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6. 명동예술극장
경향신문 기사 https://m.khan.co.kr/culture/performance/article/202209201437011#c2b
연합뉴스 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220920112100005
조선일보 기사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2/09/15/TXZVI5RD4NC7THDT6QB6PUFKCM/
한국일보 기사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2092617210004414
내 극작품에 대한 관대하고 열렬한 칭송을 하면서 어떻게 작품이 개선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심에서 우러난 지시를 해 준 몇몇 분들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 그들은 에필로그와 더불어 교회, 봉건 구조, 종교 재판, 이단에 대한 이론 등등 같은 인상적이지 않고 지루한 것들을 잘라 내야 한다면서 경험 많은 연출가라면 누구나 그런 장면들을 삭제해 연극 시간을 두드러지게 줄이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이분들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경험 많은 삭제의 대가라면 극작품의 내장을 비워서 줄이게 된 한 시간 반의 시간 때문에 즉시 현란한 장면들을 만들고, 로아르 강에 진짜 물을 넣고 그것을 가로지르는 진짜 다리를 설치하고,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분명히 가짜인 싸움을 연출하고, 진짜 말을 타고 있는 조앤이 이끄는 승리한 프랑스 사람들을 배치하기 위해 두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 조앤은 무대 위에서 불에 탔을 것이다. 한 여성이 불에 타기만 하면 적어도 왜 그 여성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사람들은 불에 타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 돈을 지불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성 조앤』, 조지 버나드 쇼, 임성균 역, 지만지드라마 큰글씨책, pp.111-112
나는 극장에 입장하기 위해 돈을 지불한 사람들이 고전적인 희극이나 비극을 그 자체로 좋아하고, 작품이 좋을 때는 그것을 너무도 좋아하여 연극이 끝나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극장을 나와서 자신들을 집으로 데려다줄 아주 늦은 기차나 버스를 타러 가는 사람들을 위해 고전적인 방식으로 글을 쓴다.
ibid, pp.115-116
역사적 실존 인물을 연기하게 된 두 배우는 사료에 의존하는 대신 버나드 쇼가 풀어낸 조앤과 샤를 7세에 집중하고 있다. 백은혜는 “영웅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잔 다르크가 가진 힘과 믿음에 주안점을 두고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5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이승주는 “역사적 사실에 너무 접근하면 오히려 갇히는 부분이 생겨 버나드 쇼가 그린 샤를 7세를 선명하게 객석에 전하려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기사 인용)
보주(Vosges) 출신의 시골 소녀 아크의 조앤(Joan of Arc)은 1412년경에 태어났고, 1431년에 이단과 주술과 마법의 죄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1456년에는 무죄 판결로 명예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며, 1904년에는 덕망이 있는 자로, 1908년에는 복자로 선언되었고, 마침내 1920년에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녀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투사 성인이며 중세 시대의 특이한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기묘한 존재다. [...] 그녀는 또한 국가주의의 초대 주창자이며 전쟁에서 당시에 유행하던 몸값으로 도박을 하던 기사도와는 구별되는 나폴레옹식 현실주의를 실천한 최초의 프랑스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합리적인 여성 복장의 선구자였으며, [...] 군인과 선원으로 복무하기 위해 남장을 했던 그 밖에 이름 모를 수많은 여성 영웅들처럼 특정한 여성의 역할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면서 남성처럼 옷을 입고, 남성처럼 투쟁했고, 남성처럼 살았던 존재였다.
『성 조앤』, 조지 버나드 쇼, 임성균 역, 지만지드라마 큰글씨책, pp.3-4
그녀의 현실적 상황이 순전히 벼락출세였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견해는 단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그녀가 기적적인 존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ibid, p.5
만일 그녀가 남들이 틀렸을 때 자신의 올바름으로 그들을 모욕한 결과가 무엇인지 알 만큼 나이가 들었더라면, 그리고 아부하면서 그들을 다루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그녀는 엘리자베스 여왕만큼이나 오래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기교를 지니기에는 너무 어리고 순박했으며 경험이 없었다. 자신이 바보라고 여기던 사람들에 의해서 자기 의도가 좌절되었을 때, 그녀는 그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나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성급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으며, 그들을 바로잡고 그들을 불행에서 구해 준 것에 대해서 그들이 응당 자신에게 감사하리라고 생각할 만큼 순진했다. 탁월한 기지를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어리석은 인물들이 자신들의 멍청함이 드러나는 데 대해서 갖는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
ibid, p.6
조앤은 교회와 종교 재판으로부터 오늘날 그 어떤 공식적인 세속 재판소에서 그녀와 같은 형태와 상황으로 재판을 받는 죄수보다도 훨씬 더 공정한 재판을 받았으며, 그녀에 대한 판결은 엄격하게 법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신파극의 여주인공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똑같이 아름다운 남자주인공에 기대어 사랑에 애태우는 육체적으로 아름다운 여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신파극의 여주인공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천재이며 성인이었던 것이다. [...] 만일 어떤 역사가가 반여성주의자여서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에서 여성들이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는 조앤에게서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 그녀에 대한 이상적인 전기 작가라면 [...] 성적인 불평등과 그로 인한 로망스를 던져 버리고 여성을 특정한 매력과 특정한 무능함을 갖춘 동물이 아니라 인류의 한 형태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ibid, pp.12-14
편지를 쓸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편지를 구술하여 받아쓰게 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편지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바로 앞에서 양치기 소녀라고 불렸을 때 그녀는 대단히 과격하게 분개했으며, 잘 갖춰진 집안의 여주인이 하는 집안일을 누가 더 잘하는지 어떤 여성이라도 자신과 경쟁해 보자고 공언했다. 그녀는 프랑스의 정치군사적 상황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 졸업 여성들이 신문을 읽고 자기 나라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이해했다. [...] 끔찍한 가난을 겪었다는 암시나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 간단히 말해서 그녀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소시민적 자본가 계급의 딸들 대부분보다 훨씬 더 지적인 젊은 여성이었던 것이다.
ibid, pp.18-19
그녀의 재판이 가진 비극적인 부분은 가장 단순하게 십계명을 어겼다는 것 외의 혐의로 재판을 받는 죄수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조앤도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자신을 고발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 그녀의 기도는 세 성인과의 멋진 대화였다. 종교가 단지 업무에 지나지 않는, 형식적으로 순종적인 사람들에게 그녀의 경건함은 인간을 초월한 것으로 비쳤다. 하지만 교회가 그녀에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사치를 제공하지 않은 채 그녀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받아들이고 그녀 자신의 해석은 버리라고 종용하자,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고 가톨릭교회에 대한 그녀의 견해는 조앤 자신이 교황과 다름없는 역할을 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ibid, pp.62-63
드레스를 입고 코르셋을 착용한 채 통상적인 시민으로 생활하면서 자신은 물론 자기 남편들을 포함한 다른 이들의 문제를 잘 다루면서도 취향이나 지향점이 완벽하게 남성적인 여성들은 얼마든지 있다.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낮은 법적 지위를 가졌고 오늘날처럼 여성 치안판사, 여성 시장, 여성 국회의원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빅토리아 시대에도 언제나 그런 여성들은 존재했다. [...] 여성을 군대에서 제외시키는 관행은 여성이 남성에게는 없는 천성적인 부적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없을 경우 사회가 후손을 생산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남성들은 대체로 여성들보다는 없어도 되는 존재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희생되고 있는 것뿐이다.
ibid, pp.39-40
우리는 사회가 편협함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편협함을 악용하는 두드러진 경우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들은 중세 시대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ibid, p.85
조앤이 자신의 시대 정부에 위해를 가했던 것보다 우리의 정부에 천배나 덜 위해를 가했던 수천 명의 여성이 지난 10년 동안 살해되었고, 굶어 죽었으며, 자기 집이나 건물에서 불타 죽었고, 처형과 공포가 가할 수 있는 모든 해를 입었다. [...] 우리 시대였다면 그녀는 재판도 받지 못했을 것이고 모든 법을 유예하는 지역방위법(Defence of the Realm Act) 외에는 아무런 법도 적용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재판할 판사는 기껏해야 귀찮아하는 소령이고 최악의 상황에는 털로 장식된 진홍색 법복을 입은 갓 승진한 변호사일 것이다. 그런 변호사에게 코숑처럼 잘 훈련받은 기독교인이 가졌던 양심의 가책은 터무니없고 비신사적으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ibid, pp.88-90
사제 : 여자들이 하는 일을 네가 그리 잘한다면 왜 집에 남아서 그 일을 하지 않는 거지?
조앤 : 그 일을 할 다른 여자는 얼마든지 있지만 내 일을 할 사람은 나 말고는 없으니까요.
ibid, p.297
조앤 : 제게 들리는 목소리는 교회에 불복종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말씀에 먼저 복종해야 합니다.
코숑 : 그렇다면 교회가 아니라 자네가 그걸 판단한다는 건가?
조앤 : 나 자신이 하지, 아니면 내가 어떤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ibid, pp.300-301
조앤을 죽인 살인의 비극성은 그러한 살인이 살인자들에 의해 저질러지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사법 살인이요, 경건한 살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이 비극에 희극적 요소를 가져오는 것이다.
ibid, p.108
샤를 : 친구여, 사람들이 더 이상 내가 마녀이자 이단자에 의해 왕좌에 올랐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고 법석 떨지 않을 것이오. 결국 좋게 끝났다면 조앤도 법석을 떨지는 않을 거요. 그녀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소. 난 그녀를 알았거든. 그녀에 대한 복권은 다 이루어진 거요? 나는 그 문제에 허튼수작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주 명확히 했소.
[...]
라베누 : 그녀에 대한 판결은 깨지고, 취소되고, 괴멸되고, 아무런 가치나 효력이 없는, 없던 일로 치워졌습니다.
샤를 : 좋아. 이제는 아무도 내 즉위에 도전하지 않겠지, 아닌가?
ibid, p.335
코숑 : 사람들은 날 기억하면서 더 나빠질 거야. 사람들은 내 안에서 악이 선을 이기고, 거짓이 진실을 이기고, 잔혹함이 자비를 이기고, 지옥이 천국을 이기는 걸 보게 될 테니까. 자네를 생각하면 그들에게 용기가 일어날 테지, 그러다 날 생각하면 그게 사그라지겠지만. 그러나 하느님께서 아시지만 나는 정당했어. 나는 자비로웠어. 나는 내게 비친 빛에 충실했어.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샤를 : [...] 맞아, 언제나 당신들 선한 자들이 커다란 악행을 저지르지. 날 보라고! 난 선한 샤를도 아니고, 현명한 샤를도 아니고, 용맹한 샤를도 아니야. 조앤의 숭배자들은 내가 그녀를 불길에서 끌어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심지어 나를 겁쟁이 샤를이라고도 부를 거야. 그렇지만 나는 당신들 누구보다도 해를 덜 끼쳤어. [...] 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위아래 질서가 있는 게 올바른 거라고 말하거든. [...] 그러니 이제 내가 묻노니 이런 소소한 방식으로 프랑스의 어떤 왕이 나보다 잘했으며, 나보다 나은 인간이었나?
ibid, pp.343-344
조앤 : 모두가 다 나를 칭송하다니 비통함이 내게 닥치도다! [...] 이제 내게 말해 보세요. 내가 죽음에서 일어나서 살아 있는 여성으로 당신들에게 갈까요?
ibid, p.362
샤를 : [...] 만일 자네가 그녀를 다시 살려 낸다면 그녀에 대한 현재의 모든 흠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6개월 이내에 그녀를 다시 화형에 처할 거야. 그리고 자네는 역시 똑같이 십자가를 들고 있겠지. 그러니 (성호를 긋는다.) 그녀를 편히 쉬게 내버려 두자고. 자네와 나는 그녀 일에 상관 말고 우리 자신의 일이나 신경쓰는 게 좋아.
ibid, p.336
조앤 : 아,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 세상은 언제나 되어야 당신의 성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까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 오, 주님,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요?
ibid, p.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