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에서 보낸 14년 6개월은 내 생애 가장 빛나는 시간이자, 가장 깊은 배움의 여정이었다. 처음 인도네시아 땅에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사람들의 생활 방식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낯섦 속에서 나는 새로운 삶의 문을 열었다. 그 문 안에는 따뜻한 미소와 느긋한 시간, 그리고 사람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교수로서의 나날은 매 순간이 배움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오히려 더 많이 배웠다. 서툰 한국어로 시를 낭송하던 그들의 목소리 속에서 언어가 문화를 잇는 다리임을 실감했다. 그 다리를 함께 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 내게는 큰 기쁨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삶은 나에게 ‘여유’를 가르쳐 주었다. 늘 시간에 쫓기며 살아온 나에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라고 말해주었다.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을 자주 멈춰 세웠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을. 빨리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귀국을 준비하며 집 안의 책들을 바라보았다. 1,500여 권의 책들에는 나의 땀과 시간이 배어 있었다. 그 책들을 한국학연구소에 기증하면서 마치 자식들을 떠나보내는 듯한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책들이 앞으로 학생들의 손에서 새롭게 씌어질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 덕분에 이별은 슬픔이 아니라 감사로 남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내 안에 있다. 그곳의 하늘빛, 내가 다니던 거리가 떠오른다. 학생들의 “안녕하세요, 교수님!” 하는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나는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낯선 땅이었지만, 그곳은 이제 나의 또 다른 고향이 되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분주하게 뛰지 않아도 된다. 지나온 시간에 감사하며, 남은 날들을 평화롭게 걸어가고 싶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며, 내가 배운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나누며 살고 싶다. 돌아보니 모든 것이 은혜였다. 낯선 땅에서의 만남도, 뜻밖의 도전도, 심지어 힘들었던 순간들마저도 모두 내 삶을 단단하게 다듬어 주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
“지난 모든 날이, 내게는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