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출신 가족의 15년간 생존기
"우리 실리콘밸리에서 1년간 살아보면 어떨까?"
결혼 10년 차 부부가 어느 날 우연히 던진 질문에서부터 이번 긴 여행은 시작됩니다.
2007년, 부부는 외동딸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그리고 15년 후인 2023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IT 기자와 마케터로 한국의 IMF를, 실리콘밸리 키즈의 부모로 미국의 리먼브라더스 사태를, 미국 반도체 회사의 세일즈우먼으로 코로나를 겪었습니다.
실리콘밸리가 회색 빛의 무미건조한 테크 빌딩만 줄지어 있는 곳이 아니라, 형형색색의 광활한 대자연과 어우러져 생활할 수 있는 천혜의 지역이라는 것을 체험하고 왔습니다.
비엔지니어, 문과 출신 가족이 ‘하이테크의 메카’인 실리콘밸리에서 생활하면서 기록한 15년간의 일기장을 조금씩 세상에 공개해보려 합니다.
오늘 아끼던 차를 중고상에 넘겼다.
2001년 말에 구입해 만 6년간 우리 가족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 녀석이다. 처음에 구입할 때만 해도 최첨단 내비게이션의 신기함, 앞뒤좌석 열선 흐름에 대한 탄성, 비가 와도 걱정 없는 백미러의 자동성에 제어장치 등등... 기존 차에 비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최첨단 성능에 환호했던 똘똘이였다.
뿐만 아니라 딸아이 네 살 때부터 지금까지 놀이방 역할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 안 다닌 곳 없이 헤집고 다닌 우리 가족의 보디가드 역할 또한 톡톡히 해 주었다.
참 이상하게도 집과 차는 마치 가족의 한 부분처럼 정이 듬뿍 간다. 자동차 내부의 소지품을 하나씩 정리하다 보니 지난 몇 년간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소중히 떠오른다.
뒷좌석에는 딸아이가 어릴 적부터 그려온 작은 공책과 종이접기, 고사리 손으로 써둔 편지, 먹다 남은 새콤달콤 껍질 등 만물상이 따로 없다.
앞 좌석 내비게이션 기록에는 그동안 우리 가족이 여행한 곳, 좋아하던 음식점, 즐겨 찾던 공원들, 매일 출퇴근하던 우리 집과 회사 주소 등 우리 역사가 빼곡히 흔적으로 남아있다.
흠... 아쉽지만 모두 리셋! 내부 정리가 끝난 후 주유소로 가 기름도 채우고 깨끗이 목욕을 시켰다.
딸 시집보내는 어머니 심정이 이럴까?
그리고 마침내 이별을 고했다. 그동안 우리 가족을 잘 지켜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인천공항이 떠들썩하다. 인원동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 가족. 우리 출국을 위해 온 가족이 공항에 배웅 나왔다.
눈물 하면 단연 최고봉이신 우리 엄마, 덕분에 나도 그 유전자를 받아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말았다.
눈물을 참느라 안경이 뿌옇게 된 우리 언니, 무슨 일이 난 양 대성통곡을 해 주변의 이목을 끌었던 4살 이쁜 막내 조카까지... 덩치만 산만하지 마음이 여린 남동생의 눈시울도 벌겋게 달아오른 건 안 비밀.
짐 무게 초과로 가방을 하나 더 사고 환전하러 뛰어다니고 이런저런 일을 혼자 처리하려다 보니 어느새 출국 시간이 다 됐다. 다들 나와준 보람도 없이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인사하고 헤어져 출국심사장으로 들어가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 달 전 남편은 선발대로 산호세에 도착해 있고 나와 딸아이만 가족들의 따뜻한 배웅을 뒤로한 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장장 11시간 10분간의 기나긴 여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