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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Jun 21. 2021

역사탐방에세이 14화

순조 인릉 - 안동 김씨 60년 세도정치의 서막을 올리다

  태종 이방원이 묻힌 헌릉을 찾아가려고 검색했더니, ‘헌인릉’으로 나왔다. 양재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서 헌인릉에 도착했다. 

순조 인릉 입구


  매표소를 통과하자마자 인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싫건 좋건 순조의 인릉을 먼저 거쳐야 태종의 헌릉을 갈 수 있는 구조였다. 인릉은 헌릉과 같은 묘역 안에 있는 거와 같다. 참 얄궂어라. 여기에 인릉 터를 잡게 한 지관은 누구인가. 진심으로 궁금하다. 

  외척의 득세를 막기 위해 본인의 처가는 물론 아들 세종의 처가까지 멸문지화 시킨 태종 이방원 곁에 외척에 의한 60년 세도정치의 서막을 올린 순조와 순원왕후를 영원히 붙들어 두었으니, 마치 두고두고 불호령을 받으라고 일부러 그런 것만 같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의 상상력은 엉뚱한 방향으로 곧잘 날아간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다. 드디어 참지 못한 내가 같이 탐방에 나선 일행에게 한소리 했다.

  “어떡해. 어쩌자고 여기에 순조를 묻을 생각을 했을까. 태종이 가만있겠어. 어림없지. 태종의 불호령이 들리는 것 같지 않아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헌릉에 있는 태종이 인릉에 있는 순조에게 툭 하면 종주먹을 대면서, “못난 놈!”하고 으르렁거리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태종의 불같은 성정을 생각하면, ‘왔느냐. 어서 오너라.’ 하면서 품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릉 옆으로 헌릉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정조의 간택 후궁 수빈 박씨 소생인 순조는 겨우 11세에 보위에 올랐다. 부왕인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역사상 두 번째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올라 호적상 증조할머니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정순왕후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영향력을 미쳤다고 생각했던 정조는 노론 벽파(사도세자의 죽음이 온당했다는)인 정순왕후와 거리를 두었다. 해서 경주 김씨 집안 여식을 세자빈으로 삼으려 하는 정순왕후의 뜻을 꺾고, 노론 시파(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정적)인 안동 김씨 김조순의 여식을 며느리로 들이려고 했다. 정조가 삼간택을 앞두고 갑자기 승하해 삼간택이 연기되었고, 이때를 놓칠세라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 쪽 인사들의 방해가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결국 순조 2년에 김조순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었다. 


  1804년 순조가 열다섯이 되던 해 스스로 ‘여주’라 칭했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둬들였다. 겉으로는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안으로는 노론 벽파 정권에서 노론 시파 정권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 시대를 생각하면, 노론 벽파인 ‘경주 김씨냐’ 노론 시파인 ‘안동 김씨냐’의 문제지,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발현될 여지가 차고 넘쳤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순조가 아니라 정조가 빌미를 제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안동 김씨 며느리를 들였기 때문이다. 정조는 본인 스스로 더는 살기 힘들 거라는 것을 인지하고는, 어린 아들의 후견인으로 장차 아들의 장인이 되는 김조순을 점찍었다. 그토록 증오했던 세도정치의 발판을 마련해주고 간 거나 마찬가지다. 하긴, 이제 겨우 11세에 보위에 오르는 어린 아들이 뭐를 할 수 있겠는가. 단종처럼 죽임이나 안 당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지도……. 아무도 모른다. 죽음을 앞둔 정조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김조순을 어린 아들의 후견인으로 삼았는지는. 어쩌면 어린 아들의 위험에 대비해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그랬는지도…….      

  

인릉 안내표지판


  지호맘은 순조 재위 기간에 삼정(전세, 군포, 환곡, 즉 재정행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고통받았던 사실과 안동 김씨 60년 세도정치가 자리 잡은 것을 거론하며 분개했다. 

  “순조가 그래도 정조대왕의 아들인데, 그렇게 멍청했을까?” 

  “멍청했다기보다는 너무 어렸으니까요.”

  “그래도 열네 살에 보위에 오른 숙종하고 너무 비교되지 않아?”

  “숙종은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보통의 어머니가 아니었으니까요. 순조는 수빈 박씨 소생이잖아요. 숙종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가 좀 그래요.”

  “그래도 너무 안타깝다. 그래도 정조대왕의 아들인데, 그 피가 어디 가겠냐고?”

  “단종을 생각해 봐요. 세종의 적장자인 문종의 적장자였어요. 그래도 삼촌에게 당했잖아요.”

  “생모도 살아있었고,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도 살아있었는데, 어떻게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열게 했는지…….”

   “안 그랬으면, 외가인 반남 박씨의 세도정치가 열렸거나, 할머니 친정인 풍산 홍씨의 세도정치가 열렸겠지요. 어쩔 수 없었다고 봐요. 정조가 나빠요.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너무 일찍 죽어버렸잖아요.”

  인명은 재천인데, 정조인들 일찍 죽고 싶었으랴마는 안타까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일찍 죽은 정조가 나쁘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게. 왜 정조대왕은 일찍 죽었을까. 좀 더 살지. 좀 더 살았어야 했는데, 아, 정말 안타깝다. 정조대왕이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분명 달랐을 텐데.”

  존경의 표시로 정조를 칭할 때 꼭 정조대왕이라고 칭하는 지호맘은 두 발을 굴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지호맘이 순조 재위 기간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순원왕후가 너무 자기 친정 세력을 키웠던 게 아닐까?”

  “순원왕후 입장에서는 남편을 보호한 것일 수도 있어요.”

  “왜?”

  “단종처럼 만들지는 않았잖아요.”

  “그래도 삼정의 문란으로 나라가 피폐하고 조선왕조의 몰락을 앞당겼잖아.”

  “그렇다고 그 죄를 다 순원왕후에게 물을 수는 없다고 봐요. 개인적으로 순원왕후만큼 살아서 자식 때문에 고통받은 왕비도 별로 없어요. 역사를 생각하지 않고 여인의 일생으로만 순원왕후를 바라보면, 그토록 가련한 여인이 있을까 싶어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 후에 순조는 의욕적으로 친정에 임한 적도 있었지만,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나 순조의 의욕을 꺾었다. 크고 작게 끊임없이 일어나던 농민 민란은 순조 11년에는 ‘홍경래의 난’으로까지 발전해 안동 김씨 세력을 끌어들여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아버지 정조를 닮고 싶었지만, 본인은 역부족을 느꼈는지, 순조는 아들인 효명세자를 정조처럼 만들고 싶어 했다. 순조는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해 아들 효명세자에게 온건한 노론 벽파였던 퐁양 조씨 집안의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게 했다. 장차 아들이 보위에 올랐을 때 외가인 안동 김씨와 처가인 풍양 조씨가 서로 견제세력이 되게 해서 아들이 마음껏 자기의 정치를 펼치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가 22세의 나이로 사망하는 바람에 아들을 아버지 정조와 같은 성군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순조의 소망도 꺾이고 말았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잃어 웃음기가 사라지고 깊은 슬픔에 잠겨있던 순조에게 복온공주와 명온공주가 한 달 사이를 두고 세상을 떠나는 비보가 전해졌다. 연이어 자식들을 잃은 순조는 애통함에 건강이 무너져 향년 45세로 승하하였다.‘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있다. 어쩌면 순조와 순원왕후는 나라의 안위와 번영보다 집안의 안위와 번영이 더 큰 걱정이었던 사람들이다.      

  순조는 자식들이 많지 않았다. 순원왕후와의 사이에서 효명세자와 명온, 복온, 덕온공주를 두었고, 승은 후궁이었던 숙의 박씨와의 사이에는 영온옹주 한 명을 두었을 뿐이다. 순원왕후는 현종 이후 처음으로 왕실에 대군과 공주들이 탄생하는 경사를 가져다주었던 왕비였다. 숙종, 영조, 정조, 모두 정비 소생 대군과 공주가 없었다. 그랬던 왕실에서 연이어 대군과 공주들이 탄생하였으니, 개인의 기쁨을 넘어 왕실의 경사였고, 나라의 경사였다. 그랬는데 대군과 공주 모두 20세를 전후에 죽었다. 세 딸은 혼인은 했으나 후사 없이 죽었고, 후궁 소생 영온옹주는 혼인도 하지 못한 채 13세에 죽었다.  


  나라의 숨통을 끊기 전에 왕실의 혈통을 끊는 일이 먼저 벌어지는 것일까. 신의 장난인가. 아니면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인가. 뭐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연이어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닥쳤다. 

 잇따른 참척의 고통에 더해 남편인 순조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순원왕후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순원왕후는 8세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른 손자 헌종 뒤에 앉아서 수렴청정했다. 그녀는 손자며느리로 친정 집안의 여식을 들였다. 이 일로 그녀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공고히 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순조 사망 후에 순원왕후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던 막내딸 덕온공주까지 사망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살아서 감당해야 했던 슬픔이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헌종마저 23살 젊은 나이에 후사도 남기지 않고 사망하고야 말았다. 자기 눈앞에서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으로 이어진 혈맥이 끊어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제 61세가 된 순원왕후는 황망한 와중에도 일명 ‘강화도령’이라 알려진 이원범을 양자로 삼아 헌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게 하고, 철종 뒤에 앉아 수렴청정했다. 그리고 왕비의 자리에 친정 가문의 여식을 들여 앉혔다. 이제 안동 김씨의 권세는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왕조 역사상 두 번이나 수렴청정을 한 왕비는 순원왕후가 유일하다. 


  순원왕후 본인이 순조와 혼인하면서 열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헌종과 철종의 비로 친정 가문의 여식들을 연달아 들임으로 더욱더 공고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로써 순원왕후는 친정인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를 연 장본인이 되었다. 그녀는 손자인 헌종을 두고 헌종의 모후인 풍양 조씨 가문의 신정왕후와 고부갈등을 일으켰다고도 하고, 후사 없이 헌종이 사망하였을 때 발 빠르게 강화도령 이원범을 찾아내 왕위에 앉힌 것은 친정 가문을 위해 일부러 무식한 왕족을 찾아낸 것이라고도 한다. 두 번의 수렴청정과 친정 가문의 득세로 말미암아 권력욕의 화신이요, 조선왕조의 패망을 앞당긴 것처럼 오해받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헌종 때 수렴청정은 내명부의 최고 수장이었기 때문에 한 것이고,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손자인 이원범에게 왕위를 잇게 한 것은. 이원범이 당시 살아있는 왕족들 가운데 가장 근친이었기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 형제가 있지 않았냐고 한다면, 흥선대원군 형제는 엄밀히 말하면 사도세자로부터 내려온 핏줄이 아니고,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의 후손들이었다.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이 후손 없이 사망하여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 양자로 들어간 경우라 헌종과 7촌 관계인 철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촌수였다. 순원왕후는 평소 ‘친정을 우리 가문, 왕실을 내 가문’이라 일컬었다고 알려졌다. 그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친정을 의식하고 의지는 하였으나 본인이 왕실 소속임을 분명히 하여 경계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눈 한 번 질끈 감았다면, 왕의 성씨가 이씨에서 김씨로 바꾸는 반역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상황에 놓여있었다고 본다. 이원범이 아니라 흥선대원군 쪽으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졌을까.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함으로 인해 결국 조선의 마지막 왕위는 흥선대원군 집안으로 돌아갔지만…….  

순조 인릉 정자각

   

  순원왕후에게 너그러운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녀가 받았던 참척의 고통을 아무리 강조한다고 해도 그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는 개인의 슬픔이 차지할 자리 따위는 없다고 해도, 역사의 소명 앞에 개인의 희로애락이 사소한 것처럼 취급된다고 해도, 그녀가 살아생전에 겪었던 비극들을 생각하면 영원한 안식이 주어졌으면 한다. 근데 부부 합장릉이 하필 태종의 헌릉 코앞이라니, 오, 이건 너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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