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적었는데 울컥하는 건 왜 때문이야?
엄마는 완고한 아버지에 언니 둘, 오빠 하나 있는 집 막내딸이었다. 처녀땐 국제시장 주단 코너에서 장사를 도왔다고 한다. 그땐 엄마의 미모가 빛나디 빛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부평동에서 밀가루와 국수 장사를 크게 하던 집의 장남이었다. 엄마는 25살 꽃다운 나이에 이 집으로 시집을 왔다. 4~5살까지 부평동 국수공장이었던 그 집 2층인가 3층에서 살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 외사촌 언니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할머니는 축 늘어진 앞치마 주머니에서 돈을 한 움큼 꺼내 용돈으로 주곤 하셨다고 한다. 외사촌 언니랑 나는 9살 차이가 난다. 몰랐지만 언니가 말해 주어서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매고 있던 앞치마가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부평동에서 제법 잘 나갔던 국수공장은 어째서인지 문을 닫았다.
내가 5~6살이 될 무렵 우리들은 모두 해운대로 이사를 왔다. 어느 날 엄마는 11 식구를 거느린 맏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큰 슈퍼를 운영했을 당시엔 사모님 소리를 들으면서 지냈겠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부도를 맞았고 그 이후로 엄마의 삶은 팍팍해졌다. 가녀리고 빛났던 엄마의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물론 사모님이었을 때도 할머니를 도와 그 많은 사람들의 밥을 하고 부평동 국수공장 집에서도 일을 많이 했을 것이다. 맏며느리의 삶은 사실 그때부터 팍팍했던 것이다. 사모님이고 아니고의 차이? 그리고 11 식구의 엄마가 되었다는 그 차이?
엄마는 그 당시 11 식구가 먹을 밥을 한 솥 가득하셨다. 그때는 추가 돌아가는 압력밥솥에다가 했는데 한 솥 가득 밥이 되고 나면 나중에는 눌은밥에 숭늉을 끓여 마무리로 먹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11 식구의 밥을 매일 준비해야 했던 엄마는 도대체 아침 몇 시에 일어나야 했을까? 아마도 매일 새벽같이 일어났을 거다. 그 많던 아이들의 도시락까지 책임졌던 엄마. 애가 한 둘이어야 말이지. 4녀 1남의 도시락을 매일같이 쌌으니까. 언니는 고등학교 때 야간 자율학습까지 하고 와서 도시락이 기본 2개. 나는 저녁 늦게 서클활동을 하고 와서 도시락이 두 개였다.
남동생이 나랑 8살 차이가 나고 언니랑은
11살 차이가 난다. 남동생도 엄마의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고 하니 엄마는 5명의 도시락을 끝도 없이 싸셨으리라. 그 당시 엄마가 싸주는 도시락 반찬은 주로 계란말이였다. 계란만 톡 깨서 만든 것이 아닌 각종 채소를 다져 넣어 만든 거였다. 없는 살림에도 엄마는 자라나는 아이들의 영양을 따져 양파, 당근 등을 넣고 해 주셨다. 살짝 단맛이 나면서 색감도 예뻤다. 엄마의 도시락 반찬은 반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나는 소시지 햄을 싸 오는 아이들의 반찬을 먹고 그 아이들은 엄마의 계란말이를 먹었다. 계란말이와 함께 싸 주던 반찬과 함께 엄마의 도시락 반찬은 잘 팔렸다.
11 식구 중 할머니와 노할머니는 식성이 매우 달랐다. 할머니는 좀 자극적인 음식을 선호해서 마늘, 고춧가루 등이 들어간 음식을 좋아했고 노할머니는 그 반대였다. 그래서 엄마는 반찬을 만들 때도 꼭 두 가지 맛으로 만들어 냈다. 마늘과 고춧가루가 들어간 반찬 1개, 그걸 뺀 거 1개.
엄마가 우리를 위해 잘 만들던 음식이 몇 가지 있었는데 수제 돈가스와 돼지고기와 우거지를 듬뿍 넣어 만든 콩비지 찌개, 납세미조림 또 꽃게 된장찌개 그런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엄마의 돈가스와 콩비지 찌개는 잊을 수가 없는 것. 고기에 밀가루, 계란, 빵가루 순으로 입혀 튀겨냈다. 소스도 직접 만들고 얇게 썬 양배추를 곁들여 낸 돈가스는 정말 일품이었다. 아버지도 엄마의 돈가스를 정말 좋아하셨다. 엄마가 돈가스를 만들 때면 거드는 건 항상 나였다. 그때 식빵을 채에 갈아 빵가루를 만들고 고기에 반죽을 입히는 작업을 내가 맡아서 했었다. 콩비지 찌개는 겨울이 되면 항상 등장했다. 이 찌개를 끓일 때도 무슨 식당처럼 한 솥 끓여냈다. 전날 노란 콩을 불려놓고 다음날 콩을 갈아 준비하고 우거지와 비개 달린 돼지고기를 듬뿍 넣어 끓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콩비지찌개는 양념장을 얹어 먹는데 그 맛이 또 일품이었다.
집에 제사가 있었을 때 엄마는 1년에 12번은 더 지낸 걸로 안다. 그 당시 교회를 나가고는 있었지만 할머니가 믿기 전에는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다 믿고 나서도 쉬이 제사문화에서 벗어나기가 쉽지는 않았다. 왜 12번이냐고 하면 할아버지, 할머니, 노할머니 윗대분들의 제사를 다 챙겼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엄마와 할머니가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할머니가 제사음식을 차리실 때 내가 많이 도와드렸다. 할머니는 홍동백서를 지켜 음식들을 올렸다. 할머니를 도와드리면서도 나는 엄청 구시렁댔다. 자리가 뭐 그리 중요하냐며? 할머니랑 티격태격 많이 했었다. 나중에 제사문화가 없어지고 나서도 엄마는 그 문화에 너무 오래 젖어 살았던지 손을 놓기가 힘들었다. 차츰차츰 그렇게 제사문화도 없어졌다.
천성이 부지런한 할머니는 집 마당에 화분을 들다가 허리를 삐끗하셨다. 그 길로 누워 지내게 되면서 풍이 찾아왔다. 엄마는 거동이 안 되는 할머니를 3년간 모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당뇨가 찾아왔다. 그간의 고생스러움이 그리고 긴장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몸도 제 갈길을 잃었는지 그렇게 하나둘 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노할머니. 우리 5남매까지 돌보느라 힘들고 지치고 외로웠을 서러웠을 그 삶을 들여다본다. 지금 내가 시어머님을 모시면서 경험하게 되는 힘듦들, 고단함들, 서러움들을 통해 엄마의 삶을 조금이나마 대리경험을 해 본다. 25살에 시집와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하면 참 슬프기도 하지만 엄마는 엄마의 역할에 충실했고 자신의 에너지를 식구들을 위해 다 쓰셨다. 더 살고자 했지만 그 에너지가 다했기에 아픔도 고통도 없는 하늘나라로 가신 거다. 마침 오늘 엄마의 기일을 기념으로 우리들이 모두 모인 날이었다. 산소에서 만나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랬는지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란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어 졌는지도 모는다. 글을 쓰며 울컥, 찔끔도 하며 엄마와의 추억 속으로 잠시나마 빠져보았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