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국제시간여행자연합 ITA
“해솔아. 이거 기름이야.”
찬물을 뿌린 듯 공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날카로운 적막을 가르고 해솔이 내 손에 들린 사과주스 병을 낚아챘다.
뚜껑이 열린 병의 입구를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댄 해솔이 홱 고개를 돌리며 손등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XX. 진짜 기름이잖아. 휘발유인가?”
어떤 종류의 기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온통 좀 전에 들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촤악’ 소리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예감뿐이었으니까.
해솔이 아이를 향해 몸을 틀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로 물었다.
“혜윤아. 너 오리 밥 줬다는 게 이거야?”
다그치듯 하는 기색에 놀란 아이가 겁먹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솔은 멈추지 않고 물었다.
“연못에 뿌렸어? 아니, ‘연못에만’ 뿌렸어? 너 이거 다른 데에도 뿌린 적 있어?”
아이가 해솔의 손에 들린 병을 도로 잡아채며 느릿느릿 답했다.
“스님들이 그랬어요. 여기 사는 동물들이 사과주스 좋아한다고. 이건 동물들 먹는 거니까 내가 먹으면 안 되고 동물들 줘야 한다고……. 오리 밥도 그래서 준 거예요.”
마음이 절로 급해졌다. 원하는 정보값만 빠르게 얻기 위해 내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 주스 어디어디에 버렸어?”
아이가 말했다.
“돌아다니면서 많이많이 뿌리라고 했어요. 어디에 뿌렸는지는 잘 기억 안 나요. 그냥 걸어오면서 계속 뿌렸어요. 동물들이 먹게.”
해솔이 거듭 다그쳤다. “얼마나 많이?”
“스님이 병 여섯 개 줬어요. 그거 다 뿌리면 여기 사는 동물들이 다 먹을 수 있다고 했는데…….”
나와 해솔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사찰의 온 사방을 향해 삽시간에 번져 나갔던 아까의 불길이 떠올랐다. 그 믿을 수 없을 만큼 맹렬한 기세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눈치를 살피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우리 뒤편을 가리켰다.
“저 창고에도 버리라고 했어요. 저기 사는 쥐들은 사과주스를 좋아한대요.”
나와 해솔이 경계 어린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약사전 건물이 언제나와 같은 웅장함을 뽐내며 서 있었다. 아이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전각 외벽에 그려진 부처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흰자위를 드러낸 채 위를 바라보고 있는 기이한 부처가,
꼭 우리를 위해 마련된 나락이 있노라고 조롱이라도 하듯이.
목덜미에 소름이 훅 끼쳤다.
아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까 오빠들이 있어서 못 들어갔어요. 저기 쥐들한테도 밥 줘야 하는데. 저기 창고에 사는 쥐들까지 밥 다 주면, 그때부터는 스님들이 알아서 한다고 했어요.”
스님들이 알아서 한다.
그 말에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함이 머릿속에 벼락처럼 내리쳤다. 나와 해솔은 동시에 발걸음을 틀어, 약사전을 향해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있는 힘껏 몸을 날렸다.
위를 쳐다보고 있는 부처가 그려진 벽, 아니 문은,
미세한 틈을 두고 열려 있었다.
-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결국 바른 대로 돌아가고,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뜻이랍니다.
-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걸 보여드리지요. 그럼 어리석은 두 분 중생도 믿으시겠지요? 이 화재는 하늘의 뜻이라는 걸. 석가모니가 이 땅에 오지 못하고 인왕산 남쪽 중턱에 고꾸라지는 것이 천명이라는 걸.
괘씸하고 깜찍하게도 감히 불가에 투신한 승려 흉내를 내었던 그 남자의 말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은근한 속삭임처럼 끝없이 메아리치며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와 동시에,
펑-.
이미 수도 없이 들어 보았던 종류의 거센 파열음이 약사전 안쪽에서부터 우레처럼 터져 나왔다.
나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알았다. 그러나 아는 것과 피할 수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알고 있다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형-!”
뒤편에서부터 익숙한 해솔의 목소리가 날아들었고,
콰릉-.
또 한 번의 우렁찬 굉음이 울리며 약사전의 청아한 처마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온몸의 살갗에 열기가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스치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독한 공기가 전신을 향해 밀려왔다. 들숨을 따라 들어오는 매캐함이 호흡기를 틀어막았다.
눈앞이 암전되었다. 타들어가는 냄새와 달리 어울리지도 않는 라벤더 향이 코끝에 풍겼다. 물론 아주 찰나의 일이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초파일 전날 밤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
기억을 되짚는 것을 멈추고 현재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왼쪽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상태였다.
저만치에서부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나 싶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탕-. 하는 거센 소리와 함께 방 안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 뭐야?”
내 문자를 받고 급히 달려와 문을 열어젖힌 다현과, 바닥에 주저앉아 의자에 반쯤 쓰러지듯 몸을 기댄 내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다현이 말을 잃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맹세코 내가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너…….”
겨우 목소리를 내었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다현을 향해, 내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작전 끝나니까 이렇게 됐어. 불길 속에서 정신을 잃은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어쩌다 다쳤는지는 기억이 안 나.”
다현은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듯했다. 다만 보폭 큰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몸을 숙이며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어쩐지 핏기가 가신 것만 같은 얼굴을 한 채, 다현이 말없이 내 손을 그대로 움켜쥐었다. 평소와 비교도 되지 않게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붙잡힌 손이 저릿했다.
내가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자, 눈앞의 다현은 사라져 있었다.
손끝에 흐릿하게 남은 감각을 되새기며 나는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한 창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소식을 들은 모두는 내가 있는 곳으로 급히 모여들었다. 나를 구하기 위해 과거로 간 다현을 제외하고, 해솔과 연수 형 그리고 효신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둘러싼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분명 내가 제대로 데리고 나왔는데……. 나올 때까지는 멀쩡했는데.”
방 안을 불안하게 서성이던 해솔이 거듭 내뱉었다. 언뜻 듯기에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동요의 흔적이 선연히 묻어나고 있음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내가 제대로 못 봤나? 이미 다친 상태였는데 그때는 심하지 않아서 몰랐나?”
자세히 보면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게 아랫입술을 짓씹던 해솔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뭔가 부상을 입었고 후유증이 뒤늦게 나타난 건가? 아니, 말이 안 되는데…….”
해솔이 중얼거리자 연수 형이 부드럽게 말을 막았다.
“........ 우선 기다려 보자. 다현이가 갔으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알아 오겠지.”
당사자임에도 아무런 기억이 없는 나는 그저 잠자코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화마에 의한 상처인지 아니면 무너진 구조물에 깔린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내 왼쪽 다리에는 아주 조금의 힘도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는 생경한 무력감이 온몸에 들어찼다.
연수 형이 해솔을 보며 침착하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아직 연합 차원 공식 기록은 못 받았어. 데이비드 씨 말로는 범인이 하나가 아니었다던데.”
“....... 백업 영상 못 봤나 봐요?”
“데이비드 씨가 자기 하나로 충분하다고, 굳이 따라 들어올 필요 없다고 했어. 옆에 사람 많으면 오히려 방해만 된다고.”
해솔은 숨을 길게 푹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스님으로 위장한 ‘만물의 눈’ 사람이 총 두 명이었어요. ‘패명’이라는 가짜 법명을 쓰는 사람 하나, 다른 조력자 하나. ……. 그리고 이걸 범인으로 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범행에 이용된 사람이 하나 더 있기는 한데.”
“그게 누군데?”
연수 형의 물음에 잠시 허공을 무표정하니 응시하던 해솔이 답했다.
“어린애였어요. 어린 여자애. 일곱 살이랬던가 그랬나.”
“어린애?”
연수 형의 얼굴이 조금 더 놀란 듯한 표정을 띠었다.
“어린애가 어떻게? 불을 직접 지르라고 시킨 거야?”
“아뇨. 불을 지른 건 아닌데, 불이 손쓸 틈도 없이 빠르게 번지도록 만들긴 했죠. 그 애가 사과 음료 병 같은 걸 들고 있었거든요.
근데 그게 사과주스가 아니었어요. 병 안에 기름이 잔뜩 담겨 있었어요……. XX, 어쩐지 묘하게 이상하다 했어.”
해솔이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자 잠자코 듣고 있던 효신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어린애가 자꾸 끼어드는 게.”
그 말에 우리 모두는 효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야?”
“‘만물의 눈’ 관련한 사건 현장에 자꾸만 어린애들이 끼어 있잖아요.”
효신의 말을 듣고 연수 형이 조용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뱉었다.
“....... 그렇긴 하네. 이번 영은사도 그렇고, 청파대교 스타리아도 그렇고.”
효신이 지적했다.
“예성1동 성당 때도 그랬어요. 사실 그게 제일 미심쩍어요, 다른 때에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고 당연히 어린애들이 끼어 있을 수도 있다 쳐도. 그때 그 미친 여자 기억나죠? 유아실 문을 강제로 따려고 했잖아요.”
“그랬지. 본당 안에 유독가스가 가득 퍼져 있는데.”
“그럼 그때 그 여자가 유아실로 달려들면서 뭐라고 말했는지도 기억해요?”
잘 기억나지 않는 듯 답이 없는 연수 형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효신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민 오빠, 기억나? 그때 그 여자가 말했잖아. ‘유아실 안에 있는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나는 기억을 찬찬히 되짚었다. 그래, 그때 분명 그 여자는,
- 방해하지 마라. 이 땅을 영광되게 하려면 저분의 희생이 필요하단 말이다.
다현에게 칼날을 들이대며 그렇게 말했었다.
효신이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짚었다.
“사건 종결 보고서에도 써 있겠지만, 그때 유아실 안에 있던 건 어린애 하나뿐이었어. 그럼 결국 그 어린애의 희생이 필요했다는 뜻이잖아.”
연수 형의 낯빛이 가라앉았다.
“........ 확실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조금 수상한 감이 있네. ‘만물의 눈’ 교리에 어린이들의 희생을 종용하는 부분이 있다거나 할 수도 있고.”
신중하게 내뱉던 연수 형이 우리를 둘러보았다.
“그건 내가 한번 알아볼게. 일단 우리는 거실이든 어디든 자리를 옮기자. 여기 밤새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 말에 나는 습관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도로 주저앉았다.
“아.”
멋쩍은 얼굴로 나는 모두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굳은 얼굴의 해솔이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잡아.”
제 팔을 내어주며 해솔이 무감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는 말없이 해솔을 올려다보았다.
기분 탓일까. 목소리는 늘 그랬듯이 쌀쌀맞았지만 나를 보던 해솔의 얼굴에서는 어쩐지 평소와 조금 다른 감정이 묻어나는 것도 같았다.
이를테면 죄책감 같은 것들이.
웃기는 일이었다. 나는 얼른 속으로 무심코 떠올렸던 감상을 흩어 버렸다. 내 앞에만 서면 세상에서 가장 서슬 퍼런 모습으로 돌변하는 애한테 죄책감이라니.
나는 해솔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 손은 제 주인의 성격만큼이나 차가웠다.
내가 해솔의 팔에 의지해 일어나려는 그 순간이었다.
쾅-.
어울리지 않는 소음과 함께 방문이 튕겨져 나갈 것처럼 홱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을 향했다.
열린 문 너머로, 녹초가 된 다현이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다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어?”
조금 놀란 듯한 효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나는, 이번에는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혼자 힘으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다리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
잠시 말을 잃은 나는 다현을 돌아보았다. 아마도 내 다리가 원래대로 되돌아오게끔 만든 당사자일 다현은, 불규칙적인 숨을 고른 뒤 우리를 향해 천천히 내뱉었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