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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Apr 24. 2022

대추 올라잇

이 대추처럼 잘 마르는 것이 관건이야

 간단한 주전부리가 없을까 찬장을 열어보니 얼마 전 친정에서 가져온 말린 대추가 보인다. 그릇에 몇개 담아내는 소리가 퍽 건조하다. 지난 가을만해도 매끈한 몸으로 대굴대굴 잘도 굴러 다녔을텐데 어쩌다 이렇게 쭈굴해졌니. 한여름 풋대추였을 때는 말갛고 예쁜 대추가, 익어갈때는 갈색의 경계선이 얼룩을 만들며 푸른 얼굴을 점령해간다. 가을의 대추나무는 그렇게 점점이 갈색으로 변한 아버지 얼굴의 검버섯, 내 눈가의 기미처럼 익어간다. 죽 늘렸다 놓으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거울속 목 주름을 닮아가는 마른 대추.


지금부터는 이 대추처럼 잘 마르는 것이 관건이야


 마른 대추 한 알을 눈 앞에 올려놓고 바라본다. 힘 안들이고 말리기엔 이만한 크기가 마지노선이지. 대추보다 더 큰 열매를 제대로 말리려면 거대한 기계가 필요한 법이다.

  5년 전, 아이들 겨울방학때 아버지가 새로 들인 기계로 직접 말렸다며 우리집으로 감말랭이를 보낸적이 있다. 단감은 아삭한 맛으로 먹는 것인데 냉장고에서 일주일이 지나면 슬금슬름 물러져 못먹고 버리는 게 많으니까, 택배상자를 열어보니 양이 꽤 많다. 아이가 셋이니 특별히 많이 보냈다고 한다. 하이고 이걸 누가 다 썰고 말렸을까. 마트에서 파는 건 주홍빛에 모양도 곱고 예쁘던데, 얘는 때깔도 거무튀튀한게 먹음직스럽진 않네.


아이들이 먹을까 싶어 담아내니 몇 개 뜯어먹다 말고 안먹는다. 납작하고 잘 썰긴 했는데 껍질을 안벗기고 말린 것이다. 기계안에서 수분을 빼앗긴 껍질은 가죽처럼 질겨져서 뱉어야 하나, 삼켜야 하나 고민이 되는 존재가 되었다. 남동생이 그 감들을 다 땄을테고 어머니는 감 꼭지를 따고 썰었고, 아버지가 한판 한판 기계안에 넣었을 것이다. 돈 안되는 허드렛일은 안하시던 아버지가 처음 시도한 일이었으니 나라도 먹어야겠다 했는데 어라? 고추맛이 살짝 난다. 여름내 고추를 말리느라 바쁘게 돌아가던 기계가 가을이 지나도록 쉬지도 못하고 감을 말려댔으니 매운 맛이 날 수 밖에.


과육과 껍질이 한몸이 된 채로 뜨거운 기계속에서 오랜 시간 붙어 있었으니 쉽사리 떨어질 리가 있나. 잘 주물러서 껍질을 잘라내고 나니 한조각이 반조각으로 줄었다. 구정을 쇠러 친정에 가니 그보다 더 큰 꾸러미가 저온창고에 있는 것 아닌가. 현지 생산자들한테도 외면당한 감말랭이를 꺼내어 껍질을 모두 잘라내고 상에 내었다. 아버지 얼굴에 화색이 돈다. 맥주를 내어 어른들이 둘러 앉으니 그 많던 감말랭이도 순식간에 동이 난다. 고추맛 감말랭이 개발자였던 아버지가 다음해에 돌아가셔서 에디션이나 다음버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됐지만 감나무 씨앗은 더 멀리 퍼졌다. 주렁주렁 달린 감을 쳐다보며 멈춰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먹을만치 따가시요~"내버려두고, 우리집으로 도착한 단감들은 하루 이틀이내로 동네사람들에게 남편 회사 사람들에게, 모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러니 가을볕만 있으면 품 들일 없이 잘 마르는 대추 한 알은 얼마나 대견한가. 고운 낯으로 여물어가지 않더라도 다 익고 나면 겨울동물을 먹여살리는 강인한 씨앗, 도토리와 밤 빛을 닮았다.

  대추를 보고도 먹지 않으면 늙는다는 옛말도 있으니 한 알 먹어 본다. 처음 입에 넣을 때는 까끌하니, 감말랭이 껍질처럼 늦가을 잘 마른 장작맛이 난다. 침을 잔뜩 묻혀 혓바닥으로 몇 번 농락하니 얼굴 주름 펴지듯 대추도 잠시 회춘을 하는 것 같다. 오냐오냐 널 살살 벗겨먹어야 겠다 혓바닥으로 잔뜩 간지럼을 태우니 기억을 되찾은 검붉은 몸뚱아리가 부풀어오른다. 이빨을 들이밀어 살짝 속살을 맛보니 짭쪼롬한 껍질맛에 씹을수록 달달한게 침이 잔뜩 고인다. 감질나는 달콤함에 애간장이 탄 앞니들이 씨앗에 상처가 나든 말들 돌기왕성한 혓바닥을 멍석삼아 씨알을 긁어낸다.


3분 동안의 푸닥거리가 사탕보다 낫다.  달콤한 맛에 취해 혓바닥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빨아먹고 깨먹고 나서 밀려드는 허무함보다는 덜 달면서 혓바닥에 무엇 하나 남길 수 있어 다행인 말린 대추가 마음에 든다. 언젠가는 뱉어야 할 씨앗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깨끗한 씨앗을 내놓는 것이 사명인 것처럼 마른 대추를 오랫동안 어루만지는 거다. 끝이라는 인사없이 사라진 고추맛나는 과거를 눈물로 부풀리리더라도 이 작은 대추들이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대추 올 라잇(That's all right)'



2022년 3월 31일 쓰고

4월 24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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