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문(2021. 01. 특집)에 실림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까? “네 이름은 물가 숙이야.”라고 아버지가 일러 주었다. 네모 칸 공책에 삐침과 파임, 가로획과 세로획을 순서대로 적으며 쇠 金, 물가 淑을 천천히 보여주었다. 나는 그때 왜 이름이 한 글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대하기가 어려워서 그러질 못했다. 평생 분신처럼 사용할 이름으로 잘 새기라는 당부 겠거니, 나름 상서로운 뜻이 담겼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방바닥에 엎드려 익히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서도 외우고 눈을 감고도 말했다. “물가 숙, 물가 숙, 물가 숙….”
중학생이 될 때까지 내 이름의 의미는 ‘물가’였다. 1학년 어느 날 담임 선생님과 면담이 있었다. “이름이 맑을 숙이구나. 한 글자여서 외롭지 않겠니? 맑음이라…. 맑음이라고 하면 어때 발음하기도 수월한데?”라고 반농담처럼 말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부를 때는 “말금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때 알았다. 한자어 淑은 ‘맑다’나 ‘깨끗하다’라는 뜻의 글자라는 것을. 水(물 수)와 叔(아재비 숙)이 결합한 형성 문자라는 것을. 더 나중에 한 일이지만 국어사전은 ‘맑다’나 ‘깨끗하다’라는 건 물이 아닌 ‘사람의 성품’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내가 알던 ‘물가 숙’은 맑다거나 깨끗하다, 착하다. 어질다. 얌전하다. 아름답다. 등등의 뜻을 품은 글자였다. 아버지가 들려줬던 ‘물가’는 없었다. 그냥 글자를 쉽게 익히라고 삼수 변(氵)을 ‘물가’로 풀어서 가르쳤을지 모른다고 여겼다.
역사적으로 보면 외자 이름은 주로 왕가에서 사용했다. 고려 475년 34대 왕들이 그랬고, 조선 시대에는 태종(이방원)과 단종(이홍 위)을 제외한 25대 임금 모두 한 글자 이름이었다. 그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왕의 이름으로 쓰인 글자는 일반인이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들의 이름을 홑 글자로 지어 백성들이 쓸 수 있는 글자가 줄어드는 것을 방지했다.
‘숙’이라는 글자는 아주 흔한 이름 자다. 우리나라 여성의 이름 중에 가장 흔한 호칭 중 하나다. 갑, 을, 병숙이, 일, 이, 삼숙이를 비롯한 세상의 온갖 ‘숙’이 봄 강변에 다북쑥처럼 우거졌다. 교실이나 사무실 등 같은 울타리 안에서 겹치는 이름도 많아서 각기 다른 별호를 붙이기도 한다. 발음이 딱딱했음에도 그리했음은 뜻을 좇았을 것이다.
다행이었을지 ‘숙’ 한 글자는 그나마 드물었다. 그런데 50대 때였다. 중등학교 교감 업무를 보았을 적부터였다. 같은 그룹 안에서 똑같은 이름을 만났다. 메신저 소그룹에 함께 속했다. 소속이나 간단한 소개 글이 적혔음에도 몇 번인가 잘못 배달된 메시지가 있었다. 이동하지도 않았는데 “영전을 축하합니다. 승승장구하시기를 기원합니다.”라든가 등이 그것이었다. 나에게 올 내용도 상대방에게 갈 것 같은 염려도 되었다.
어떤 날은 안면이 있는 사람이어서 메시지가 잘못 전달되었다고 귀띔하는 답글을 보냈다. 무심히 한 자기의 클릭이 무색했던지 실수라고 여겨 자존심이 상했던지는 알 수 없었다. 쪽지를 읽은 순간 그룹 명단에서 내 이름과 아이콘을 비활성화 처리하였다. 친절도 병이라고 모른척할 것을 괜한 오지랖이었음이 씁쓸했다.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내 이름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주 어릴 때는 멋모르고 지냈다가 자라면서는 남과 다르니 특별히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았다. 내 홑 글자 이름은 말 그대로 인생살이도 맑았다. 상당 기간 눈물 한 바가지의 구불구불 인생길이었지 싶다. ㄱ으로 끝나는 발음이 꼿꼿해서였든지 성격도 곧기만 했던가 보다. 왕족의 이름처럼 지었을지는 몰라도 그다지 풍요롭지도 않았다.
어느 날 근무지에 도장 파는 사람이 찾아왔다. 요즘은 전자문서시스템 시대라 도장을 찍을 일도 별로 없다. 인사 정도로 응수했는데 집요하리만치 스탬프 방식 도장을 추천하였다. 한 가지 제안까지 곁들였다. 이름의 글자 수가 적으니까 어느 부분에 점 하나를 찍어주겠단다. 감쪽같이. 덧붙이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점이 글자 하나의 몫을 한다고. 안정되고 완전하며 운수 대통할 것이라는 덕담은 맛깔난 고명이었다. 순간 얼굴에 점 하나 찍어 세상을 들끓게 했던 드라마가 떠올랐다. 헛웃음이 났다. 어딘가에 점을 추가하면 ‘내 이름이 점숙이가 되는 거야?’라고 스스로 묻다가 이 웃픈 속임수에 슬그머니 동조하고 말았다.
주문했던 도장은 우편으로 보내왔다. 잉크를 머금고 있어서 누르기만 하면 선명하게 찍혔다. 인사서류나 승진 서류에 그 도장을 활용하였다. 내 길운뿐만 아니라 서류를 제출하는 이들의 뜻한 바가 잘 이뤄지도록 주문을 걸었다. 나와 다른 이에게 좋은 의미가 되기를 기원하였다.
그렇게 남이 모르는 비밀스러움도 간직했겠다 인감도장으로 등록하려 주민센터에 갔다. 일격에 거부당했다. 스탬프 방식 도장은 인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몰래 한 사랑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도장 속에 숨겨 놓았던 내 ‘점숙’은 지금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다.
며칠 전 선운사 도솔암 내원 궁에 갔다. 불교도 잘 모르면서 가끔 선운산에 가면 지장보살을 보러 간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는데 난간에 출처 불명의 경구가 붙여져 있었다. “이름은 다만 이름일 뿐이다. 현명한 사람은 이름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평가하지 않는다. 이름이 그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그 자신을 만들기 때문이다.”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하지만 다른 생각도 들었다. 왕족의 이름처럼 아버지가 지어 준 한 글자 이름 ‘물가 숙’으로, 선생님이 불러주었던 ‘말금이’로 어쩌면 고독한 여정의 격랑을 잘 노 저어 왔다. 남은 삶에서 만들어 갈 이름은 시인 김춘수의 <꽃>에서 찾고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라고 말한 것처럼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다져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