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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Jun 07. 2021

역사탐방에세이 12화

 선릉 - 성종에 대한 오해와 진실, 성군 혹은 호색한

  어깨를 다친 지호맘과 예정에 없이 갑작스레 동참하게 된 수영맘을 위해 그야말로 어느 때보다도 천천히, 느리게 선릉을 향해 걸어갔다.  

선릉 정자각과 성종 능

  

   조선 제9대 성종(1457~1494)의 능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1462~1530) 윤 씨의 능을 합쳐 선릉이라 하는데, 동원이강릉 양식이라 성종 능과 정현왕후 윤씨 능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홍살문 앞에서 보면 좌측이 성종의 능, 우측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조선왕조에서 성종처럼 운이 좋은 왕도 별로 없다. 왕의 계승 순위로 볼 때 성종은 세 번째였다. 아버지 의경세자가 세자의 자리에 있을 때 죽는 바람에 그는 ‘대군’의 칭호도 받지 못했다. 일개 ‘군’이었던 자을산군(자산군이라고도 불린다)이 왕이 된 데에는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와 세조가 ‘나의 자방’이라 칭했던 한명회,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 세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모종의 합의 같은 게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세조의 장손이자 의경세자의 맏아들인 월산군을 제치고 자을산군이 선택된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야 불과 네 살에 불과했으니 그렇다 치고, 성종의 형인 월산군이 밀린 것은 나로서는 수긍하기 어렵다.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는 이러한 결정이 민망했는지, 월산군은 병약하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러나 곧이 믿기에는 월산군(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된 후 월산대군)이 남긴 시조가 마음에 걸린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無心)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얼핏 읽으면 물욕을 버리고 자연에 묻혀 욕심 없이 사는 삶을 그린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그 시조를 지은 사람이 살아온 배경을 알면 시어 하나하나가 예사로 읽히지 않는다. 날마다 욕심을 덜어내며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달래는 삶을 살아내야 했던 것은 아닌가. 타고나기를 물욕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렇게 보여야만 하는 삶을 강요받았던 것은 아닐까. 병약하다는 이유로 동생에게 밀려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던 월산군은 성종 19년에 어머니인 인수대비 병을 간호하다 35세에 죽었다. 어쩌면 더 오래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한명회가 세조의 장손이자 의경세자의 맏아들이 마땅히 넘겨받아야 했던 왕위를 훔쳐 가지 않았다면 말이다. 계유정난의 최대수혜자 한명회는 좋게 말하면 지략가이고 나쁘게 말하면 천하에 둘도 없는 모사꾼이다. 한명회는 자을산군의 장인이었다. 아마도 월산군이 제외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명회는 두 딸을 왕비로 만들었다. 한 명은 예종비 장순왕후(세자빈이었을 때 사망하여 예종 즉위 후에 장순왕후로 추존), 또 한 명은 성종비 공혜왕후다. 한명회는 친자매인 두 딸을 시숙모와 조카며느리 관계로 만드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왕의 장인이 되고 싶어 안달복달했다. 아마 그는 왕의 장인을 넘어 왕의 외조부가 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예종비로 보냈던 셋째딸이 아들(인성대군)을 낳은 후 병으로 죽었는데, 겨우 17세였다. 뒤이어 외손자 인성대군도 세 살 때 풍질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자을산군을 왕으로 밀면서 또 한 번 왕의 외조부가 될 기회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그의 거대한 욕망을 신은 더는 허락하지 않았다. 왕의 장인이 될 수는 있었지만, 왕의 외조부는 될 수가 없었다. 공혜왕후마저 소생 없이 19세에 죽었기 때문이다. 왕비로 만든 딸 둘이 다 20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남의 자식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자기 자식 눈에는 피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속담이 들어맞았다고나 할까. 신이 인간을 대신해 복수하지는 않았겠지만, 한명회의 업보가 그의 딸들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선릉 안내표지판


   어찌 되었든 간에 장인 한명회의 개입으로 13세에 왕위에 오른 자을산군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는 동안에 최선을 다해 제왕학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이 학문에 열중한 이유는 왕위에 오르기 전 왕세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졸지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늦었던 만큼 성종은 열심히 공부했다. 경연(왕과 대신들이 함께 토론하며 공부하는 자리)을 하루에 세 번이나 연 날도 많을 정도로 열심이어서 할머니 정희왕후가 손자의 건강을 염려할 정도였다. 그 결과 자을산군은 ‘성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동북아시아에서 국가 체제와 문물, 제도 정비를 완성한 왕 앞에 붙는 묘호나 시호가 ‘성종’이다. 따라서 성종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가 체제를 정비한 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이후 간관(諫官)들이 “전하, 세종대왕과 성종대왕의 예를 본받으소서” 하며 왕들을 압박했을 정도다. 후대 역사가들도 대체로 성종의 치세 기간에 조선의 통치 제도가 확립되었고, 국력도 전성기였던 태평성대로 평가하고 있다. 세종 대에는 천재지변도 많았고, 아직 나라의 기틀이 완전히 다져진 것이 아니었기에 백성들이 동원된 토목공사도 많았다. 세종 대는 후대의 평가가 후한 것이지, 당대에는 태평성대와는 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학문을 좋아했지만, 한편으로는 풍류도 즐겼다는 성종. 그래서인지 야사에는 성종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그중에는 효령대군(세종의 둘째형)의 며느리였지만 음란한 여인으로 찍혀 극형을 받은 ‘어우동’과 얽힌 내용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이겠지만 둘에 관한 야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도 방영되었던 것을 보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성군이면서 한편으로는 호색한으로 알려졌던 성종이라 누명을 쓴 이야기일 수도 있다. 진실은 성종과 어우동만의 알겠지만, 오해일 수도 있는 상상을 자극하는 것 또한, 성종의 처세에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성종은 자기의 연애에 관한 것에는 너그러웠던 반면 남의 연애에 관해서는 냉정한 편이었다. 반대하는 의견이 더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어우동에게 풍속 문란의 죄를 물어 참형을 내렸다. 게다가 <경국대전>에 과부 재혼 금지 조항을 넣었다. 성종의 가장 큰 업적이라는 <경국대전>의 반포는 조선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국가 운영의 기본 정책을 담은,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헌법이다. 거기에 과부의 재혼을 금하는 법을 넣은 것이다. 남편 잃은 가난한 여인들은 어찌 살라고 그런 법을 명문화했단 말인가. 과부 재혼 금지가 풀린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였다. 그리고 적서차별도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여 서자나 얼자로 태어난 아들들에게도 서얼이라는 족쇄를 채워 출세의 길을 법으로 막았다. 과부가 되는 일이, 서자나 얼자로 태어나는 일이 내 마음대로,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누가 과부가 되고 싶어 하며, 누가 서자나 얼자로 태어나고 싶어 했단 말인가. 그런 것을 생각하면, 학교 다닐 때 국사 시간에 <경국대전> 반포가 성종의 최대 업적이라는 글귀에 밑줄 치면서 공부했던 기억은 씁쓸한 기억으로 자리매김이 된다.      

 

  “아쉽네. 성종은 영민하고, 당대에나 후대에나 평가도 좋은데, 연산군 생모를 쫓아낸 것은.”

  “맞아요. 연산군으로 하여금 망나니 칼춤을 추게 한 단초를 제공한 것은 성종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일만 없었다면, 그럭저럭 훌륭한 왕인데. 어찌 완벽한 왕은 하나도 없네.”

  성종 능을 바라보며 한 마디씩 저마다의 의견을 내었다.     


선릉 성종 능과 석물

  

  성종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원자(연산군)를 낳은 숙의 윤 씨를 계비로 삼았다. 그런데 윤 씨가 질투가 심해 왕비의 체통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폐출시키더니, 그 후 사약을 내려 목숨을 거두어버렸다. 한때는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그리고 아들의 어머니다. 그런 여인을 질투가 심하다 하여 목숨을 거두었으니, 두 사람의 애증이야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나도 누군가의 아내로 살고 있기에 성종이 너무 심한 처신을 한 거라고 확신한다. 질투가 심했다고 하지만, 그 질투의 빌미를 제공한 이도 성종이다. 그리고 청상과부였던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중전인 며느리를 고깝게 보고, 중전보다 성종의 후궁들을 더 총애하고 힘을 실어주는데 어느 조강지처가 가만있겠는가. 그것도 20대 한참 혈기가 왕성한 나이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중전 자리만 지키면 된다’는 심정으로, 혹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면서 마냥 인내하면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일부 학자들은 폐비 윤씨의 다소 거칠었던 행동은 산후우울증이 원인이었을 거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백 년 동안 폐비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38세로 승하했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백 년은커녕 십 년도 지켜지지 않았다. 성종의 뒤를 이어 19세에 보위에 오른 폐비 윤씨 소생 연산군이 생모의 복수를 위해 직접 나섰기 때문이다.     

   

  살아서는 무난한 시절을 보낸 성종이지만, 죽은 후에는 편히 지내기가 어려웠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선릉에는 성종의 유해가 없다. 아들인 연산군이 두 번의 사화를 일으키며 생모를 죽게 한 자들에게 복수의 칼부림을 미친 듯 휘둘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웠을 영혼은,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맞이하여 왜놈들에게 재궁(관)이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했다. 만약 혼령이 있다면 얼마나 놀랐겠는가. 성종 능과 중종 능의 재궁이 파헤쳐지고, 선릉의 재궁은 완전히 불태워져 뼛조각 하나 수습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고 선조는 울었다. 나도 이 대목에서는 울분을 참기가 어려워 부들부들 떨린다. 외적의 침입으로 유린당하는 것은 산과 들만이 아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살다가 죽은 사람까지도 유린당한다. 그만큼이나 처참한 것이다. 인조 3년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 수리했고, 다음 해에도 두 번이나 능 위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


선릉 정자각  앞에 모여있는 비둘기들 


  그러고 보면 마냥 운이 좋았던 왕이라고도 못하겠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성종의 유해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찾지를 못하고, 부장품으로 넣었던 옷을 태운 재를 관에 담아 다시 안장했다. 껍데기만 왕릉인 성종 능 앞에 서니, 마음이 착잡하기 그지없다. 조선 왕릉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거대하다는 석물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능침 안에 그가 없는데, 그를 지키는 석물이 뭔 소용이 있을까 싶어서다. 성종의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정자각 앞 잔디 위에는 무심한 비둘기들만 먹이를 쪼아먹느라 여념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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