(瓛)자로 바꾸고, 이십여 년간 벼슬에 나가지 않았겠는가. 그만큼 효명세자의 죽음은 당대 조선의 개혁과 변화를 꿈꾸던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아득하였을 것이다.
외아들 효명세자를 잃고 웃음을 잃어버린 순조에게 연이어 닥친 두 딸의 죽음은 순조의 명마저 재촉해, 효명세자의 8세 아들이 순조에 이어 보위에 오르니 바로 헌종이다. 잘생긴 데다 목소리까지 좋아 그가 지나가기만 해도 궁녀들을 심쿵 하게 만들었다는 사람. 4세에 아비를 잃고 8세에 조부마저 잃어 조선왕조 역사상 최연소로 보위에 오른 헌종. 그 어린 왕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뭐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4촌은 물론 6촌 형제마저 없이 외로웠던 존재. 첫 왕비를 17세의 나이로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 23세로 죽어버린 사람. 어찌 이리도 복이 없을까. 헌종 하면 외로움이 연상된다. 그래서 그랬는지, 헌종의 능은 동구릉 능역 안에 부모의 능인 수릉과 가까운 곳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삼연릉 양식으로, 두 왕비가 나란히 헌종의 왼쪽에 묻혀있다. 나란히 줄지어 선, 세 개의 능.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거기서는 외롭지 마세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그리워 울었다는 헌종이다. 그것을 배려해 능을 조성하지는 않았다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가까운 곳에 있으니 사후에라도 위로와 지지를 받았기를 바라며 경릉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