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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원 Apr 18. 2023

지각

230418

 지각이다. 수업이 시작될려면 한시간이나 남았지만 벌써부터 지각이 결정된 거다.. 당장 1분뒤에 뭔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현실인데 1시간 뒤라는 먼 미래가 내 기대와는 다른 사건으로 결정되었다. 노력하지 않았다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난 이 열차를 탈려고 얼마나 똥빠지게 뛰었는데!


 가슴속에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화는 뭐에 대한 화인지 생각해 보았다. 불과 30분 전 침대에서 '5분만 더'를 외치던 나 자신? 초록불로 드럽게 안바뀌던 횡단보도? 아냐, 그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나는 평소와 같은 11시 04분에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내려가면 약 30초 뒤에 닫힐 스크린도어를 통과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씨발! 오늘은 에스컬레이터가 망할 점검을 해서 느려터진 승강기를 타야만 했다. 그래.. 이거 때문이었어.. 공사가 문제였다. 그런데 잠깐, 공사가 문제였다면 묵묵하게 에스컬레이터를 고치던 그 전기공에게도 잘못이 있나? 아니지.. 그럼 한달마다 공사를 해도 계속 고장나는 이 에스컬레이터 부품에게 잘못이..? 아냐 아냐 이건 공무원인지 공사 직원인지 암튼 그 나쁜놈이 게으름을 피워서 그런걸꺼야.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학교에 가야 했다. 뒤로 돌아 뛰어가던 중 반대 방향으로 향하던 할머니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그렇게 소요된 2.5초 간의 지체는 안그래도 급한 내 마음에 불을 지폈다. 씨발, 할머니! 좀 잘좀 보고 다니세요!


 남들이라면 이 상황에서 걍 포기했을 것이다. 닥쳐올 지각을 너그럽게 수용하기엔 한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그 타협심을 공략하여 어김없이 내게 찾아오는 지각 이놈새끼한테 도저히 굴복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시험 전 마지막 수업, 수업 전에 교수님이 무슨 힌트를 줄지도 모르는 날이라구!


 택시를 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지도 앱의 예상도착시간은 내게 택시를 타도 지각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부정적 예언을 날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택시는 비쌌다. 지하철을 탔으면 1450원이면 갔을 거리였지만 택시를 타면 22900원이 나왔다. 갑자기 이번 주말 구박받으며 번 6만원어치 알바비가 떠올랐다. 어차피 택시 타고 학교가도 늦을 확률이 높으니깐 돈도 아낄겸 중간 지하철역까지만 택시를 타자, 라고 결론을 지었다. 혹시 그 기사님이 유능한 드라이버여서 내가 방금 놓친 그 지하철을 따라잡을지도 모르잖아? 나를 태웠는지 안태웠는지는 관심도 없이 매몰차게 떠나버린 그놈의 열차에게 보란 듯이 한 방 멕여줄 테다.


 택시에 다이빙하듯 올라탄 나는 순간적인 안정감을 느꼈다. 태아가 자궁 안에 있을 때 느끼던 안정감이 이런 것이었을까. 하지만 태아는 고요하고 따뜻한 자궁을 떠나 세상의 거친 바람을 불가피하게 마주칠 운명이었다.


 곁눈질로 살핀 기사님은 썩 호감형이라 말하기 어려운 관상이었고 그가 위기에 빠진 나를 구해줄 백마탄 왕자님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그런 절망감 속에서도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혹시.. 가능하시면 최대한 빨리 좀 가주세요"


 빨리 '좀' 가주세요? 나는 예상치 못한 내 단어선택에 당황했다. '조금'을 의미하는 '좀'이 붙은 것은 평소 나라는 인간이 지닌 대인관계적 자신감 부족 탓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좀'을 붙임으로써 문장은 버릇없는 명령형이 되었고 나는 싸가지 없는 사람이 되었다.


 기사님은 너같은 손님은 이미 수백 수천 차례 마주쳤다는 듯 타성에 젖은 목소리로 친절하게 말했다.


 "아, 물론이죠."


 하지만 그런 신사적인 응답과는 달리 기사님은 빠르게 갈 수 없었다. 아마 내 앞에 앉은 이가 이 기사님이 아니라 미하엘 슈마허라고 하더라도 만차의 올림픽대로에서 속도를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슬비가 내리는 오늘의 하루는 어두컴컴하고 찌뿌둥했다. 눅눅한 시트에서는 꿉꿉한 물비린내가 났다. 아, 역시 막히는 서울 차도에서 택시로 지하철을 따라잡는건 무리였을까. 택시도 타본 놈이 탄다고 애초에 무리한 기대를 가지면 안되는 거였다. 택시 안 라디오에서는 정부의 무책임을 비난하는 시민 청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기사님은 창을 살짝 열었다. 비가 오는걸 의식은 했는지 소심하게 5cm 정도만 열었을 뿐이다. 유체역학적 평형이 깨짐에 따라 공기가 바깥에서 새어들어왔다. 그 의문스런 행동에 의아해하던 와중 좌우 사이드미러를 절박하게 살피는 기사님이 눈에 밟혔다. 그는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서 차와 차 사이 틈으로 추월하려 애쓰고 있었다. 기사님은 위험을 감지하는 다람쥐마냥 양옆 사이드미러를 살폈고 트라이앵글을 치는 초등학생마냥 리드미컬하게 깜빡이를 켰다. 사실 이렇게 가도 따지고보면 2, 3초 정도나 앞당길 뿐 대세에 지장을 미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개의치 않는다는 듯 자신의 템포에 맞춰 오버액션을 했다. 뒤에서 멀어져가는 차가 분노를 담아 누른 클락션 소리는 도플러 효과에 따라 매끄러운 선율로 변했다.


 나는 기사님께 화답하고자 5cm가량 창을 내렸다. 어두운 하늘은 미워해도 추적추적 내리는 그 비만큼은 미워할 수가 없었다. 택시는 신호에 자주 걸려 애간장을 태웠지만 때때로 꼬리물기에 성공하여 꽤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내가 원래 기대하던 시간인, 스크린도어가 닫히기까지 30초 정도 여유가 있는 채로 택시에서 내렸다. 기사님은 자기 나름대로 작별인사를 하려 했는지 해독할 수 없는 손짓을 지었지만 나는 그것에 응하기엔 경황이 없었다.


 마침내 안착한 열차 내에서 핸드폰을 하던 중 발견한 것은 내 왼손바닥이 시꺼먼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왼손이 언제부터 렇게 더러웠는지 알지 못했다.


-


 결국 지하철은 나의 기대대로 12시 00분에 학교에 도착했고 내 최선은 결실을 거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각이었기에, 나는 스크린도어가 열리자마자 뛰쳐나가야만 했다. 이는 마치 굽어 있던 용수철이 튕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계단과 언덕에서 숨이 너무 벅찬 나머지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뜀박질을 멈출 수 없었다.


 모두가 나를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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