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국제시간여행자연합 ITA
“어찌 후회할 짓을 하십니까.
제게 이러시면 뒷감당을 어찌하시려고요?”
스님이 해솔을, 그 다음엔 나를 번갈아 빤히 보며 웃었다.
그 시선이 닿는 순간 어쩐지 이곳의 온도가 삽시간에 훅 낮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스님은 생수 병에 든 물을 금방이라도 쏟아 버릴 것처럼, 손을 천천히 움직여 보란 듯이 병을 기울였다. 그 동작은 우리를 놀리는 것도 같았고, 힐난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해솔은 깡을 빼면 시체였다.
“역시 뭔가 알고 계셨네요, 스님.”
주눅들지 않은 것으로도 모자라 언뜻 흥미로워하는 기색까지 비치며 해솔이 눈을 번뜩였다. 스님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선 해솔이 물었다.
“왜 불을 지르려고 하셨죠? 역시 이번에도 당신네들의 바르바토스가 시키던가요?”
스님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염화미소를 닮은 그 표정은 도무지 속내를 읽기 어려웠다.
마치 불경을 읊기라도 하듯 평온한 목소리가 우리를 둘러쌌다. “저를 막아세우면 화재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가요? 저만 없으면 불이 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해솔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제 경어는 집어치우려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불은 네가 지른 게 맞을 텐데.”
우리의 입장에서나 과거형이지,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불은 아직 ‘지른’ 것이 아니라 ‘지를’ 것이었다. 그러나 이 미묘한 차이를 눈치채지 못한 듯 스님은 시제의 모순을 지적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그 부드러운 어조는 꼭 우리를 어르는 것만 같았다. 약사전의 지하에서 본 것이 아니었더라면 한순간 무고한 스님을 의심한 것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고결한 말투였다.
해솔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스님이 나긋나긋한 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결국 바른 대로 돌아가고,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뜻이랍니다.”
스님은 한껏 기울였던 생수 병을 도로 똑바로 세웠다. 천천히 생수 병을 제 입으로 가져가며, 스님이 말했다.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걸 보여드리지요. 그럼 어리석은 두 분 중생도 믿으시겠지요? 이 화재는 하늘의 뜻이라는 걸. 석가모니가 이 땅에 오지 못하고 인왕산 남쪽 중턱에 고꾸라지는 것이 천명이라는 걸.”
말을 마친 스님이 생수 병에 들어 있는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해솔은 얼빠진 눈으로 그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생수 병의 물을 끝까지 비워낸 스님이 병을 바닥에 떨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를 억지로 잠들게 해도 천명은 이루어질 겁니다. 이 구역질나는 절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어리석은 인간들은 타오르는 신성한 불길 덕에 비로소 정화될 테고요.”
그 말을 들은 해솔은 헛웃음을 쳤다. 순식간에 한겨울의 북풍처럼 차가워진 눈빛을 하고서, 해솔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그렇게 되나 보자. 내가 나중에 꼭 너 찾아가서 소감 물어볼 테니까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어.”
스님은 합장을 해 보였다. 그것은 물론 조롱이었다. “내세에서의 삶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기꺼이.”
해솔이 그의 면전에 대고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내세 같은 소리 하네. 나는 면회 말한 건데, X신아. 다음에 볼 때는 쇠창살 사이에 두고 보게 될 테니까 내 얼굴 보고 싶으면 지금 실컷 봐 둬.”
스님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고개가 꾸벅 떨어지는가 싶더니, 몸에 힘이 풀리며 그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절로 감기는 눈을 힘겹게 뜨며 그가 마지막 말을 남겼다.
“사필귀정이요, 인명은 재천이라. 하늘에 승복하시길.”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저 뒤편에서부터 펑 하는 소리가 날아들어 왔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나와 해솔은 동시에 고개를 틀었다.
저 멀리 약사전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기세 좋은 불길이었다.
-
“아, XX. 공범이 있었나? 말하는 꼬라지 보면 저 새끼가 범인이 아닐 수가 없는데. 쟤 말고 또 누가 있었던 거지 대체?”
해솔이 화를 겨우 참는 듯한 얼굴로 머리칼을 휙 쓸어넘겼다.
“이대로면 현재로 귀환도 못 하잖아. 범인을 전부 찾은 게 아니니까.”
해솔의 중얼거림에 내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과거로 돌아가야 하나? 만약 그래야 한다면 나는 어쩌지?
우리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먼저 언덕길을 내달렸다. 해솔이 뜀박질하며 외쳤다.
“119에 예약문자는 걸어 뒀지?”
나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덕길 끝에 다다른 우리는 약사전 쪽으로 발길을 틀었다.
“불이야!”
목청껏 외치자 어둠에 잠겨 있던 창문들 너머로 하나둘 조명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달려가는 우리의 뒤를 쫓아오기라도 하듯, 술렁거리는 소리와 소음이 사찰 안에 서서히 번졌다.
어느덧 약사전이 코앞이었다. 분명 익숙한 전각이었으나 조금 전에 보았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는 약사전을 지근거리에 두고 우리는 급격히 멈추어 섰다.
예상 외의 광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길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사찰의 온 사방을 향해, 맹렬하게.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몸을 돌린 내가 해솔을 향해 물었다.
“안 되겠어. 우리 과거로 돌아가-.”
그와 거의 동시에 해솔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 위로 겹쳤다. “형.”
타닥타닥 튀어오르는 불티를 뒤로 한 채, 해솔이 말했다.
“형은 잠깐 여기 있어. 내가 과거로 다녀올게.”
나는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조금은 얼이 빠진 듯한 말투로 내가 물었다.
“뭐?”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내가 30분 전으로 돌아가서 화재 발생 시간을 좀 미뤄 볼 테니까.”
해솔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차분했고, 태연했다.
내가 급히 되물었다.
“화재 발생 시간을 미룬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야?”
해솔이 타오르는 전각의 처마 위로 시선을 주었다.
“내가 과거로 가서 그놈을 더 일찍 재워 놓은 다음에 약사전 앞을 쭉 지키고 있을게. 보는 눈이 있으니 공범도 대놓고 불을 지르지는 못할 거 아냐. 내가 있는데도 굳이 다가온다면 오히려 더 좋고. 제대로 식별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 해솔을 보았다. “....... 너는,”
우지끈, 하고 나무로 된 대들보가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났다. 쿵 하며 바닥에 내려앉은 나무토막이 사방으로 재와 불티를 날렸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해솔이 내게 말했다. “봤지? 더 지체하긴 힘들어. 우리 범인 찾아야 하잖아.”
미련 없이 돌아서려는 해솔을 나는 말리려 했다. 트리거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고작 한 번의 타임워킹에도 눈에 띄게 힘들어하는 해솔이었다. 그런 애를 홀로 과거에 밀어넣는 것만 같아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걸렸다.
“괜찮겠어?” 많은 의미를 담아, 내가 물었다.
해솔은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힐긋 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무감하게 내뱉었다.
“형보다는 내가 나아. 지금 당장 형을 여기서 몇 km 떨어진 곳으로 보낼 수는 없잖아.”
그 말을 끝으로 해솔은 일렁이는 불빛과 흩날리는 불티 사이를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
리 치앙 씨는 말했다.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오면 두 눈을 질끈 감으라고.
눈을 감고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고 간절히 간절히 바라다 보면,
눈을 뜬 순간 기적처럼 세상이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그 말을 뜬구름 잡는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 치앙 씨의 트리거를 알게 된 이후로는 그 말의 진짜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말은 생각보다도 더 직관적인 말이었다. 리 치앙 씨의 트리거는 ‘눈을 감고 숨을 두 번 들이쉬기’ 였으니까.
눈을 감았다 뜨면 벗어나고픈 순간에서 도망칠 수 있다는 건, 순전히 리 치앙 씨에게 한해서 말 그대로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타임워킹 능력 자체가 기적적인 일이니 어쩌면 ‘기적처럼 세상이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그 기적이 내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기적도 마법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나는 약사전과 마주보고 있는 작은 돌담에 기대어 앉았다.
살벌하게마저 느껴지는 불길이 나무를 먹이 삼아 인근의 목조 건물들을 닥치는 대로 삼키고 있었다. 수많은 전각과 침소의 서까래들, 처마들, 기둥들, 툇마루들.
우지끈, 하는 소리가 다시금 한 차례 들렸다. 나는 짧은 숨을 뱉어낸 뒤 그대로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자 얼굴에 와닿는 열감이 더욱 생생히 느껴졌다.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오면 두 눈을 감아라.
그리고 간절히 생각해라.
도망치고 싶다고. 제발 도망칠 수 있게 해 달라고. 눈을 다시 떴을 때 나를 둘러싼 이 모든 엿 같은 상황이 감쪽같이 변해 있게 해 달라고.
혹시 아나? 그럼 정말로 세상이 바뀌어 있을지도.
눈을 감은 채 나는 리 치앙 아저씨의 말을 되뇌었다.
그 말은 단 한 번 들었음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조릴 수 있었다. 몇 번이고 되뇌일 수 있었다.
이마와 뺨에 와닿는 열기는 여전했다. 무언가 타들어가며 내는 특유의 거센 타닥, 타닥 소리도 여전했다.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섞여 들려왔다.
- 대피하세요, 당장 일어나세요-
- 얼른 바깥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 안 돼, 보살님! 그쪽으로 가면 안 돼요!
- 서둘러요!
나는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도망치고 싶다고. 그것도 정말이지 간절하게.
귓구멍에 들어차는 이 불규칙적인 소음들로부터.
불을 지른 사람이 누구인지 영영 알 수 없는 이 불확실함으로부터.
콧잔등에 와닿는, 급격히 가까워진 것만 같은 이 열기로부터.
나는 감은 눈에 힘을 주어 다시 질끈 눈을 세게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이 느리게 열리던 그 순간,
두 뺨에 매섭게 달라붙던 열기가 물을 뿌린 것처럼 사그라들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자 망막에 상이 또렷이 맺혔다.
약사전 건물이 특유의 고아함과 웅장함을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저녁 노을 아래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불에 그을린 흔적 하나 없이.
내가 눈을 감았다 뜨자 세상은 변해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나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약사전을 향해 내달렸다.
눈이 저절로 사방을 향해 돌아갔다. 정신없이 고개를 돌리며 누군가를 찾아 시선을 옮기던 내 눈앞에 약사전의 문이 서서히 열리는 광경이 보였다.
끼이익. 마찬가지로 그을린 흔적 하나 없이 멀쩡한, 녹색 칠이 되어 있는 나무 문이 점잖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안에서 익숙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칼. 그와 대조되어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마저 느껴지는 얼굴.
해솔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천천히 걸어나왔다.
“해솔아.”
나도 모르게 말이 먼저 흘러나왔고, 생각이 그 뒤를 따랐다.
너 괜찮아?
그렇게 물어보려던 나는 해솔에게 가까이 다가섬과 동시에 입을 도로 다물었다. 그 말이 쓸모없는 질문임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해솔은 괜찮지 않았다. 누가 봐도 괜찮지 않았다.
안색은 한껏 파리해졌고,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게워낼 것처럼 입을 가린 채 숨을 막고 있었다.
“아, XX……. 타임워킹 한 번 더 했다간 진짜 죽겠네.”
나는 얼른 해솔을 부축하려 손을 뻗었으나 해솔은 필요 없다는 듯 내 팔을 밀어냈다.
어지러움을 느끼는 듯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해솔이 여전히 입을 가린 채 말했다.
“....... 뭐 해? 가자.”
앞을 향해 턱짓을 해 보이는 해솔에게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 그 사람은?”
‘그 사람’이란 묻지 않아도 패명 스님, 아니 이제는 가짜 스님임이 밝혀진 ‘만물의 눈’ 소속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해솔이 참았던 숨을 들이쉬고는 말했다.
“침소 밖으로 불러낸 다음 바로 재워 버렸어. 새 울음소리니 뭐니 그딴 언급 없이 순수하게 도와달라고만 했더니 아무 의심 없이 따라오더라.”
“다른 범인은? 수상한 사람 또 없었어?”
해솔이 약사전의 돌계단을 비틀비틀 내려가며 답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형은 뭐 기억나는 거 없어? 내가 과거로 가면서 형의 과거도 바뀌었을 거란 말야. 바뀐 기억 속에서 뭐 떠오르는 거 없어?”
그 말에 나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해솔이 30분 전의 과거로 가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하면서, 자연히 내 기억에도 변화가 생겼다.
내가 실제로 경험한 것과 달라진 부분. 누군가 주입한 것처럼 내 머릿속에 들어찬 새로운 부분…….
경험과 기억 간의 괴리를 머릿속으로 쫓던 나는 이윽고 한 장면에 다다랐다.
실제와 달라진 최초의 장면. 그건 그 경찰의 방에서 나온 직후의 순간부터였다.
방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해솔은 내게 패명 스님을 보고 오겠다고 말했다. 왜 패명 스님의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오는지 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30분 전 과거의 나를 향해, 해솔이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넨다.
‘짚이는 게 있어서 확인 좀 해 보려고. 형은 최대한 있는 대로 근처를 좀 돌아봐. 이따 약사전 앞에서 만나자.’
그 말을 남기고 해솔은 먼저 앞서 가 버린다. 영문 모를 해솔의 행동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이내 해솔의 말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아무튼 해솔은 애가 영 쌀쌀맞고 무섭긴 해도, 이유 없이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우리가 방금 나선 등 뒤의 문에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아주 가느다란 훌쩍임 소리가 들려온다. 아까 그 경찰 남자의 소리다. 우리 숙소 맞은편의 한옥에서는 여전히 아이들 말소리가 흘러나온다. 디딤돌 위에 아이들 신발이 뒹굴고 있다.
나는 숙소와 가까운 순으로 사찰 내부를 돌아보기 시작한다. 공양간, 화엄전, 대웅전, 어린이법당. 슬슬 사찰 전체가 불을 끄고 잠에 들 무렵이라 그런지 바깥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스님들의 침소 문간에 나이 지긋하신 스님 한 분이 서 계신다. 뒷짐을 진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던 스님이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신이 찾는 사람이 내가 아니었는지 이내 몸을 돌려 다시 침소로 들어간다.
패명 스님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해솔이 패명 스님을 어디로 데려갔을지 궁금해하며 걸음을 옮긴다. 약사전을 제외한 곳을 모두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흔적이 보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나는 약사전으로 향한다. 해솔과 다시 마주할 때까지 눈에 띄는 일은…….
아, 그렇지.
달라진 기억을 설명하다 말고 나는 돌연 말을 멈추었다.
이상한 점이 비로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입을 다물어 버린 나를 해솔이 다그쳤다. “뭐야, 왜?”
나는 해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애들.”
“애들이 왜-.”
내가 해솔의 말을 잘라먹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애들 신발. 우리 숙소 건너편 방 앞에, 신발이 어린이용 두 켤레뿐이었어.”
해솔이 미간을 찡그린 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신발은 네 켤레여야 한다고. 어린이용 신발 세 켤레, 여성용 운동화 한 켤레.”
그래, 신발은 네 켤레여야 했다.
어린이용 신발 하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리고, 어린이들을 통솔하는 교사의 신발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같은 결론에 이른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런 뒤 같은 방향을 향해 튕겨나듯 달려나갔다.
-
“....... 없어, 어른 신발이.”
숨을 몰아쉬며 해솔이 말했다. 뒤이어 맞은편 숙소 앞에 멈춰선 내가 숨을 고르며 디딤돌 위를 살폈다.
과연 우리가 찾는 신발은 없었다.
신발은 두 켤레뿐이었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해솔이 방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러고는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이불 위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아이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보았다.
문을 가로막고 선 해솔이 아이들을 향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 얘들아, 너희 선생님 어디 가셨어?”
아이들은 말없이 크게 뜬 눈을 깜빡였다.
남자아이가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당기며 해솔을 올려다보았다. 낯선 사람의 난입 탓에 주눅이 든 것처럼 보였다.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남자아이 대신, 그 옆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혜윤이가 없어져서 찾으러 갔어요.”
해솔이 되물었다. “혜윤이가 없어졌다고?”
여자아이가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랑 저랑 같이 화장실 갔다 왔는데, 혜윤이가 밖으로 나갔어요.”
이불 속에 숨어 눈만 빼끔 내밀고 있던 남자아이가 말을 보탰다. “........ 오리 밥 주러 간다고 했어요.”
해솔은 조용해지다 못해 숫제 싸늘해져 있었다. 그런 해솔을 대신해 내가 물었다. “오리가 어디 있는데?”
남자아이가 문 너머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다. “연못이요. 스님들이 연못에 오리 산다고 그랬어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해솔이 홱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나는 아이들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해 보이고는 얼른 해솔을 뒤쫓아갔다.
“형이 기억하기로 우리가 그 경찰 아저씨 방에서 나왔을 때부터 신발이 두 켤레였다고 했지.”
빠른 걸음으로 예의 그 연못가를 향해 가며 해솔이 말했다. “그럼 적어도 30분은 지났단 소리인데. 30분 동안 사찰 안을 다 뒤졌는데 어린애 하나를 못 찾을 이유가 어디 있어? 막말로 애가 어디 납치라도 당했거나, 아니면……”
수풀 더미를 헤치고 연못가 가까이 나아간 해솔이 우뚝 멈추어섰다.
“애초에 애를 찾는다는 건 핑계일 뿐이었거나.”
나는 잰걸음으로 뒤따라 연못가 앞에 섰다. 어둠이 내린 작은 연못가에는 오리는커녕 물고기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 교사라는 사람을 찾아보자.”
서둘러야 했다. 패명 스님을 붙들어 두었다고는 하지만, 그 사람이 없이도 이곳 영은사는 언제든 화염에 휩싸일 수 있었다.
-
“조용히 움직여야 해. 우리 인기척을 듣고 숨어 버릴지도 몰라.”
해솔이 낮게 읊조렸다. 그 말에는 나도 동의했다. 그녀가 작정하고 숨어 버리면 우리 둘로서는 찾는 일이 요원해질지 몰랐다.
우리는 어린이법당 옆의 사무실을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어린 여자아이 또는 그 여자아이를 함께 인솔해 온 젊은 여성 교사가 이곳에 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사무 보조 직원은 ‘본 적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아이가 그리 멀리 가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아이를 찾는 데 정신이 팔려 사무실에 도움을 청할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는 둘 다 아니었을 수도 있었고. 어느 쪽일지는 말 그대로 모르는 일이었다.
해솔의 강경한 주장으로 우리는 다시 약사전 앞에 진을 치고 기다리려는 참이었다. 약사전 인근의 자그마한 창고 뒤편에 숨어 바깥을 살피던 해솔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조건 여기로 다시 올 것 같아.”
“왜?”
내가 묻자 해솔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작정하고 불을 지르려면 여기만큼 좋은 장소가 없어. 이미 지하에 준비를 다 해 뒀잖아. 여기 숨어서 계속 지켜보자.”
적막이 내려앉았다. 흐릿한 달빛이 우리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사찰 뒤편의 산에서부터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 문득 잊고 있던 한 남자가 떠올랐다.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패명 스님 말이야. 어디다가 뒀어?”
언뜻 들으면 물건을 칭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해솔은 그런 것 따위 지적하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방 안에. 이불 덮고 곤히 주무시고 계실걸.”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 말이었다. 다른 스님들이 패명 스님의 늦은 복귀를 의아하게 여겨 찾아나선다 해도 사찰에 머무는 손님인 우리의 방을 뒤져 보지는 않을 것이었다.
걱정이 묻어나는 투로 내가 물었다. “혹시 벌써 깨어나지는 않았겠지?”
해솔은 비소를 지으며 단언했다. “그럴 리가. 못해도 새벽까지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걸.”
“확실해?”
내가 거듭 묻자 해솔이 내뱉었다. “확실해. 한 알만 먹어도 약효가 6-7시간은……”
바스락.
작지만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소리에 해솔이 말을 멈추었다.
우리는 동시에 숨을 죽이고 고개만 내밀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다보았다. 약사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반대편에서부터 발자국 비스무리한 소리가 들려왔다.
촤악.
그 뒤를 이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를 쏟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물 소리 같기도 한 그것은 너무 찰나였기에 자세히 들어 볼 수가 없었다.
먼 발치를 응시하던 해솔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발자국 소리임이 점차 명백해졌다. 가벼운 그 발걸음은 약사전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형.”
발소리가 나는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해솔이 낮게 속삭였다.
“셋 세면 달려가서 붙잡자. 내가 왼쪽으로 돌 테니까 형이 반대편을 막아. 혹시 도망 못 가게.”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공기 중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자박, 자박. 자갈을 밟으며 이곳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커졌다.
“하나.”
해솔이 서늘한 눈매로 그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둘.”
발걸음의 주인이 전각을 돌아,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기 일보직전이었다.
“.......셋-.”
해솔이 입을 떼기가 무섭게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났고,
우리가 있는 힘껏 앞을 향해 달려나갔고,
동시에 발걸음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그를 제압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우리는 급격히 몸을 멈추었다.
“선생님?”
이제 겨우 초등학생쯤이나 간신히 될까 싶은 여자애가 우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해솔의 얼굴에 당혹의 기색이 번졌다. 그건 말을 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 네가 혜윤이니?”
적잖이 당황한 건 아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손에는 작은 플라스틱 병에 담긴 사과주스를 쥐고, 샛노란 색의 슬리퍼를 끌며 걸어온 그 아이가 우리를 올려다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 내 이름 어떻게 알아요?”
일단 아이의 신상이 무사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냅다 아이에게 달려들려다 어색하게 굳어 버린 우리는 꼭 유괴범 또는 그 비스무리한 것으로 의심받지 않으면 다행일 수준이었다.
해솔이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 선생님이 알려 주셨어. 혹시 선생님 못 봤어?”
떠보는 듯한 질문에도 아이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저었다. “못 봤어요. 우리 선생님 알아요?”
“알아.” 해솔이 짧게 답했다.
그 무감한 대답에 결국 내가 나서서 덧붙였다. “선생님이 너 계속 찾고 있던데. 어디 있었어?”
“오리 밥 주러 나왔어요. 내가 밥 안 주면 오리 죽을지도 모른다고 해서요.”
그 말 속에서 생략된 미묘한 지점을 잡아낸 해솔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누가 그랬는데? 네가 밥 안 주면 오리 죽는다고.”
“여기 스님들이요.”
잠시 말이 없던 해솔은 몸을 숙여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그렇지 않은 살벌한 얼굴로, 해솔이 다정히 물었다.
“어떤 스님이었는지 기억나? 어떻게 생겼는지, 목소리는 어땠는지.”
아이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굴렸다. 손을 꼼지락거리던 아이는 이내 해솔을 흘끔 올려다보며 내뱉었다.
“몰라요. 그냥 스님들이었는데.”
아이를 말없이 응시하던 해솔이 이번에는 다른 질문을 꺼냈다. 여전히 다정한 말투로, 그리고 그와 상반되는 살벌한 표정으로.
“오리한테 무슨 밥 줬어? 네 손에는 지금 오리 밥이 없는데.”
그러자 아이가 입을 다물었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채, 해솔이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해솔의 시선이 아이의 얼굴, 톡톡 바닥을 차는 발끝을 순서대로 지나, 자꾸만 꼼지락거리는 아이의 손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 차갑고도 명료한 시선은 아이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병에 꽂혔다.
해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너. 손에 든 그거 잠깐만 줘 봐.”
아이의 눈이 티나지 않게 살짝 커졌다. 해솔의 심상치 않은 말투에 겁을 먹었는지, 사과주스 병을 만지작대던 아이가 고개를 떨구었다.
해솔은, 물론 어른이라고 해서 딱히 살갑게 대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를 살갑게 대하는 데에는 특히나 더더욱 명백히 재능이 없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해솔을 한 걸음 지나쳐 아이에게 다가섰다.
해솔이 했던 그대로 몸을 숙여 아이와 눈높이를 낮춘 뒤, 내가 조근조근 말했다.
“우리가 방금 너무 뛰어서 목이 말라서 그래. 아까 봤지? 우리 뛰어오는 거.”
아이가 눈을 들어 우리를 차례로 보았다.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치의 다정을 끌어모아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한 입만 마셔도 될까? 그거.”
투명한 병 안에 담긴 사과주스가 불안하게 출렁였다. 잠시간 적막이 우리를 감쌌다.
몇 초 후,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을 뻗어 아이가 내민 사과주스 병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그 주스는 단 한 방울도 내 입술에 닿지 못했다.
작은 병의 뚜껑을 여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온몸을 휘감았던 탓이다.
“....... 해솔아.”
여전히 서늘한 기색을 풍기며 내 손에 들린 병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해솔을 향해,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기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