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정릉(靖陵) – 그도 한때는 개혁군주였다
중종이 묻힌 정릉은 정자각에서 능침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岡)이라 불리는 언덕을 높게 해놓았다.
중종의 능에 왔는데, 조광조가 생각났다. 조광조를 생각하니 ‘주초위왕(走肖爲王)’이 생각나고, ‘주초위왕’을 생각하니, 기묘사화가 생각났다. 수업시간을 통해 배웠거나 정통사극을 즐겨 보면서 알게 된 사건들, 책을 통해 쌓아 올린 내용이었다. 그것은 마치 고구마 줄기에 딸린 여러 개의 고구마와 같았다. 중종이라는 키워드를 잡아당기자, 고구마 줄기에 딸려 올라오는 고구마들처럼 사람과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는지, 동행했던 일행들도 중종의 능을 바라보며 자기가 알고 있던 지식이나 생각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7일의 왕비가 생각나네.”
“나는 문정왕후가 생각나네요.”
“나는 조광조.”
“나는 ‘여인천하’에서 도지원이가 맡았던 경빈 박씨가 생각나네.”
“그러고 보면 중종은 우리한테 참 친숙한 인물이네요.”
“워낙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졌으니까요.”
“대장금에서 임호가 연기한 것도 중종 아니었나?”
“맞아요. ‘음, 맛있구나.’ 대사가 생각나네.”
“아버지 성종처럼 중종도 준비없이 보위에 오른 거네.”
“그런 셈이지요.”
“근데 아버지 성종에 비하면 참 유약하고 우유부단했던 거 같아요.”
“아버지 성종과 같은 점은 후궁이 많았다는 것 정도.”
우리는 한참을 중종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제목과 해당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면 중종 재위 기간은 임진왜란과 같은 큰 전쟁이 없었을 뿐이지 극적인 보위부터 이후의 사건들까지 나름 참 파란만장했다.
중종은 성종의 차남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었다. 연산군이 생모의 복수를 한답시고,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폭정을 일삼을 때, 진성대군이라 불리던 중종은 혹여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까 납작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폐비 윤씨 후임으로 왕비에 오른 사람이 바로 진성대군의 생모인 정현왕후 윤씨였기 때문이다. 정현왕후 윤씨는 원래는 성종의 후궁으로 입궁한 사람이었다. 연산군은 보위에 오른 후 생모의 복수를 하면서 부왕의 후궁들과 그 후궁들의 소생인 이복동생들을 처단했다. 연산군은 아무리 화가 났다고는 하나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박을 정도였으니,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일은 없었다. 궁궐에 있던 정현왕후 윤씨나 결혼해서 궁 밖으로 분가해 있던 진성대군이나 조마조마한 날들을 보내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중종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진성대군도 모르게 일어난 반정이라, 군사들이 몰려 왔을 때 진성대군은 드디어, 이복형인 연산군이 자기를 죽이려고 군사들을 보낸 줄 알고 자결하려고 했다. 그런 그를 말린 게 그의 부인 신씨였다. 나이가 어렸지만, 그녀는 영특했는지, 군사들이 몰려오자 당황해 자결까지 생각하는 남편을 위로하며 일단 자기가 밖을 염탐하고 오겠다고 했다. 그녀가 높은 데 올라가서 보니 말들의 머리가 집 밖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진성대군에게 말들의 머리가 밖을 향해 있다는 것은, 우리를 죽이려고 온 것이 아니고, 필시 우리를 보호하려고 온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남편을 달랬다. 아닌 게 아니라 중종반정이라 이름 붙여진 이 사건은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든 대신들의 일으킨 반정이었다. 진성대군은 반정이 일어나는 줄도 몰랐을뿐더러, 칼 한 번 들지 않고, 이복형을 몰아내고 보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마땅히 물려받아야 했던 자리도 아니었고, 스스로 칼을 들고 빼앗은 자리도 아니었다. 엉겁결에 보위에 올려진 것이다. 출발이 그러하니 반정공신들의 눈치를 보는 일은 당연하였다고나 할까. 어쩌면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를 아내마저도 공신들의 요구로 내쳐야 했다.
“처음에는 그렇다 치고 나중에라도 7일 만에 궁궐에서 쫓겨난 단경왕후 신씨는 구제해야 했던 게 아닌가요? 나는 이 대목이 걸리더라.”
“후궁들한테 마음이 빼앗겼는데, 생각났겠어요?”
“설사 생각이 났더라도 단경왕후를 복권시키기가 현실적으로 힘들었을 수도 있어요.”
“하긴, 또 족보가 엉키겠지. 장경왕후 소생 인종도 있고, 문정왕후 소생 명종도 낳은 후였다면.”
“그건 그렇고, 나는 중종 하면 주초위왕이 제일 먼저 떠올라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쫓아내 사약까지 내렸으니까. 아무리 명분이 궁색했어도 그렇지. 나뭇잎에 꿀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가 드러나게 해놓고, ‘주(走)’와 ‘초(肖)’자를 합치면 ‘조(趙)’가 되니, 이는 필시 조씨가 왕이 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써서 조광조를 끌어내렸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기묘사화는 억지 중의 억지야.”
“조광조의 고집에 중종도 질렸겠지요.”
“조광조가 ‘아니 되옵니다. 전하!’ 하면서 머리를 조아리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물러설 생각을 안 하니 내관들도 옆에서 졸았다잖아요.”
“조광조를 빌려 반정공신들을 내치는 것까지는 좋았겠지. 그래서 중종도 한때는 개혁군주로 군림하잖아요. 이제 좀 편안하게 왕 노릇 했으면 하는데, 왕도정치를 실현하고 싶어 조급해하던 조광조는 죽어도 타협할 생각이 없었으니, 죽이고 싶었겠지.”
중종에게는 반정 주역들이 정권의 버팀목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반정 주역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왕을 갈아치울 수 있는 세력이라는 것을 보여준 증거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19세에 왕위에 오른 중종이 나이 26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자신의 정치를 펼칠 때가 돌아왔다. 중종 5년에 반정의 중심인 박원종이 죽더니, 중종 7년에는 유순정이, 다음 해에는 성희안이 죽었다. 여전히 반정공신과 대신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반정의 3인방이 죽었으니, 중종으로서는 자기의 정치를 펼칠 때가 드디어 도래했다고 판단해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반정의 3인방이 죽어서 없다고는 하나 여전히 반정공신들의 판을 치고 있었다. 이때 중종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조광조였다. 좋은 인연으로 만났다가도 악연으로 헤어지는 게 인간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조광조를 제거하기는 했지만, 그 일로 중종은 참 우스운 사람이 되어버렸잖아. 기묘년에 일어나서 기묘사화인데, ‘기묘하다 기묘사화’ 하면서 외웠다니까요.”
“맞아요. 정치는 명분이 참 중요한데.”
“어쩌면 중종이 후궁들을 많이 거느린 것도 머리가 너무 아파서 여인들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서였을까요?”
“글쎄요. 남녀의 일이란 이 나이 들어도 알 수가 없으니.”
“철종을 봐도.”
“철종하고 중종하고는 완전 경우가 다르지요. 중종은 왕이 되기 전에 ‘대군’ 신분이었다고요. 사도세자의 서자의 후손하고는 급이 너무 달라요.”
“하기는 그렇네.”
“그나저나 왕비가 세 명인데 결국 홀로 묻혀있네요.”
“그러게요. 문정왕후 덕분에.”
“덕분이 아니라, 때문이겠지요. 문정왕후 때문에.”
“맞아요. 차라리 서삼릉 장경왕후 옆에 그냥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중종이 원래 묻혔던 자리는 고양시 서오릉 안에 있는 인종의 생모인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이 있는 곳이었다. 장경왕후의 능과 동원이강릉 양식으로 묻힌 후 능호도 정릉으로 바뀌었는데, 제2계비인 문정왕후가 굳이 지금의 자리로 천장했다. 천장 이유는 서삼릉의 능침이 풍수상 불길하다는 거였다. 학자들은 그런 이유는 핑계에 불과하고 문정왕후가 사후에 중종하고 같이 묻히기를 원했기 때문이라 보고 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정작 남편 옆에 묻히지 않았다. 따로 태릉에 묻혀있다. 어찌 된 일인가. 『선조실록』에 의하면 "물이 불어났을 때는 재실 아래까지 잠기고 홍살문 근처는 배를 띄울 정도이므로 보기에 민망하다"라고 적혀 있을 정도다. 홍수에 왕릉이 침수되자 번번이 이를 보수하기 위해 지대를 높여야 했다. 하지만 보수 작업은 간단한 일이 아니기에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중종과 합장되지 못하고 따로 묻혔다. 이럴 거면 왜 남편을 천장해 와서 왕비가 세 명이나 있었던 사람을 홀아비처럼 홀로 묻혀있게 했는지, 참. 태조 이성계는 아들 때문에, 단종은 삼촌인 세조 때문에, 중종은 질투심 많은 부인 문정왕후 때문에 결국에는 홀로 영원히 묻혀있으니.
“저 무덤 안에 있는 게 과연 중종일까요?”
“글쎄요. 나도 몹시 궁금해요.”
정릉은 임진왜란 때는 선릉과 함께 왜군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었다. 왕의 시신이 불에 타버렸다는 비보를 들은 선조는 통곡하며 사실을 확인하게 했다. 선릉에서는 불에 타 시신이 사라진 채 타다 만 뼈 잿더미들이 나왔고, 정릉에서는 염할 때 입혔던 옷이 벗겨진 시신이 가로놓여 있었다. 문제는 이 시신이 중종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를 가려내기 위해 선조는 원로대신부터 중종의 얼굴을 보았던 궁녀들까지 다 동원했지만, 중종이 사망한 지 오래되어 외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명 없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도 고령이라 확인이 쉽지 않았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일찍이 왕의 체격을 잘 알고 있는 궁녀 등을 시켜 왕의 모습을 글로 적게 한 다음 시신과 대조했는데, 이 보고서에 따르면 왕은 중키로 이마에 녹두보다 작고 검은 사마귀가 있었으며 보통 체구에 얼굴은 길고 콧마루는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중종의 능침에서 나온 시신은 살이 썩어서 떨어졌고, 검은 사마귀는 알아볼 수 없고, 얼굴은 네모형이었다. 또한 배 위에 대여섯 군데의 칼 맞은 흔적이 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중종의 시신과는 다르다는 보고였다. 왜군이 왕릉을 욕보이기 위해 가져다둔 시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결국 선조는 뼈와 타다 남은 재를 다시 『국조오례의』에 맞춰 염을 해 안장했다.
정말 궁금하다. 저 무덤 안에 있는, 다시 묻은 뼈의 주인이 중종일지. 요즘 과학기술로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중종의 아들 명종의 시신과 DNA를 비교하면 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후대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왕릉을 파헤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금하기는 하다. 과연 중종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