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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Aug 18. 2024

동그랗고 하얀 빵 안에 들어있는 것  

나의 성당 입성 고백기  

나에게 '종교'는 배타적인 먼 나라였다. 아빠는 종교가 없고, 엄마는 시시때때로 종교를 바꾸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와 동생은 원불교 유치원과 천주교 유치원을 각각 다니는 기이한 결과를 낳았다. 유년시절 내내 성탄절 즈음에는 사탕 받으러 교회에 갔고, 석가탄신일 즈음에는 절밥 먹으러 절에도 곧잘 갔으니, 종교와 신의 존재는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을 뿐더러, 깃털처럼 가볍고 변덕스러운 놀잇감일 뿐이었다.


다만, 여러 종교 중에서 사람에게 가장 친화적인 개신교인들에게 여러번 휘둘리긴 했었다. 내가 외로울 때마다 개신교인들은 나에게 전도를 위해 접근했다. 그래서 나는 방학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 준다는 기독교 기숙가에 가기 위해서 새벽기도를 따라간 적도 있었고, 외국연수때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주말에 외국 교회에 따라가서 점심이라도 얻어먹고 사람들과 말을 섞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만난 여러 종교인들에게 특별히 나쁘거나 좋은 이미지는 딱히 생기지 않았다. 그냥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다른 차이지, 특정 종교인이 모두 좋다거나, 모두 나쁘다거나 하지는 않은 걸 보고 나는 더더욱 종교의 근원에 대한 작은 관심도 사라져 없어졌다.


일은 갑작스럽게 닥쳤다. 나는 가장 신뢰했던 사람에 대한 상처와 나 자신에 대한 자책에 따른 우울감으로, 난생 처음으로 심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냥 주저 앉아 있어도, 아주 가끔 의지가 생겨서 슬쩍 펄쩍 뛰어 보아도 도무지 올라갈 수 없는 우물의 바닥에서 나는 오랜 시간 꾸물댔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도 의문이 갔다. 내가 오늘 목숨을 끊는다면 누구라도 몇마디 해주며 반성을 몇 초라도 할라나 궁금해서 죽고 싶기도 했다. 그 정도로 관심에 구걸했고 피해망상이 꽤 컸던 시절이었다. 하도 힘들어 하니깐 종교가 있는 지인들은 나를 위해 기도해준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 또한 그들의 착한 척 같아서 그리 고맙지 않고 고까웠다. 그 때 나는 엄청나게 두꺼운 방탄 껍질로 나 자신을 수십겹 싸매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그걸 다 벗기고 들어와서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속으로는 바랐다.   


정신과 약을 좀 먹다가, 좋은 상담선생님을 만나게 되서 매주 심리 치료를 받던 시점은 코로나 즈음이었다. 2년 가까이 되는 상담 내내 나는 매주 울었고, 선생님은 우는 것도 좋은 표현이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물을 흘려 보내도 다음주에 또 그만큼의 눈물이 다시 차오르다 보니 나는 뫼비우스의 띠를 하염없이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날들의 한가운데 친한 언니가 나에게 '매듭을 푸는 기도문' 링크를 보내주었다.


매듭을 풀어낸다는 말이 왠지 느낌이 좋았다. 매듭을 풀면 왠지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날 탈출구가 있을 것 같았다. 별게 아니고 그냥 기도문대로 그걸 읽으면 된다고 했다. 나는 어차피 아침부터 또 눈물이 흐를 걸 알기에, 눈물이 흐르려고 하는 그 순간에 밖에서 혼자 걸으며 그걸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기도문을 출력해 놓았다. 그 날은 무슨 힘이 났는지, 바닥에서 숨만 쉬고 있다가 그 간만에 한 뼘이라도 뜀띠기 해보고 싶던 날이었나 보다.


하늘과 풀밖에 없는 산책로에서 나는 그 기도문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읽었다. 작게 소리내어 보았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냥 읽다 보니 생각 없이 걷게 되었다. 평소처럼 생각에 가득 차 자기연민에 찬 눈물이 흘러 나오지 않았다. 언니에게 고맙다고 메세지를 보냈다. 언니는 무척이나 행복해했다.


작은 움직임 뿐인데 누군가를 저리 행복하게 할 수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거기가 시작점 같았다. 나는 버림받은 사람 같은데, 하늘 위 저 편에서는 나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다니 내심 그 사랑을 증명받고 나도 좀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충분히 받으며 사는 그 느낌을 받고 싶기도 했다. 아이처럼 나는 그 품을 필요로 했다.   


나는 근처 성당 몇 곳을 검색해 보았다. 두 군데에 전화를 했는데 한 군데에서 마침 다음 주에 새신자 교리 수업에 들어가니 참석해보라는 답을 받았다. 그동안 나에게 접근했던 개신교인들과는 달랐다. 덜 친근했고, 오히려 '이 종교를 믿으려면 이쯤은 해줘야 한다'는 요구사항이 더 많았다. 더 친근하면 나는 아마 도망갔을 것인데, 그 건조함이 나를 편안하게 했다.


이 종교에 발을 담그려면 '세례'라는 것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을 위한 공부 과정은 무려 1년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때는 코로나 시국이어서 모든 것을 단축했고, 모든 사교 모임을 제외한 딱 필요한 교리 수업만 필요하기에 6개월 동안 매주 화요일 저녁에 참석해서 책 한권을 같이 공부하면 된다고 했다. 세상은 공포 속이었으며, 마스크를 끼고 굳이 위험을 감내하며 집단 모임에 가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으니, 새로이 신을 믿어보겠다고 모인 사람도 나 포함 딱 3명 밖에 없었다. 소수 인원이니 나는 안심이 됨과 동시에 빠지기도 좀 부담스러워진 새신자 모임이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나는 우리 동네에 알고 지내는 이웃이 한명도 없었으니, 당연히 성당에서 나를 아는 사람도 단 한명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첫 모임은 많이 긴장되었다. 그래도 마스크로 나를 감추고, 내 눈만 보이면 되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들은 의례 물을 것 같은 질문 조차 하지 않았다. 신부님과 수녀님은 내 직업도, 나이도, 가족관계도, 집주소도 묻지 않았다. 그저 왜 새신자 수업을 받고 싶은지 짧게 연유를 물었다.


한 분은 어머님이 위독하신데, 딸이 이 종교를 믿는게 어머님의 죽기 전 소원이라 하셔서 왔다고 했다.  한 분은 친한 친구가 간곡히 권유해서 그 친구분과 늘 함께 왔다. 나는 사랑받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분명 그런 마음이었는데, 부끄러워서 뭉뚱그려 설명한 것 같기도 하다). 코로나 시국이어서 모든게 적적하고, 마음은 복잡하던 그 시절 시간을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심리 상담을 매주 하듯이 나는 한 주에 30분 정도는 성당 안의 작은 사무실에서 새신자 수업을 듣기로 동의하고 신청서를 썼다. 그들은 덜 친근하니, 몇 번 듣다가 맘에 안들면 에라 모르겠다 잠수타도 나를 찾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새신자 교리 수업을 받으며, 종교의 기본적인 것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꽤나 이성적인 나에게는 비이성적인 종교 이론이 잘 흡수되지 않으니, 주입식 겉핥기처럼 느껴져서 조금 지루하기도 했다. 천지창조와 예수님의 탄생 등의 기본적 상식 같은 이야기는 그냥 넘어간다 쳐도, 조금만 깊숙히 들어가도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기가 쉬웠다. 그 무엇보다 내 자신이 죄인이고, 복종해야 하고, 당신이 무조건 맞고 경외스럽다는 그 개념이 처음에는 듣기에 꽤나 거북했다.


신이든 뭐든 뭔가 나와 같은 선상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나는 아무 잘못을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무조건 내가 지고 들어간다는 그 느낌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다. 기도문이나 찬송가의 대부분은 높으신 분이 당연하고, 나는 복종하겠다는 류의 내용이어서 꽤나 낮간지럽기도 했다. 그 와중에 성경도 필사하라 하고, 매주 미사도 한번씩 꼭 참석하라고 하니, 난 그냥 초딩이 대학교에 가서 이 수업 저 수업 기웃거리며 대학생 흉내를 내는 것만 같았다.


형식적인 의례가 많은 천주교 미사 의식은, 눈치를 보며 따라할 일이 너무 많았다. 뭔가를 읇조리고,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가, 다시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하다가, 또 갑자기 줄지어 앞에 나갔다가 들어와야 한다. 나는 악보를 볼 줄 몰라서, 찬송가를 부르는 타이밍 조차 대충 립싱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 저래 따라 하느라 미사 의식을 흉내내느라 정신이 없었고,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은 나는 반년 내내 늘 곁눈질을 하며 얼레벌레 미사 의식을 '따라' 가는데 급급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어렸을 적 천주교 유치원을 다닐 때 사람들에게 하얀 과자를 나눠주고, 나 빼고 어른들은 다들 그걸 하나씩 몰래 받아먹는 것 같아서 꽤나 부아가 났던 희미한 기억이 있다. 알고 보니 그게 미사 중에 매번 하는 의식이었다. 그게 도대체 하얀 동그란 물체는 무슨 맛인지, 어떤 질감인지 궁금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튀어나왔다.


이제 나도 성인이니 미사에 가면 저걸 얻어먹는가 슬며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신부님이 그건 세례를 받은 사람만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나같은 새신자는 빵을 달라고 손을 내밀면 안되고,  대신 머리를 살짝 숙이면 신부님이 머리에 손을 얹어주신다고 했다.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손을 내밀지 않고, 머리를 살짝 숙였다. 신부님은 손을 내 머리에 얹고 무언가 깊게 기도를 하는 것처럼 짧은 시간동안 정적을 유지했다. 그 순간이었다. 왠지 모르게 굉장히 뭉클했다. 신부님이 나를 사랑하는 듯한 느낌이 손을 통해 내 머리 위로 전해졌고 그 스킨쉽이 너무 압도적으로 느껴져서 약간 등에서 소름이 돋았다.


사랑을 받고 싶어서 온 이 곳에서, 나는 성경 속에서도, 노래 속에서도, 기도문 속에서도 사랑을 못찾았다. 하라는 대로 따라하는 것 자체가 정신이 없어서 허덕일 뿐이었다. 그런데 단 한순간, 미사때 신부님이 내 머리를 따뜻하게 만져주시는 그 찰나의 순간은 정말로 사랑받는 느낌이 즉각적으로 머리 끝에서 등줄기까지 전해져 왔다. 그 당시 신부님은 항상 굉장히 성의있게 내 머리에 손을 올려 주셨던 것 같다.


그 느낌, 그 소름돋는 느낌은 첫 날 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매번 그 순간마다 신기한 신체적인 느낌이 전해져 왔다. 신부님과 나는 서로 속 깊은 대화 한번 한것도 아니었지만, 신부님의 터치 하나로, 울던 아이가 엄마의 토닥임 하나에 잠이 들듯, 나는 그저 마음이 편안해졌다. 심지어 나중에 세례를 받으면 이제, 신부님이 내 머리도 안만져주고 빵을 먹어야 한다는게 오히려 아쉽기도 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나는 신부님의 손을 찾기 위해서 이해가 여전히 안되는 미사를 중도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꾸준히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루틴은 내 마음의 한 구석을 그쪽에 집중하게 만들어서, 마음이 더 가라앉지 않도록 하는 데도 나름의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날, 부활절, 그러니깐 나의 세례식 날이 점점 다가왔다.




세례를 받으려면 대모님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매듭 기도문'을 줬던 친한 언니가 나의 대모님이 되주었다. 시아버님은 원래 성당에 다니시는 분이셔서 가장 기뻐하시며 시골에서 가족들을 다 끌고 성당으로 헤쳐 모였다. 이 동네에서,이 성당에서 아는 사람 한 명도 없이 6개월을 다녔는데, 나를 위해 먼 지방에서 와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황송했다. 코로나 이후 휑했던 성당이 세례식날은 간만에 북적였다. 한복을 입고, 또는 깔끔한 옷을 입고선 의식을 거치며 나는 그날 세례명 엘리지아라는 이름을 받고 미사포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의 몸이라는 그 빵을 먹을 수 있었다. 신부님께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이제 신부님이 머리를 만져주시는 것을 못받아서 아쉬워요.” 신부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것보다 말도 안되게 높은 게 성체를 모시는 (빵을 먹는 것) 겁니다.“

차례가 되자 나는 내심 기대가 되었다. 무슨 맛인지, 저건 어디서 제조하는지, 다들 먹는 티를 안내던데 몰래 녹여먹는 비법이 있는건지, 등등 잡생각이 가득했다. 줄을 서서 내 차례가 되자 조금 떨렸다. 신부님은 얇고 동그란 하얀 물체를 나에게 주셨고, 나는 조용히 그것을 입 안에 넣었다.

굉장히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입 안에 넣었는데 내 얼굴과 상체까지 또 뭔가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소름이 끼치는 느낌과는 사뭇 다른데 그 표현 말고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건 신부님이 머리를 만져주실 때와 같은 그런 좋은 느낌이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그것이 내 몸에 퍼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것이 사랑일까?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무한한 사랑을 이론으로만 우겨넣다가, 그 빵이 몸에 퍼지며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느낌‘으로 알게 되었다. 영화 인터스텔라 처럼, 나는 내가 아는 세상 밖, 저 다른 큰 초월적인 세계를 상상해 보았다. 저 먼 곳에서 나에게 계속 무한한 사랑의 신호를 보내는 누군가가 있다. 그것 만으로 나는 마음이 뜨거워졌다. 내 경험 속에서 느끼는 가장 유사한 관계는 부모의 사랑이다. 내가 과연 내 아이에게 그런 무한한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아이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내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아이가 있는 나지만 여전히 막연하다. 아이로 인해 행복할 때도 있지만, 때론 같이 화를 내고 같이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 아니 자주 나는 아이보다도 내가 너무 소중해서, 모성애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사랑을 갈구한다.

내 자신이 너무 못나서 사랑을 못 받는 것 같고, 여전히 남에게 사랑을 더 받고 싶은 40대의 아이인 나는 아마도 부모님에게 충분한 사랑이 더 필요했나보다. 그래서 세상의 여타 많은 사람들처럼 인정 욕구에 허덕이며 관심과 성취에 목을 매는 종류의 사람이다. 이런 나같은 부족한 인간을 하느님은 내리죄는 빛처럼 항상 사랑하며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그걸 내가 잘 못믿으니깐, 예수님의 몸을 받아드릴 때 (빵을 먹을 때) 마다 그 이상한 느낌으로 전해주는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고.

더 이상 나는 왜 사랑을 덜주었냐고 부모님에게든, 직장에게든, 남편에게든, 아이에게든, 친구에게든 매달리지 않으려 한다. 그것에 매몰되서 침몰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한낮 부족한 인간이고 부족하다보니, 그들에게 매달려봤자 해결이 안될 뿐더러 서로를 더 원망하게 할 뿐이다. 그게 아프다고 울고 있다면, 저 위에서 나를 보는 하느님은 훨씬 더 아플 것이다. 모성애가 부족한 나지만, 나도 내 아이가 아프면 안절부절하고 정신이 없다. 그것처럼, 내가 아프거나 죽어서라도 타인에게 관심을 받아야겠다는 못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하느님은 나를 어찌 여겼을까 생각해본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고 많은 선택지에 따라 각자의 색깔대로 살다가 언젠가 죽는다. 가령 배우자의 선택, 결혼 유무의 선택, 출산의 선택 등등 으로 각자의 삶은 제각기 바뀐다. 그 중에서 나는 종교의 선택 또한 커다란 그 무언가라고 여겨진다. 종교 이론에 대한 거부감, 신에게는 착한척 하며 위선적 악행을 하는 사람은 인류가 생긴 이래로 빛과 어둠처럼 계속 존재했을 것 같다. 그러니 뭐가 진리인지 다들 미궁속에 빠져, 결국 각자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살다가 죽는 것 같다.

그 거대하고 원론적인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그저, 내 삶에서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왜 생겼고 왜 나를 힘들게 했는지, 그리고 종교를 선택한 이후에 어떻게 그것이 흘러갔는지에 대한 것에 대해 초점을 두어 글을 적어보았다. 사실 내가 뭐 엄청나게 종교에 귀의한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다소 불성실한 신자로서 가끔씩 건너 뛰며, 가끔씩 졸기도 하며 적당히 성당에 다닌다.

그래도 망둥이처럼 날뛰던 그 시절의 마음은 조금 편안해졌다. 관심 받고 싶어서 죽어야 겠다는 생각을 이제는 더이상 하지 않고, 가끔 상담선생님을 만나 근황을 나눈다. 예전처럼 타인을 원망하며 늘 울지는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며 아파한다. 하지만, 언제든지 나를 뒷받쳐주는 후원자가 있다는 것, 모든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것, 단지 그걸 다들 모르고 망둥이처럼 날뛰고 있는 한 가운데 속에서 나 역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게 내가 태어난 이 세상이라는 것을 이제는 장님이 코끼리코 만지듯 어렴풋이 안다.

이러다가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또 바람에 흔들리며, 그 사랑을 순간 순간 잊을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잊지 않도록 다시 빵을 먹으며, 여지없이 차오르는 그 느낌을 받으러, 그 사랑을 끝도 없이 확인하고 싶어서 또 그 곳에 간다. 그리고 그 온기를 받으면, 잊지 않으려고 그 사랑을 흉내내며 가족에게 뭐라도 하나 따뜻함을 표현해본다. 단지 인간에 대한 참을성 유효기간이 짧아서 자주 반복해서 퍼날라야 하는게 문제긴 하다. 그래도 여전히 내 가장 큰 기도 제목인 ‘다정한 가정‘을 위해 나는 오늘도 숨쉬며 생의 어딘가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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