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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덕 Dec 21. 2022

고등학생 시절

나는 1972년 3월에 한양공고에 다니면서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교과서 이외에는 거의 책을 읽지 않았던 나는 독서와 글쓰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문예반에 가입한 덕분이었다.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쉬는 시간에 문예반 선배들이 우리 반에 들어 왔다. 그들은 문예반을 소개하면서 신입생들에게 가입할 것을 권했다. 나는 손을 들어 가입하겠다고 했다. 특별한 목적이 있지는 않았다. 단지 호기심에서 가입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문예반 생활이 재미있었다.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으면 상장과 상품은 물론, 4년간 대학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백일장 대회에서는 서정주, 박목월, 박두진 등과 같은 우리나라의 유명한 시인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맛있는 빵과 우유 등의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당시 백일장에서는 수필이나 시, 그리고 간혹 시조 부문에서 상을 주고 있었기에 나는 시를 선택했다. 단지 시가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백일장 대회가 가까워지면 거의 매일 시험공부 하듯이 문예반에 앉아서 글쓰기를 하였다. 학교 근처에 있는 분식집 혹은 중국집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글쓰기를 하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은 항상 무겁기만 했다.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시인은 천재여야 하고,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는데,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시를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시 전문지 등을 사서 유명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기도 하고 흉내도 내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문예반에서 저녁 늦게까지 시를 쓴 후 완성한 원고를 서라벌대학교 문예창작과에 다니던 선배에게 보여주면 그 선배는 좋다고 여겨지는 부분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빨간 볼펜으로 죽죽 줄을 그었다. 어떤 경우에는 원고지 세 장 분량의 글에서 단어 몇 개만이 남았다. 그리고는 그 단어들이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모멸감 때문에 분개하기도 하였지만 나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선배는 백일장에서 상을 여러 번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문예반에는 거의 매일 10여 명이 테이블 주위에 앉아 글쓰기를 하였다. 그런데 저녁 9시쯤 되면 누구나 속이 출출함을 느끼게 된다. 이때 한 선배가 동전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눈치를 보며 자신의 주머니에서 얼마씩 내어놓는다. 돈이 모이면 1학년 중 한 명이 그 돈으로 ‘뽀빠이’가 파이프를 물고 있는 그림의 ‘라면땅’을 사 왔다. 라면땅 하나의 양은 많지 않았지만 여러 봉지를 뜯어 한 곳에 풀어놓으면 제법 풍성하게 느껴지고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더욱이 라면땅 특유의 고소한 냄새는 우리의 식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선배들이 먼저 자신의 분량을 가져가면 1학년들은 눈치를 보다가 남아 있는 것을 같이 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나면 누구나 아쉬움을 느꼈지만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 서라벌대학교 문예창작과에 다니던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학교 근처 술집에 가면 문학을 하는 친구들 몇몇이 앉아 있기 마련인데, 술값 때문에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한 사람이 술값 내기 시합을 하자고 제안한다는 것이다. 내기 방법은 다양하지만 가장 빠르게 승부를 내는 방법은 수저로 막걸리를 떠먹는 시합이라고 했다. 막걸리는 들이마셔야 하는데 그것을 수저로 떠먹으면 별로 깨끗해 보이지 않는 쇠붙이 수저의 이물감이 위장을 뒤집어 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위가 약한 사람이 먼저 토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그날 술은 토한 사람이 산다고 했다.  

그 선배는 매년 ‘문학의 밤’ 행사 시기가 되면 찾아와 후배들의 글을 봐 주었다. 시, 수필 등을 낭송하는 문학의 밤 행사는 문예반의 가장 큰 행사였다. 이때가 되면 문예반원들은 발표 준비를 위해 학교 보일러실에 들어가 발성 연습을 하느라 소리를 질러댔다. 배에서 나오는 소리여야 한다고 하여 배에다 두 손을 대고 크게 소리를 냈다. 선배들은 목소리가 쉬는 것은 목으로만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악가들 특히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소위 득음을 위해 이런 연습을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쑥스러웠으나 우리 1학년들은 열심히 연습했다. 나중에는 재미도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나면 속도 시원해졌고, 무언가 소리라는 것에 대해 알 것 같았다. 그 덕분이었는지 작품을 낭송할 때 친구들의 목소리는 그럴듯하게 들렸다.

문학의 밤 행사 때에는 여학생들도 초대했다. 그래서 그런지 발표할 때에는 부끄러웠고 긴장이 되었다. 캄캄한 가운데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나가서 시를 처음 낭송할 때에는 몸이 떨리기도 했다. 어설픈 시였지만 배경 음악과 함께 낭송되는 시는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철부지에 불과했던 우리는 인생의 진지함에 다가서는 듯했다.

행사가 끝나면 우리는 졸업한 선배들과 함께 중국집으로 갔다. 탕수육과 ‘빼갈(고량주)’은 잘 어울렸다. 술을 처음 마신 나는 숨이 막히는 듯한 강렬함을 느꼈다. 그때 나는 모든 술이 고량주와 같이 독한 줄 알았다. 게다가 선배들이 권해서 담배도 피웠다. 몽롱한 정신과 들뜬 분위기는 무언가 모르게 흡족한 느낌을 주었다.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1학년은 모두 8명이었는데, 여름방학 때 여행을 가자고 해서 함께 했다. 회비 3,000원과 열흘간 먹을 식량을 각자 준비하여 원산도로 갔다. 서해 안면도 앞에 있는 섬인데,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우리는 해변에다 2인용 군용 텐트를 치고 밤이 되면 그곳에서 잠을 잤다. 8명이 자기에는 텐트가 작아서 몸의 반은 바깥으로 내놓고 잠을 잤다. 불편했지만 재미있기도 했다. 먹는 것도 시원치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고추장과 김치에 밥을 비벼 먹거나, 라면 등을 끓여 먹었다. 그리고 가끔 소주도 마시고, 필터 없는 담배를 피우며 해방감을 맛보기도 했다.

당시에는 해변 근처에 군부대가 있었다.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던 군인들에게 우리가 라면을 끓여주자 그들은 우리에게 건빵을 주었다. 그리고 썰물 때에는 큰 게와 소라를 많이 잡을 수 있으니 밤에 잡으러 가자고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신이 나서 군인들을 따라갔다. 대검으로 큰 게의 등을 찍어 달빛에 비춰보는 군인의 모습은 잔인해 보였으나 인상적이었다. 달 밝은 밤에 대검에 찍혀 부르르 떨면서 물방울을 떨어트리는 게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군인은 대검을 나에게 주면서 게를 잡아보라고 했지만 나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군인들은 또 우리를 데리고 바위가 있는 곳에 갔다. 바위에는 주먹만큼 큰 소라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어떤 것은 너무나 단단히 붙어 있어 두 손으로 잡아당겨야 겨우 떨어졌다. 우리는 양동이에 가득 담긴 소라와 게를 부대 취사장에서 삶아 먹었다. 이것은 우리의 허한 속을 든든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고교 문예반 생활은 어린아이와 같던 나를 좀 더 성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독서와 음악감상이라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기도 했다. 소설을 특히 재미있게 읽었고, 음악은 클래식, 팝송, 대중가요 등 가리지 않고 모두 즐겨 들었다. 김세원의 ‘밤의 플랫폼’을 들으면서 이성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2학년이 된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기술을 배워 돈을 벌겠다고 공고에 들어왔으나 실습을 나갔다가 돌아온 3학년 선배의 말을 듣고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 선배는 근무 환경이 너무 열악하고 월급도 너무 적어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등학교만 졸업해서는 사람대접을 못 받으니 대학을 가야 한다고 했다.

선배의 말을 듣고 나는 아주 실망했다. 앞길이 막막하게 여겨졌다. 대학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가정형편을 생각하면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3형제를 위해 어머니 혼자 돈을 버느라 고생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한 친구는 술만 마시면 울면서 신세타령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과장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이 선생님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오신 분이었는데, 몇몇 학생들은 이 선생님을 싫어했다. 취직시켜 줄 수 없으니까 학생들에게 대학 진학을 권하고 있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실제로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사관학교 이야기를 많이 했다. 친척 중 한 사람이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조종사가 되었는데 지금은 민간항공기 조종사로서 돈을 많이 벌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일반 대학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사관학교에 가라고 했다.

어느 날 학과장 선생님은 나를 불러 사관학교에 지원할 생각이 없냐고 했다. 학교 성적을 보니 열심히 공부하면 가능할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실습과목에 신경 쓰지 말고 일반 과목에 집중해서 공부하라고 했다. 당시 나의 일반 학과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실습과목 성적은 좋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후 선생님은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나는 감사한 마음을 제대로 표하지 못했다. 나중에 공군사관생도가 되어 선생님의 뜻대로 모교를 방문하여 공군사관학교를 홍보하면서 후배들을 격려한 적이 있을 뿐이다. 종종 찾아뵙지 못해 지금은 어디에 사시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죄송한 마음뿐이다.

학업에 관심을 두게 되자 문예반과의 관계는 자연히 소원해졌다. 백일장 대회에 가끔 나가기는 했으나 문예반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문예반원들에게 미안해서 문예반을 탈퇴할 생각도 했으나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당시 문예반 친구들은 창작에 몰두하였는지 모두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어떤 친구는 예비고사만 합격하면 대학에서 4년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장원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1학년 후배들도 상을 받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무언가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문예반을 탈퇴하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열심히 글을 써서 상을 받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상을 하나라도 받은 후 공부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후배들 보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1973년도에 마지막 남은 <학원문학상>에 도전하기로 했다. 이제까지 썼던 작품들을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원고 마감일까지 다듬었다. 글씨도 중요하다고 하여 글씨 잘 쓰는 후배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원고 마감일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문예반원들과 함께 원고를 들고 <학원사>로 갔다. 그런데 마침 <학원사> 앞에서 원고를 받고 돌아가는 심사위원들을 만났다. 우리가 늦게 오게 된 사정을 이야기하자 심사위원들은 우리의 원고를 받아주었다.

1974년 1월 4일이었다. 눈이 올 것 같았다. 나는 당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는 학원에서 수학 강의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관심은 오직 <학원문학상> 심사 결과 발표에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나는 곧장 근처에 있는 서점으로 달려갔다.      

“<학원> 나왔어요?”     

서점 주인은 책이 나왔다고 했다. 책을 건네받은 나는 <학원문학상> 수상자 명단이 있는 페이지를 먼저 들춰보았다. 거기에 내 이름이 있었다. 입선이었지만 너무 기뻐서 주인에게 보여주며 내 시가 뽑혔다고 했다. 주인도 신기한 듯이 들여다보며 축하해 주었다. 순간 나는 후회했다. 수중에 돈이 없어 그 책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점 주인에게 다음에 와서 이 책을 꼭 사겠다고 하고서 밖으로 나왔다. 마침 눈이 조금씩 내리더니 함박눈이 되었다. 마치 하늘이 나의 입선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았다.              

<학원문학상> 입선으로 간신히 체면을 차린 나는 공부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런데 공부가 잘되지 않았다. 공부해야 할 내용은 많고 시간은 부족했다. 나는 우선 공군사관학교 본고사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로 했다. 당시 공군사관학교에서는 국어, 영어, 수학, 국사 등 네 과목만 시험을 보았다. 그래서 예비고사는 공사 시험이 끝난 후 준비하기로 하고 네 과목만 열심히 공부했다.

1974년 당시에는 대학에 들어가려면 예비고사를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예비고사 과목 중에는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과목이 세 개나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당연히 붙으리라 생각했다. 당시 학생들은 자격시험에 지나지 않는 예비고사를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인문고에서는 학생들이 대부분 시험에 합격한다고도 했다.

내가 공군사관학교 본고사 시험에 합격하자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놀라면서 축하해 주었다. 어머니와 친척들도 축하해 주었다. 나는 나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예비고사 시험을 보고 나서도 나는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당시 예비고사 합격 성적은 지역별로 편차가 컸다. 서울, 경기 지역이 가장 높았고, 제주, 충청, 강원 지역이 가장 낮았다. 가고 싶은 대학이 위치한 두 개의 지역을 선택해야 했으나 사관학교의 경우에는 아무 지역이나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성적이 가장 높은 서울 지역과 가장 낮은 제주 지역을 선택할까 하다가 자존심 때문에 서울, 경기 두 지역을 선택했다.

예비고사 합격자 발표 날, 나와 친구들 모두 놀랐다. 우리 과에서는 한 명만이 제주 지역에 합격했기 때문이었다. 나와 1, 2 등을 다투던 친구도 떨어졌다. 문예반 친구들도 모두 떨어졌다. 예비고사만 붙으면 4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친구도 떨어졌다. 참담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비웃을 것 같았다. 당연히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줄 알고 계실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이 났다.

내가 시험에 떨어졌다고 하자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위로 후에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이력서를 쓰고 소개해 준 사람을 찾아갔다. 그러나 취직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취직을 시켜주기로 한 사람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는 잘 됐다 싶었다. 공군사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종로학원 서울대반에 응시했다. 그리고 합격증을 큰아버지에게 보여드리면서 1년만 학원비를 대 달라고 부탁했다. 큰아버지는 난감해했다. 큰어머니는 물론 반대했다.     

“이제까지 학비를 대주었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안 돼, 도와줄 마음 없다.”

“그러면, 사업 자금 좀 빌려주세요.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나는 취직이 안 되니 사업을 하게 이백만 원만 빌려 달라고 했다. 당시 큰아버지는 여전히 보석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상점에서 일을 배우게 하려고 한 것 같았으나 큰어머니는 반대했다. 그녀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나의 성격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면서 나를 싫어했다. 아니, 큰어머니는 우리 가족을 모두 싫어했다.

나 역시 상점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상점 일을 하자면 큰집에서 지내야 하는데, 큰어머니와 같이 생활한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다. 무엇보다 공군사관학교에 대한 미련이 컸다. 내가 이백만 원을 빌려 달라고 하자 큰어머니는 ‘간이 부은 놈’이라고 하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내가 사정을 하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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