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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덕 Dec 21. 2022

중학생 시절


1969년 3월 2일에 나는 신일중학교에 입학했다. 신설학교여서 그런지 모든 것이 깨끗했다. ‘제2의 경기고등학교’를 지향하는 학교라고 했다. 그래서 일류 대학 출신 선생님들이 많다고 했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는 정규 수업시간에 성경 내용을 가르치고 예배도 드리게 했다. 내가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어머니가 사기를 당했다. 다른 사람에게 저당 잡혀 있던 집을 모르고 산 것이다. 우리 가족은 할 수 없이 정릉에서 응암동으로 이사했다. 응암동에 조그만 식당을 차린 어머니는 종종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렸다. 가끔 어머니는 아끼던 물건을 맡기고 나왔는지 속상해했다.

나와 바로 밑 동생인 둘째는 학교가 미아리와 정릉에 있었기 때문에 새벽 4시경에 일어나야 했다. 우리는 시내버스로 통학을 하였다. 그것도 서울역에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게다가 버스는 오래되어서 그런지 가끔 고장이 났다. 특히 무악재 고개를 넘다가 멈추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면 승객들은 모두 내려서 버스를 밀어야 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다 보니 나는 가끔 지각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지각했다고 야단을 치며 나의 머리를 칠판에 박게 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왔는데도 야단을 맞으니 서럽기도 하고 화도 났다. 그래서 불평을 하면 어머니는 조금만 있으면 이사할 테니 참으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어머니는 나와 둘째를 큰집으로 보냈다. 그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셋째는 어머니가 데리고 있겠다고 했다. 나중에 돈을 벌면 다시 부르겠다고 해서 나와 둘째는 할 수 없이 큰집에 갔다. 저녁 무렵 큰집에 찾아가자 큰집 식구들은 신기한 듯 우리를 보았다. 참으로 부끄러웠다. 

큰아버지는 우리를 동대문에 살고 있던 ‘팔촌 큰아버지’댁에 가 있게 했다. 아버지의 팔촌 형님인데 우리는 그분을 ‘팔촌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팔촌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당시 동대문에서 미군 구호물자를 파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두 분 역시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우리를 그들의 집에서 지내게 해 주었다. 

한 달 정도 지난 후 우리 형제는 다시 큰집으로 갔다. 큰집 식구들은 종로에 있는 주택가에서 식모를 두고 살고 있었다. 딸 넷에 아들 하나를 낳은 큰어머니는 막내아들을 애지중지했다. 막내아들은 큰아버지와 함께 쌀밥을 먹게 하고 우리 형제는 사촌누이들과 함께 보리밥을 먹게 했다. 

큰어머니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읽지 못했다. 그러나 암기력이 뛰어났다. 노트에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적어 놓고 그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순서대로 외울 정도였다. 그런데 큰어머니는 우리 가족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우리 형제에게 종종 화를 내기도 했다. 우리는 큰어머니가 무서웠지만 ‘너희들이 이를 악물고 성공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참아야 했다. 

두어 달 동안인가 큰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정릉 산동네에 셋방을 얻었다면서 우리 형제를 불렀다. 산꼭대기에 있는 단칸방이었지만 가족이 함께 산다는 사실이 좋았다. 물을 길어 와야 하고 연탄도 직접 날라야 해서 힘들었지만 견딜만했다. 다만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동네 아이들과 장기, 바둑, 화투, 축구, 탁구 등을 하면서 놀았다. 어머니는 식당 일 때문에 힘들어서 그랬는지 나의 미래나 공부 문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무런 꿈도 없이 그날그날을 보내던 내가 공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중3이 되어서였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에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나, 대학은 못 가더라도 고등학교는 반드시 가야 한다고 주위 사람들이 이야기해 주었다. 친구들도 대부분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해서 고등학교 입학시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특히 영어 공부가 힘들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배우게 된 영어는 너무 어려웠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중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학년 때 만난 영어 선생님은 교과서를 무조건 외우게 했다. 그 선생님은 수업하기 전에 학생들이 잘 외웠는지 확인하고 못 외운 학생들은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렸다. 맞는 것이 무서워서 외워보려고 했으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조건 외우려고 하니 어려웠다. 차라리 매를 맞는 것이 편하겠다는 반항심마저 생겼다. 이렇게 지내왔더니 영어가 제일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가지고 있던 영어 자습서를 보게 되었다. 그 자습서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감탄을 했다. 이렇게 설명이 잘 되어 있는 책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샀을 텐데 하는 아쉬움마저 느꼈다. 나는 어머니에게 영어 자습서를 한 권 사달라고 했다.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했더니 돈을 주어서 중고 자습서를 샀다. 이 자습서는 나의 영어 공부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들어가 기술을 배워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에서는 상업을 배웠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업고등학교로 가려고 했다. 부기나 주산 등 상업 과목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은 공업고등학교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선생님은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정책을 보고 이러한 조언을 한 것 같았다. 공업에 대해 아는 바 전혀 없었지만 나는 한양공업고등학교에 지원했다. 

입학시험 날, 어머니와 나는 둘 다 연탄가스를 마셔서 아침 늦게 일어났다. 예전에도 나는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있다가 김칫국물을 한 사발 마시고 깨어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살하기 위해 연탄을 방에서 피우고 죽는다고 했다. 그리고 연탄가스에 중독된 시체는 시퍼렇게 된다고 해서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어머니는 늦었다고 아침 식사용으로 달걀 두 알에 참기름과 소금을 뿌려서 주었다. 보통 시험날에는 금기시하는 음식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후루룩 마시고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갔다. 학교 정문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나는 빨리 학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입학시험이 끝난 후 나는 탁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마침 동네 공터에 천막을 쳐서 만든 탁구장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손님이 별로 없어서인지 탁구장 주인은 약간의 돈을 내면 오랜 시간 동안 탁구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게다가 주인은 나에게 무료로 ‘서브’와 ‘드라이브’ 등의 탁구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영화를 공짜로 보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호기심에 아이들과 함께 동네 근처에 있는 극장에 갔다. 극장 옆에는 버스 주차장이 있었다. 버스 주차장과 극장 사이에는 높이가 2미터쯤 되는 담이 있었다. 담만 넘으면 바로 극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경비실이 있었다. 우리는 담 밑에 숨어 있다가 경비원이 다른 곳을 볼 때 담을 넘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담을 넘으려는 순간 경비원이 내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무언가 이상했던지 경비원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경비원은 자신의 하던 일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우리는 담을 넘어 영화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날 공짜로 영화를 보기는 했으나 영화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성공했다는 쾌감에 만족했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한 번 재미를 보자 나는 공장에 다니던 동네 형과 함께 다른 극장으로 갔다. 지난번에 갔던 극장보다도 작은 싸구려 극장이었으나 담이 높아서 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20대 청년이 양철로 만든 가게 덧문을 가져왔다. 그 청년은 덧문에 가로로 박혀 있는 막대를 밟으며 올라가는 요령을 알려주면서 담을 넘었다. 우리도 그가 가르쳐 준 대로 담을 넘었다. 

그런데 담을 넘자마자 극장 직원이 나타났다. 청년은 바로 극장 안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직원은 “이 새끼들 이리 와!” 하면서 우리를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끌고 갔다. 우리는 잘못했다고 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도망쳤던 청년 역시 조금 후에 붙들려 왔다. 극장 직원은 먼저 그 청년에게 한쪽 벽에 두 손을 대고 서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굵직한 몽둥이로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러자 이상한 소리가 났다. 뒷주머니에 거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울을 꺼낸 후 몇 대 더 맞자 그 청년은 주저앉았다. 

다음은 우리 차례였다. 나는 벌벌 떨면서 엉덩이를 맞았다. 너무 아파서 어지러웠다. 그러자 직원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게 한 후 심문하기 시작했다. 직원은 우리가 무엇을 훔치러 온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계속 부인하자 직원은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했다. 청년과 동네 형은 공장에 다닌다고 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번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해서 입학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단지 호기심에서 온 것이지 나쁜 짓 하러 온 것이 아님을 밝히고자 고등학교 시험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그러자 직원이 고등학교 이름을 물었다. 나는 이내 후회했다. 학교 망신을 시킨 것 같았기 때문에 부끄러웠고, 학교에 통보해서 합격을 취소하게 할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직원은 내가 한양공고에 입학하였기 때문에 봐 준다면서 친구를 잘 사귀라고 충고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결심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식당 일을 마치고 밤늦게 들어와서 잠자고 있는 우리 3형제를 깨우면서 화를 냈다.      

“너희는 어떻게 엄마가 오기도 전에 잠을 자냐?”

“......”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울었다. 어머니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34살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혼자서 세 명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사는 것이 고달팠을 것이다. 3형제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잘못했다고 하면서 같이 울었다. 우는 이유는 분명치 않았다. 어쩌면 산다는 것 자체가 슬픔이었는지 모른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불행했던 시기는 이 시기였다. 어둠과 절망의 시기였다. 당시 나는 실업학교에 들어가 기술을 배워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도와드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그것도 고등학교까지는 학비를 대주겠다는 큰아버지 말씀 때문에 가능했다. 

신일중학교 졸업 기념 사진(고모 할머니, 어머니, 나, 큰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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