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목릉 – 주는 게 없이 미운 사람
동구릉을 한 바퀴 다 돌아왔는데, 목릉을 놓치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오랜 시간 걸어 다니느라, 다리는 무겁고, 무릎은 시큰거리고, 배는 고파왔다. 점심시간은 지난 지 한참이나 되었다.
“어떻게 할까요? 목릉을 놓치고 왔네요.”
“목릉이라면 선조?”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잖아요? 선조는 내가 두 번째로 싫어하는 임금인데. 보고는 가야지.”
“싫어한다면서 보고 가게요?”
“싫어하니까 더 보고 가야지.”
“배고프지 않아요?”
“배고프기는 한데, 그냥 가면 아쉬울 거 같아.”
우리는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긴 벤치에 앉아 다리를 쉬게 하면서 간식으로 가져온 떡과 바나나로 고픈 배를 달랬다. 요기하고 다리를 좀 쉬게 하니 한결 발걸음이 가벼웠다. 선조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목릉을 향해 걸어갔다.
“왜 선조는 그리 의심이 많았나 몰라. 이순신 같은 충신을 의심하고, 아들인 광해군을 의심하고. 정말 못난 왕이야. 인조와 막상막하, 최악의 군주야.”
“맞아요. 저도 선조를 위해서는 변명해주고 싶은 맘이 없네요.”
“왕이 되는 교육을 받지 않아서 그런가?”
“그런 영향이 컸겠죠. 아마도.”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는데, 덜컥 왕이 되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왕이 되었을 때 겨우 열여섯이었어요. 그리고 혼인 전이었고.”
“적서차별이 명문화되었던 조선에서 왕의 서손자인 하성군이 왕위에 앉았으니, 그전의 왕들에 대한 대접하고는 달랐을 것이고.”
“속으로는 ‘니 따위가 왕이야?’ 하면서 아래로 내려다본 대신도 분명 있었을 거고.”
“왜 하필 하성군이 왕으로 뽑혔을까?”
“아마도 부모가 다 돌아가신 것에 점수를 얻었을지도 몰라요.”
“왜?”
“아무래도 본가에 아버지 어머니가 있으면, 아들이 왕이 되었는데, 가만있겠어요. 설사 가만있고 싶어도 옆에서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었을 테니까.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만 보아도.”
“하기는 흥선대원군은 본인이 나서서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서 더 나섰던 거고.”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나 대신들이 이것저것 다 고려해서 판단했을 거예요. 부모가 안 계신 거. 아직 혼인하지 않았던 것도.”
“명종이 하성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이어가게 하라는 유언을 했나요?”
“명종은 요즘 말로 하면 심장병으로 돌아가신 거라, 그런 유언할 겨를이 없었을 거예요. 아마도 인순왕후나 인순왕후의 친정 가문이 움직이지 않았나 싶어요.”
선조는 중종의 후궁이었던 창빈 안씨 소생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부인 덕흥군은 선조가 왕위에 오르기 8년 전에 사망하였고, 생모는 즉위 얼마 전에 사망하였다. 중종은 정비인 장경왕후에게 인종을, 계비인 문정왕후에게 명종을, 적통으로는 단 두 명의 대군만을 얻었을 뿐이지만 후궁들에게서는 일곱 명의 아들을 보았다. 중종의 서손자 중 하나인 하성군 입장에서는 “내가 왕이라고?” 하고 놀랐을 법도 한 일이다. 세자 교육 한 번 받아보지 못한 그가 어느 날 왕으로 세워졌으니, 어느 날 왕의 자리에서 내쳐질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의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터. 선조는 무척 의뭉스럽고 의심이 많았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처지에서 임금이 되고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선조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에 아마 가장 많이 등장했을 것이다. 선조 자신이 주인공이었던 경우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징비록을 쓴 류성룡이나 이순신 장군, 광해군이 주인공일 때도 빠짐없이 등장하여 주인공하고 대척점에 선 인물로 그려졌다. 너무나 익숙해 많이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친숙하지만 정이 가지 않는 인물, 그게 선조에 대한 우리 세 사람의 공통된 마음이었다.
목릉은 태조의 건원릉 옆에 있었다. 건원릉 오른쪽으로 난 목릉으로 가는 길을 놓친 것이었다. 서어나무가 군락지를 이룬 길을 걸어가니, 목릉의 홍살문이 나타났다. 건국 왕인 태조가 홀아비로 묻힌 것에 비하면 선조는 두 명의 왕비를 다 거느리고 묻혀 있었다. 왕과 두 왕비가 일렬로 나란히 묻혀 있는 형식(삼연릉)이 아니고, 넓은 능역 안에 하나의 정자각과 3기의 능이 자리한 형식이었다.
선조가 옹주에게 보낸 편지 원본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한자가 몇 자 섞여 있는 한글 편지였는데, 인쇄체라고 해도 될 만큼 또박또박 쓴 글자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글월 보았다. 돋은 것은, 그 방이 어둡고 날씨도 음(陰)하니
햇빛이 돌아서 들면, 내가 친히 보고 자세히 기별하마. 대강 약을 쓸 일이 있어도
의관과 의녀를 들여 대령하게 하려 한다. 걱정 마라. 자연히 좋아지지 않겠느냐.
아픈 딸을 염려하는 한편, 동생을 걱정하고 있는 또 다른 딸을 안심시키는, 너무나도 자애로운 아버지의 마음이 잘 드러난 편지였다. ‘내가 친히 보고 자세히 기별하마’ ‘걱정 마라’ ‘자연히 좋아지지 않겠느냐’는 대목에서는 선조의 부성애에 감동하기까지 하였다.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 같지 않은 자상함에, ‘선조에게 이런 면도 있구나’ 싶어 편지에 등장한 인물들을 찾아보았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총애하던 인빈 김씨의 소생인 정숙옹주에게 정안옹주의 소식을 알리는 편지였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아무리 세게 깨물어도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고, 아플세라 세게 깨물지도 못하는 손가락이 있다. 선조에게 광해군은 아무리 깨물어도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딸들은 왕위를 차지할 일이 없었으니, 마음껏 이뻐했으려나.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는 선조가 처음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서장자인 임해군과 광해군을 연년생으로 낳으며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광해군이 세 살 때 사망하였다. 생모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은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후미진 궁궐에서상궁들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공빈 김씨 사망 후 선조의 사랑이 옮겨간 이가 바로 인빈 김씨였다. 인빈 김씨는 선조와의 사이에 4남 5녀를 둘 정도로 사이가 각별하였다.
어쩌면 선조는 그냥 왕족인 하성군으로 평생을 살다 갔다면 더 평판이 좋았을 것이다. 왕족의 권위만으로 살았다면, 그의 꼼꼼함이나 자상함은 빛이 바래지 않았을 것이고, 광해군이나 편지를 받은 옹주의 아버지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왕관의 무게는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고 무거웠나 보다.
임진왜란의 책임을 다 선조에게 뒤집어씌울 수은 없다. 당쟁의 격화가 선조 대에 시작되었다고 해서, 광해군이 이복 아우 영창대군을 죽게 하였다고 해서, 서손자인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몰았다고 해서, 다 선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아쉬운 것이다. 선조가 아닌 다른 서손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역사가 진행되어간 방향이 달랐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어떻게 전쟁 중인 아들을 상대로 툭 하면 양위소동을 일으켜 달려오게 하느냐고? 또 왜 잘 싸우는 이순신 장군은 쫓아낸 거냐고?”
“정말 주는 게 없이 미운 사람이야.”
“맞아. 주는 게 없이 미운 사람.”
우리에게 선조는 그런 사람이다. 한 마디로 못난 왕. 선조가 우리의 말을 엿들었다면, 분명 화를 냈을 것이다. 그리고 변명이든 하소연이든 했을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