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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희미 Dec 11. 2022

연극 스카팽(2022) 리뷰

2022. 12. 04 명동예술극장



지난번 NTOK Live+ <타르튀프> 공연 리뷰에서 올해가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이 되는 해라고 언급했다. (https://brunch.co.kr/@heemiseo/37) 때마침 국립극단에서도 <스카팽> 삼연을 한다기에 미리 예매해 두었다. <앨리스 인 베드> 리뷰 때 말했는데 나는 재작년, 그러니까 2020년에 <스카팽> 재연을 보려다가 명동예술극장 화재로 공연이 취소되어 보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보게 된 공연인 만큼 기대하며 극장에 찾아갔다.





<스카팽>의 원작은 몰리에르의 희곡 『스카팽의 간계』(Les Fourberies de Scapin)이며 ‘몰리에르의 집’이라 불리는 프랑스 국립극장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1,500회 이상 공연되었다. 코미디 프랑세즈의 2017-2018 시즌 개막작이기도 했으며, 2021년 파테 라이브(Pathé Live)를 통해 영상화되기도 했다. 2021년 영상화된 실황 공연은 국내 해오름극장에서 NTOK Live+ 프로그램으로 상영되었다. 2017년, 2021년 공연 모두 배우이자 연출가 겸 각본가인 드니 포달리데스(Denis Podalydès)가 연출했다. (내가 본 <타르튀프> 공연에서 오르공 역을 맡았던 배우다. 영상매체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자세한 정보는: https://www.comedie-francaise.fr/fr/artiste/denis-podalydes) 아래는 2017 공연 당시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제공한 <스카팽> 작품 설명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 Pièce de troupe, écrite non pas pour la Cour mais pour le peuple », elle est créée en 1671 au Palais-Royal pendant une période de travaux. Molière souhaite alors se libérer des contraintes des comédies-ballets et des comédies à machines et revient au « théâtre pur », offrant au metteur en scène d’aujourd’hui une grande liberté d’action.

“궁정이 아니라 민중을 위한 극단 작품”으로 1671년 (*몰리에르 극단이) 팔레 루아얄에서 일하던 시기에 제작되었습니다. 몰리에르는 코미디 발레와 기계 코미디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오늘날의 연출가에게 내용 전개상 많은 자유를 제공하는 “순수한 연극”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https://www.comedie-francaise.fr/fr/evenements/les-fourberies-de-scapin2122#


(*내가 불어를 아주 기초적인 수준으로만 알아서 번역기를 통한 영어 중역 및 자체 판단한 의역을 거쳤다. 몰리에르와 그가 이끌던 극단은 1661년부터 팔레 루아얄 극장에 머물며 공연했고, d’action은 배우의 연기 또는 극본의 전개/줄거리를 뜻하는데 맥락상 후자라고 판단했다. 혹시나 불어를 잘 아는 분이 이 글을 보고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언제든지 오류 지적 환영합니다. ㅠㅠ)



‘기계 코미디’라는 용어가 언급되는데, 기계 연극pièce à machines은 다양한 무대 기계 장치로 화려한 특수 효과(스펙터클)를 제공하는 연극을 말한다. 17세기 프랑스에서는 발레, 오페라, 연극 등 각종 공연에 이처럼 특수 효과를 일으키는 기계 장치가 많이 사용되었다. 캐서린 비아노*따르면 특히 발레 공연에서 이런 특수 효과의 개발이 중요했다. 17세기 초 프랑스 발레는 이탈리아 스타일의 영향을 받아서 그로테스크 미학을 무대 위에 빚어내기 위해 기계 장치를 활용한 특수 효과 사용을 선호했다고 한다. *Viano, Catherine. “Theater as Machine, Theater of Machines in Seventeenth-Century France.” (2018). https://doi.org/10.17615/298z-f611 pp.15-16


몰리에르의 작품 중에서는 <돈 주앙>이 대표적인 기계 연극으로 많이 언급된다. 혹시 기계 연극에 관심이 있다면 다음 링크도 참고하라. 프랑스 고등학교의 문예 교육 향상을 목적으로 Éditions Le Robert와 WebLettres가 운영하는 교육 및 문화 블로그 Passeurs de Textes의 웹진 기사이다: https://blog-passeurs-de-textes-lycee.lerobert.com/litterature-au-lycee/spectacle-et-comedie-lapport-des-pieces-a-machines-au-xviie-siecle-1102.html



<타르튀프> 리뷰를 할 때 몰리에르가 태양왕 루이 14세와 친밀했다가 이후 정치적 이유로 손절당했다고 이야기했다. 절대왕정의 상징 루이 14세는 사치스럽기로 유명한 왕이었다. 대개 권력 있는 자의 사치란 부를 과시하면서도 자신의 교양과 품위를 강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분야를 막론하고 예술 관련 업계에는 늘 부유한 후원자와 그의 도움을 받는 예술가라는 클리셰가 존재한다. 루이 14세와 몰리에르의 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공연예술에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자신의 재력과 조예를 드러냈고, 귀족이나 성직자 등 당대 기득권을 비판했던 몰리에르를 총애함으로써 초기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주변 세력을 견제했다.


특히 발레를 사랑했던 루이 14세를 위해 몰리에르는 풍자적 희극과 발레를 결합한 코미디 발레(발레희극)창안한다. 코미디 발레는 왕과 귀족들로부터 웃음을 이끌어 내며 인기를 얻었고, 나중에 루이 14세가 몰리에르로부터 등 돌리기 전까지 프랑스 궁정의 대표적인 공연예술로 자리잡았다. 2000년에 개봉한 영화 <왕의 춤>(Le Loi Danse)이 코미디 발레를 소재로 몰리에르와 당시 궁정 음악가였던 장바티스트 륄리 및 루이 14세의 관계를 그리고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감상을 권한다. <왕의 춤>은 현재 왓챠피디아에서 스트리밍 서비스 중이다.


아래 링크는 경희대 연극영화학과 김학민 교수가 기고한 문화일보 기사로, 루이 14세가 당대 문화·예술 특히 공연예술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20030201031612000001


코미디 발레와 기계 연극은 왕과 귀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본을 한껏 투입하여 화려하게 연출한 궁전 공연이었다. 또 내용면에서도 굵직하고 심각한 주제를 다룬 ‘고급 코미디’였다. <스카팽>은 이런 궁전 공연의 제약들로부터 벗어난 소박하고 가벼운 코미디고 통속적인 주제를 다뤄서 당대 비평가들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몰리에르는 고대 로마 희극작가 테렌티우스의 희극과 이탈리아의 즉흥극 ‘코미디아 델 아르테’ 방식(우리나라 ‘마당놀이’처럼 배우 중심의 희극)을 고수하며 민중과 눈높이를 맞춘다. 거창한 주제의식보다는 단순하지만 솔직한 고백과 엄숙주의에 대한 도전이 숨어 있다. 스카팽도 이탈리아 즉흥극의 고정 캐릭터 ‘스카르피노’의 이름을 그대로 따른다.


상기 인용문은 황승경 연극평론가·공연칼럼니스트가 2019년 <스카팽> 초연 당시 「신동아」에 기고한 기사 에서 발췌한 것이다. 극을 둘러싼 배경 지식을 다방면으로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으니 참고하라: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832170/1



<인간 혐오자>나 <타르튀프> 같은 극을 생각하고 <스카팽>을 보러 가면 조금 당황할 수 있다. 이번 공연 관람 후 이 작품이 왜 17세기 프랑스의 고상한 비평가들 입맛에 안 맞았는지 납득이 갔다. 아쉽게도 나 역시 이 극이 별로 취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내 입가에 미소를 건 채로 보다가 중간중간 실없이 웃었고,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와 섬세한 연출을 감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주위 관객들의 반응도 아주 좋았다. 연말에 남녀노소 누구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공연이라 주변에 많이 추천하고 싶다. 몰리에르가 각종 제약에서 벗어난 “순수한 연극”을 추구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정말 보고 나오면서 연극이란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됐다.


나는 사실 희극보다는 비극을 선호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희극이 싫은 건 절대 아니고 잘 보지만 이번 공연은 개그코드가 좀 안 맞았다. ㅠㅠㅋㅋ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몰리에르 작품은 <인간 혐오자>인데(나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몰리에르의 최고작으로 많이 회자된다), 솔직히 희극치곤 심각하고 별로 재미가 없다. 그래서 내 취향이다. ㅋㅋㅋ


희극은 무조건 빵빵 터지고 웃겨야 할까? 희극을 연출할 땐 항상 텍스트의 희극성을 극대화시켜야 하는 걸까? 개인적으로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 비극도 웃기게 연출할 수 있고 몰리에르 희극도 진지하게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연출한다고 해도 셰익스피어 비극에 담긴 근본적 비극성이 무시될 수는 없으며 몰리에르 희극에 담긴 재치와 풍자가 홀연히 사라지진 않는다. 극작가로서 몰리에르는 일관적으로 ‘뼈 있는’ 웃음을 자아내며 재미와 작품성을 동시에 추구했다.


[...] 몰리에르는 희극 장르에서 일찍이 그 누구도 확장시키지 못했던 독창적인 차원을 만들어낸다. 장르간의 위계가 명확한 프랑스 17세기에 코미디는 비극에 비해 열등한 장르였다. 그러나 몰리에르가 라신과 함께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의 본질인 ‘엄밀한 형식 속에서 인간 본성의 탐구’를 열등한 장르 코미디를 통해서 구현해 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북 p.21 조만수 연극평론가 겸 충북대 교수의 「몰리에르와 함께 웃기」中


관객마다 몰리에르의 극에 기대하는 바가 다를 것이다. 희극의 대가라는 명성이 있는 만큼 일단 뭐가 됐든 웃을 수 있는 재미있는 극을 원할 수도 있고, 유머보다는 몰리에르가 작품 속에 풍자적으로 녹여낸 예리한 통찰과 치밀한 심리 묘사에 주안점을 두고 감상하길 원할 수도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관객은 특히 국립극단의 이번 <스카팽> 공연을 매우 만족스럽게 관람할 수 있을 테니 강력 추천한다. 요즘처럼 살기 팍팍하고 걱정거리가 많아 쉽게 지치는 시대에 조금이나마 세상만사 내려놓고 웃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공연은 충분히 보러 갈 가치가 있다. 프로그램북 각색·연출의 글에 따르면 <스카팽>이 국립극단의 유일한 희극 레퍼토리라는데 앞으로 다른 희극 작품들도 많이 기획되면 좋겠다. (<수전노> 할 생각 없으신가요…? ㅋㅋ)


임도완 연출가는 몰리에르의 희곡 『스카팽의 간계』를 현대적으로 로컬라이징했다. 참신하다고 생각한 연출이 여럿 있었다. 극중극의 형식을 취해 몰리에르를 인물로 등장시키고 대사에 시의성을 반영한 점, 음악적 요소를 다양하게 활용해 몰입감을 높인 점, 슬랩스틱과 러닝개그로 희극성을 강조한 점 등등 호불호를 떠나 극을 구성하며 얼마나 성실히 많은 고민을 했는지 엿보여서 좋았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이번 <스카팽> 공연은 배우들의 저력을 크게 체감한 무대였다. 와 연습하느라 진짜 고생했겠다… 생각이 들 만큼 거의 대부분의 출연진에게 매 장면 많은 기량이 요구되었는데 다들 힘든 기색도 없이 타이밍 딱딱 맞춰 열정적으로 모든 것을 소화해 내는 모습을 보고 감명받았다. 어떤 극이든, 어떤 배역을 맡든 배우에게 쉽고 단순한 연기란 없겠지만 희극 연기는 특히 살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다(사람들을 웃긴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ㅠㅠ) 즉흥성(관객과의 소통, 애드리브 등)과 극 전개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도 난관이었을 텐데 모두 대단히 프로페셔널했다.


사족으로 국립극단 프로그램북은 늘 알차서 좋다. ㅎㅎ 공연장에서 프로그램북을 구매하지 못했다면, 국립극단 홈페이지의 해당 공연 상세페이지에서 PDF 파일로 무료 다운로드할 수 있다: https://www.ntck.or.kr/ko/performance/info/257087 


극을 봤다면 국립극단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재작년 재연 당시 인터뷰도 참고가 될 것이다: [국립극단] 연극 <스카팽> 예술가와의 대화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커튼콜 사진 :) <스카팽>은 12월 25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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