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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사진가로서의 첫 걸음

모든 걸 잃은 이들이 보이는 이방인을 향한 친절

by 해리

무더위가 폭염처럼 내리쬐던 날이었다.

나는 만세라(Mansehra)를 거쳐 가리 하비불라(Garhi Hanibullah)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을이라기보다는 폐허에 가까웠고 지진이 남긴 잔해만이 이곳에 한때 사람들의 삶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할지, 심지어 밤을 어디서 보내야 할지조차 정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온 나 자신을 뒤늦게 자책했다. 하지만 솔직히 이 규모의 대재앙 앞에서는 사전 준비가 무색했을 것이다. 도착 후에 발품을 팔아 지낼 수 있는 숙소를 잡아보고 혹시라도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가져온 텐트를 어딘 가에 설치하고 임시로라도 그 안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파키스탄의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서 작은 밴 버스에 승객을 가득 채운 채 4시간 가까이 구불구불한 산악도로를 거쳐 도착한 가리 하비불라.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7월의 뜨거운 태양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커다란 배낭을 두 개에 더 큰 더플백들을 들고 멀리 갈 수도 없어 지친 발걸음으로 일단 버스 정류장 맞은편 시원한 음료를 파는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쉬타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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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은 내가 사진이라는 매체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한 이후 작업을 하기 위해 처음으로 선택한 장소였다. 나에게 영감을 주었던 이전 세대의 포토저널리스트들은 대부분 분쟁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들의 사진을 보며 충격과 호기심을 느끼고, 머릿속으로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떤 식으로 접근했을까’를 상상하며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한 첫걸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도에서의 반년 간 배낭여행을 마치고, 나는 워싱턴 DC의 코코런 예술학교(Corcoran Colleage of Art & Design)에 지원했다. 최근 신설된 포토저널리즘 전공과, 미국 수도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주요 언론사들의 사진가와 에디터들이 객원교수로 강의한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첫 해 나의 담당 교수는 백악관 사진사 출신 수전이었다. 로라 부시 퍼스트레이디의 전속 사진가로 일하다 출산 후 잦은 해외출장이 부담스러워 사임하고 우리 학교에 자리를 잡았다. 나나 그녀에게 코코런에서의 첫 해였고 우리는 좋은 교감을 나누었다. 그녀는 새로운 직장에서 열정적으로 모든 지식을 쏟아내며, 현장에서 포토저널리스트가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가정한 과제들을 내주곤 했었다. 주제를 선정하고, 대상을 섭외하고, 사진을 찍고, 밤늦게까지 암실에서 인화하거나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편집을 하는 일상. 그리고 클래스메이트들과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일상은 다람쥐 쳇바퀴 같았지만, 오랫동안 사진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왔던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그리고 꽤 낭만적인 시간이었다.


그렇게 꽉 찬 일 년을 보낸 후, 긴 여름 방학 동안 배운 것을 적용하고 내 한계도 시험해 볼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든 선배 사진가들처럼 바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분쟁지역으로 뛰어들 용기는 없었지만, 대신 파키스탄이라는 미지의 땅을 나의 목표로 삼았다.


파키스탄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전년도 지진 이후 복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뉴스 때문이었다. 비록 분쟁지역으로 분류되긴 했지만, 당시는 테러 활동이 줄어든 시기였다. 또한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보다는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이들의 상황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를 가진 외지인에게는 현지인들이 좀 더 호의적이지 않을까 하는 다소 순진한 기대도 있었다. 네팔 여행 중 만난 한 여행작가가 “너는 왠지 파키스탄과 잘 맞을 것 같다”라고 한 말이 내 호기심을 자극한 것도 한몫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이슬람 문화권으로의 첫 여행이었기에 그런 환경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할지 궁금했고, 치안 불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꺼리는 국가라는 점이 역설적으로 젊은 내 안의 모험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아마도 경험 부족과 젊음의 패기가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쉽게 결정을 하고 최소한의 리서치만 하고 이슬라마바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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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 옆 허름한 카페에서 만난 무쉬타크는 맞은편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한 나는 ‘네, 이렇게 대책 없이 이곳에 와있는 나는 바보가 맞아요’라는 표정으로 씩 웃었다.


“여기에는 왜 왔소?” 그가 물었다.


“미국에서 온 사진학과 학생인데 이곳의 지진 피해지역을 기록하려고 왔어요. 솔직히 여기서 찍을 사진들이 어디에 실릴지 또는 이용될지는 모르겠지만, 여름방학 동안 스스로에게 부과한 과제라고 생각하고 왔어요.”


그는 잠시 나를 말없이 더 응시하다가 물었다. “어디서 지낼 거요?”

또다시 순진한 미소와 어깨를 으쓱거리며 모른다는 답을 대신했다.


하얀 펀자비 옷차림에 지역 특유의 콧수염을 기른 그는 자신을 지진 이후 문을 닫은 지역 대학의 교수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대부분은 그 기저에 ‘이런 어이없는 친구가 다 있나’라는 뉘앙스가 깔려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호의를 담고 있음이 느껴져 나도 성심껏 답했다. 한편으로는 지진 이후 단조로워진 일상에 나라는 존재가 약간의 활력소가 된 듯했다. 만난 지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그가 제안했다.


“오늘 머물 곳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거요. 원래도 호텔이 많은 도시가 아니었고, 있던 것도 대부분 지진으로 무너졌소. 짐 들고 나를 따라와요. 나도 지진으로 집이 붕괴되어 형님 집에서 지내고 있지만, 당신을 재워줄 공간은 있을 거요.”


그렇게 나는 무쉬타크의 형 집에서 한 달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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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무모하게 아무런 준비 없이 온 내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동시에 ‘무엇이 이렇게 많은 걸 잃은 이들에게 갓 만난 이방인을 향한 친절을 베풀게 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명확한 답은 찾지 못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쉬타크의 이 작은 친절이 내가 파키스탄이라는 나라 전체를 바라보는 틀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여행할 때는 현지에서 보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만나는 몇 안 되는 인연이 그 장소에서의 경험 자체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놓기 십상이다. 만약 파키스탄에서의 첫 만남이 불쾌한 경험으로 시작되었다면, 나는 아마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그 나라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운 좋게 만난 소중한 인연에 감사하며, 그들처럼 나 또한 겸손한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자는 가르침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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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 하비불라에서의 한 달은 단조로운 리듬 속에 흘러갔다.

이른 아침 간단히 과일을 먹고 길을 나서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흥미로운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무더위가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현지인들처럼 그늘(대개는 무너진 건물 잔해 밑)을 찾아 땀을 식히거나 잠시 낮잠을 청했다.


히말라야에서 시작된 인더스강은, 가리 하비불라를 지날 무렵 빠른 유속을 자랑했다. 그럼에도 고산의 빙하에서 비롯된 얼음처럼 차가운 물은 열기를 식히기에 완벽했고, 많은 아이들이 유속이 느린 구간에서 수영을 즐겼다. 때로는 나도 그들의 물놀이에 동참했다. 간혹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같은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근방의 발라콧(Balakot)이나 무자파라바드 (Muzaffarabad)로 넘어가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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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홀로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내가 무쉬타크는 계속 걱정이 된 듯했다. 매번 그날 만난 또 다른 친절한 파키스탄인들 이야기를 하며 그들 또한 무쉬타크처럼 자청해서 보호자가 되어 챙겨준다고 말하면, 그는 이곳에서는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된다고 누누이 경고했다. 기어이 그는 어느 날 내게 전화기를 쥐어주고, 두 어시간마다 전화해 나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이 그의 일과가 되었다.


반대로 나는 그에게 자국민들을 더 신뢰해도 된다고, 미국 정부가 파키스탄을 위험국가로 지정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그리고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라고 설명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이곳을 찾지 않는 것이 관광객들로 너무 북적거리는 걸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했다. 몇 년 후, 오사마 빈 라덴이 내가 머물렀던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보타바드(Abbottabad)에서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연스레 무쉬타크가 떠올랐다.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면 무쉬타크의 귀여운 6살 쌍둥이 조카들이 반겨주었다. 그들과 레슬링을 하기도 하고, 10분에 한 번씩 정전이 되는 와중에도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지단의 국가대표 은퇴 경기가 된 독일 월드컵 결승전을 밤늦게까지 시청한 것도 파키스탄에서의 소중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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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금요일 오전, 무쉬타크는 함께 모스크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무슬림에게 금요일 오후 기도는 일주일 증 가장 중요한 예배 시간이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는 항상 모스크에서 기도를 드렸다. 파키스탄에서 아직 모스크를 방문하지 못했던 나는 호기심에 동의했다. 무쉬타크는 내 옷이 너무 튀니 이왕 갈 거면 현지인처럼 보이는 게 어떻겠냐며 선물이라며 이미 준비한 하얀 펀자비 옷을 건넸다. 속으로 ‘의외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그와 함께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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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진 와중에 모스크만 멀쩡히 서있었다면 오히려 이상했겠지만, 실제 도착해서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모스크의 형체는 온 데 간데없고, 그대로 주저앉은 모스크의 옥상 플랫폼만이 예배 공간으로 남아있었다. 지붕 없는 열린 공간에서 뒤편에 무너진 미나렛 위의 초승달 상징만이 이곳이 한때 모스크였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기도를 시작하고 있었다. 폐허가 된 모스크 터 위에 모인 그들의 모습은 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장면이었다. 무쉬타크와 나는 맨 뒷줄에 합류했고, 그는 그저 가만히 있어도 되지만 시도해보고 싶다면 자신의 동작을 따라 하라고 말하고선 기도를 시작했다.


무슬림 기도에는 반복적으로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코란을 읊는 동작이 있는데, 사람들이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나를 발견하고선 그대로 고개가 고정이 되는 조금 웃긴 장면이 연출되었다. 순간적으로 한눈을 팔게 만드는 요인이 된 것을 알고 미안했지만 무쉬타크는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기도가 끝나고 해산하자마자 난 의도치 않게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무쉬타크와 함께 모스크 잔해 아래 노출된 수도(지진 후 도시에 남은 몇 안 되는 공용 수도라고 했다)에서 집에 가져갈 물을 담고 있는데, 몇몇이 다가왔다. 대부분은 그저 우리 대화를 엿듣거나 나를 훑어보는데 그쳤지만, 무쉬타크가 며칠 전 음료수 가게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 중년의 남성이 나의 방문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그중에는 다소 민감한 질문도 있었다.


“당신은 종교가 있나요?”


이 질문에 잘못 대답하면 나나 무쉬타크가 곤란해질까 잠시 고민했지만, 파키스탄에 오기 전 경험이 떠올라 이들의 반응은 어떨지 궁금했다. 나는 특정 종교를 믿지 않지만 이렇게 대답했다.


“기독교인이에요.”


물론 그 대답이 적대적으로 들리지 않도록 순진하고 천연스럽게 말했다. 한편으로는 괜한 선입견에 그들이 언짢아할까 살짝 우려스러우면서도, ‘방금 내가 함께 기도하는 걸 봤으니 내가 싸움을 걸러 온 게 아니란 걸 알겠지’라고 생각하며 반응을 기다렸다.


파키스탄에 방문 전 경험이란, 모스크를 방문했던 나에 대한 일부 기독교인 친구들의 반응이었다. 나의 첫 모스크 방문은 학교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워싱턴 이슬람 센터(Islamic Center of Washington, D.C.)였다. 학교 과제로 워싱턴의 다양한 종교 활동을 사진 찍기 위해 간 것인데, 처음 들은 이맘(기도를 이끄는 사람)의 기도 소리가 그렇게 평화롭게 들릴 수 없었다. 높은 천장에서 메아리치는 그 울림 속에서, 나는 기둥에 기대어 앉아 끊임없이 고개를 숙이고 일제히 동작을 맞추어 절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종교적 의식의 숙연함과 구원을 향한 간절함에 나까지 성스러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모스크에서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다. 이러한 숭고한 울림은 티베트에서 어두운 사원에 앉아 몇 시간이고 염불 하는 스님들을 보면서도, 워싱턴의 대성당에서 미사 중 들리는 합창단의 음악에서도 경험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기독교인인 한인 친구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어떻게 그런 사악한 곳에 갈 수 있냐”며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라고 얘기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무슬림이 다수인 이곳에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조금은 짓궂은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약간 도발적이거나 기독교인 친구들과 비슷한 반응을 예상했던 내게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요. 다행이에요. 어떤 신이든 믿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해요. 기독교든 무슬림이든.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여지가 없지만요.”


속으로 뜨끔했지만, 예상 밖의 대답에 기분은 좋아졌다.


물론 하나의 사례를 너무 성급하게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 내 기독교인 친구들 중에서도 종교 갈등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오직 자신의 신앙과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이들도 많고, 반대로 비무슬림을 향한 끝을 알 수 없는 적대감으로 가득 차 그 어떠한 대화도 불가능한 무슬림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이곳에 와서 이들과 대화하지 않았다면, 이런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놀라움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아마도 내가 다큐멘터리 사진을 추구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일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편견들을 마음속에 가두지 않고, 세상으로 나가 몸소 경험하고 때로는 그것들을 깨뜨리며 살고 싶다는 열망. 또한 타인의 시선을 통해 걸러진 세상이 아닌, 내가 직접 체험하고 느끼고 싶다는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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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처음’이 많았던 파키스탄에서의 두 달이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지만, 지나치게 구체적인 계획보다는 일단 몸으로 부딪혀 보고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응하는 법을 배운 첫 경험이었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점차 이해하게 될 이슬람 문화권과의 첫 만남이었으며, 현장에서 홀로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본능에 따라 움직이되 나름의 루틴을 가지고 온전히 사진에 집중한 첫 경험이었다.


결국 파키스탄에서 촬영한 사진들은 학교와 동네 카페에서 전시하는 것 외에 달리 활용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접근할지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준 소중한 경험으로, 파키스탄은 내게는 여전히 큰 의미가 있고 자주 생각나는 특별한 장소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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