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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성환 Jan 08. 2023

'권한위임을 잘하라'는 지시사항

유난한 도전

몇 년 전, 위에서 지시사항이 내려왔다.


'리더는 팀원들에게 권한위임을 잘할 것' 


당부도 덕담도 모두 '지시사항'으로 관리된다. 그리고 지시사항은 수행할 팀을 정해야 하며, '무엇을 했다'는 결과보고를 해야 했다. 지시사항을 수행할 팀으로 우리 팀이 배정되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막막했다. 권한 위임이라는 좋은 취지는 이해가 갔다. 구성원들을 성장시키고 주도적으로 일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으신 마음은 알지만, '지시사항'으로 내려온 건 다르다. '지시사항'에 '결과보고'를 하기 위해 본질을 외면한 형식적인 제도가 추가되곤 했다. 


우선 본부 내 팀장들의 의견을 구했다. 짜증 섞인 반응만 돌아왔다. 


'방팀장, 알았어, 팀원들한테 의사결정하고 책임도 지라고 할 테니까 문제 돼도 팀장 찾지 마. 그리고 본부장님도 팀장 찾지 말고 팀원 찾으라고 하고.'


납기는 지켜야 하기에 한두 번 보고서가 왔다 갔다 했다. 보고를 받는 실장님과 본부장님도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본질은 건드리지 못하고 '결재라인 간소화' '보고서 실명제' 등으로 변죽만 올리며 겨우 '완료 처리'했다. 


지시하신 분도 '이게 권한위임을 잘하는 방법이 맞냐'라고 되묻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토스의 여정을 유난스럽게 담아낸 책, '유난한 도전'을 읽다가 몇 년 전의 웃픈 권한위임과 관련된 일화가 떠올랐다. 


'유난한 도전'에는 그들이 얼마나 실무자의 자율성을 중요하는지, 어떤 식으로 DRI(Directly Responsible Indivisual)라고 불리는 실무 최종의사결정권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지 많은 예시와 사례가 나온다. 


특히 마음을 울렸던 문장은 

'(실무 의사결정권자의) 결정이 실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지만 그 피해는 회사가 온전히 감수했다'였다.


내심 토스를 '한국에 맞지 않는 실리콘밸리식 경영을 따라 하는 곳'이라고 치부해 왔는데, 사실은 질투였고 시기였다. 실리콘밸리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일하는 방식을 이루어냈다. 배울게 많은 회사구나 싶었다.


자세한 설명보다는 권한과 책임에 대한 본문 글 두 단락을 소개한다. 




이승건은 책상 위에 새로운 글귀를 하나 써붙였다.

제갈량의 실수를 범하지 말자.


<삼국지>에서 촉나라 제갈량은 타고난 지략가이자 정의롭고 충성스러운 인재였으나, 결국 승리를 거머쥐지 못했다. 그는 위나라를 쓰러뜨리기 위해 수차례 북벌에 나서면서 내치까지 도맡았다.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며 곤장 20대가 넘는 형벌에 관한 사안은 직접 처리했다. 덕분에 촉의 백성들은 편안했지만, 문제는 제갈량이 자신의 업무량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조조의 책사 사마의는 사자(使者)로부터 상황을 전해 듣고 내심 안도했다. 남을 믿고 맡기지 못해 사소한 일도 직접 관장하며 전쟁까지 진두지휘하기를 몇 년이나 계속할 수 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갈량은 병으로 죽었고, 촉나라는 멸망했다. 


제갈량은 천재였지만 위임을 못했기 때문에, 전투에서 이겼을지언정 전쟁에서는 졌다. 반대로 조조는 사마의 같은 천하의 좋은 인재를 찾아다녔고 충분히 위임했다. 사마의는 힘과 역량을 갈고닦아 결국 천하를 통일했다. 


비바리퍼블리카가 오래도록 지속가능한 팀으로 성장하고 번영하려면, 동료를 더 믿고 더 많은 권한과 책임을 분산해야 한다고 이승건은 스스로를 재촉했다.

[유난한 도전, 326p]




세세한 업무지침이나 관리가 필요 없는 탁월한 인재를 채용하며, 그렇게 합류한 팀원에게는 팀원에게는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하고 자율성을 부여했다. ‘신뢰할 수 없음’이 전제되는 보고와 결재 등의 프로세스는 하나씩 없앴다. 개별 팀원이라도 맡은 일에 관한 한 토스팀을 대표하는 최종의사결정권을 가졌다. 누구든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결정권자(Directly Responsible Individual)는 경청할 의무가 있지만, 그 누구도 DRI의 결정을 바꾸도록 강요할 수 없다. 결정이 실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지만 그 피해는 회사가 온전히 감수했다. 당장은 회사에 손해가 되더라도 장기적인 성공에 더 유리하다고 믿었다. 

[유난한 도전, 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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