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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량음료 Jan 26. 2023

광장

부유하는 청춘의 기록

고등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 대한 기억을 억지로 더듬어보면 어느 한 구절이 생각나는 것 같다. 앞 뒤 맥락은 기억에 나지 않으나 주인공이 누군가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 같았던.

“………중립국.”, (누군가의 말), ”………중립국.”, (누군가의 설득), ”………중립국.”..


어느 날 문득 최인훈의 '광장'이 떠오른 것은 전적으로 나의 지적 허영심 탓이었던 듯하다. 한국에서 살 때 같은 동네의 몇 여성들이 모여서 일주일에 한 번씩 독서모임을 가진 적이 있는데, 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최인훈의 ‘광장’을 함께 읽고 토론을 했더랬다. 그때 고등학교 때 읽었던 ‘중립국’을 발견했고 그 글이 광장의 발췌였다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광장을 처음 읽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교과서 발췌문(교과서에는 전체 소설이 실리지 않으므로) 뿐 아니라 오래전 이 소설 전문을 읽은 적이 있었지만 그냥 기억에서 지워졌던 것이었다. 지적인 여성분들과 함께 그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글을 쓰기 위함은 아니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던 탓일까 그 당시에는 주인공 명준에 대해서 큰 감흥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엔 글을 쓰기 위해 최인훈의 ‘광장’을 다시금 정독했다. 사실 글을 쓴다는 건 사람의 진을 빠지게 하는 일이라 선뜻 달려들기가 쉽지 않다. 쓰는 내내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지속해야 한다. 내 능력의 하찮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싸움, 적절한 단어 선택의 싸움, 독자를 너무 의식해서 쓰지도 그렇다고 혼자만 보는 일기처럼 쓰는 것도 지양해야 하므로 그 중간 어디쯤 균형을 맞추는 싸움 등 글쓰기는 정말이지 쉽지 않다. 결국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게 될 것이므로 최대한 예쁜 옷을 입혀 세상에 내보내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를 목적으로 최인훈의 ‘광장’을 다시 읽어보니 아무래도 앞의 두 번 읽었을 때와는 달리 구석구석 놓치지 않고 정독을 하게 되는 성과가 있었다. 최인훈씨의 언어표현력에 혀을 내둘렀고, 문장마다 쉼표를 왜 그렇게 많이 썼을까 의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세히 읽다 보니 주인공의 복잡한 심경을 조금 더 이해하기도 하고, 나약함에 실망하기도 하고, 운명의 가혹함에 가슴 아파하기도 하는 등 엄혹한 시대를 살아갔던 명준들에 대한 연민에 가슴이 저렸다.


주인공 이명준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를 두었다. 해방이 되고 아버지는 월북을, 어머니는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세상천지 혼자이다. 그는 대학교 3학년이며 철학과에 다니고 있는데, 아버지의 은혜를 입었다는 한 은행가의 자비에 기대어 얹혀살고 있다. 부잣집에 살면서 독방을 쓰고, 너그러운 그 집 남매와도 그럭저럭 의좋게 지내면서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늘 비어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며, 어떻게 살아야 보람을 가지고 살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마음을 쏟을 만한 일을 찾아낼 수가 없다'. '가슴이 뿌듯하면서 머릿속이 환해질, 그런 일이 없는지’ 고민하고 있다. 그는 ‘힘껏’ 살고 싶으나 어떻게 힘껏 살 수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어 답답하다.


그가 그렇게 고민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책에서는 명준이 말하는 ‘광장’과 ‘밀실’이라는 개념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광장은 ‘집단적인 삶 혹은 사회’를 상징한다면, 밀실은 ‘개인적인 삶’을 상징한다. 명준은 광장과 밀실이 서로 건전한 상호작용을 이루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가 발을 고 있는 남한이라는 광장은 그가 원하는 ‘갈빗대가 버그러지도록 뿌듯한 보람’을 품고 살 수 있는 삶을 제공하지 못하는 곳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정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여있기 때문이다. 모두의 꽃을 꺾어서 저희 집 꽃병에 꽂고, 분수 꼭지를 뽑아 저희 집 변소에 차려놓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가들은 자루와 도끼, 삽을 들고 도둑질을 하러 광장에 나와 모든 것을 약탈하여 자신의 밀실에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 광장도, 문학의 광장도 마찬가지이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기’ 때문이다.

명준의 넋두리를 한참 들어준 정선생이 그에게 묻는다. ‘그 텅 빈 광장으로 시민을 모으는 나팔수는 될 수 없을까?’ ‘자신이 없어요, 폭군들이 너무 강하니깐.’


아, 실망이다. 소설의 초반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 나는 이미 명준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명준은 나약한 지식인이다. 사회에 대한 불만은 많으나 행동은 하지 못하는 머리만 크고 가느다란 팔다리를 가진 파리한 지식인. 예전 학부 때 러시아 문학 수업 중 읽었던 작품에서도 종종 등장하던 잉여인간, 그리고 닥터지바고의 주인공인 지바고와 같은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 그들은 조화로운 사회에 살면서 시를 써야 하는 부류의 사람들인데 운이 나쁘게도 가장 엄혹한 시대에 떨어졌으므로 그들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사실 실망이라는 나의 평가도 가혹하다. 그들은 애초에 이런 삶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나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듯, 모든 사람이 광장에서 도둑질을 하는 정치가들을 응징하고, 그들의 밀실을 습격하여 그들이 도둑질한 물건을 도로 광장에 가져다 놓고, 도둑 물건들이 넘치는 경제 광장도 휩쓸어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영웅이 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왜 이런 나약한 주인공을 볼 때마다 화가 나는지, 왜 그들의 입만 살아있음에 짜증이 나는지.


‘수없이 고꾸라져 벗겨진 정강이’를 가지고 싶어 했던 명준은 바라는 대로 머지않아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대남방송에 북에 올라간 자신의 아버지가 자꾸만 등장하자 경찰들의 표적이 된 것이다. 수차례 경찰서로 끌려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고문을 받으며 남한은 자신이 있을 수 있는 광장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만약 그 당시 사귀고 있던 윤애가 좀 더 고분고분하게 명준이 원하는 대로 자신을 허락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윤애는 어느 날은 명준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허락했다가, 어느 날은 절대로 내어주지 않다가 하는, 명준의 입장에서는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어느 날도 윤애가 몸을 내어주지 않자 명준은 월북하는 배에 오른다. 이 대목에서도 또 실망이다. 남한이라는 광장에 깊이 실망한 명준이 더 나은 광장을 찾아 월북을 했더라면 덜 실망했을 것을, 여자친구가 순순히 몸을 내어주지 않는데 실망하여 갑자기 월북행을 택하다니. 물론 그전에 경찰에게 받은 심한 모욕적인 일들로 그의 심신이 많이 무너진 상태긴 하였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의 월북을 결정지었던 계기가 여자친구 때문이라니. 하긴 우리가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그 누가 항상 올바르고 정의로운 이유 때문에 행동을 취하겠는가. 수많은 자잘하고도, 감정적이고도, 지질한 이유들이 모여 어떤 결정을 하게 되는데 그 결정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북한으로 간 그가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새나라 새 시대를 열어가자는 혁명의 열기는 없고 어딜 가나 다들 ‘맥 빠진 얼굴’ 뿐이었다. 열렬한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는 새장가를 들었는데 아들 또래의 평범한 여성에게였다. 만주벌판에서 함께 반일 운동을 했던 여성 코뮤니스트가 자신의 새어머니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명준은 너무나 실망하고, 그런 아버지에게 어느 날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는다. 난장판 같은 썩은 남조선 광장을 떠나 위대한 인민 혁명을 찾아, 붉은 심장의 얘기를 하기 위해 월북을 하였는데, 이곳은 오로지 ‘당’만이 주인공이라고. 위대한 레닌 동무의 말만 복창할 뿐 어떤 말도 덧붙여서는 안 된다고. 밀실은 죽었고 오로지 앵무새처럼 구호를 외치는 양들과 개떼들만이 헤매고 다니는 광장만 존재하는 곳이라고.


불쌍한 명준은 어느 날 은혜를 만난다. 그녀는 국립극장 소속 발레리나이다. 은혜는 윤애와 다르다. 속을 알 수 없었던 윤애와는 달리 투명하다. 한 번도 그를 거부한 적이 없다.

중국의 조선족 집단농장을 취재하러 다녀온 명준은, 농민들의 궁핍함을 그대로 기사에 썼다는 이유로 자아비판을 하게 되자 결국 자신이 발 디딜 수 있는 광장은 자신의 팔을 벌린 둥근 테두리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광장 속에는 자신과 은혜가 있을 뿐이다.

어느 날 은혜는 러시아로 공연을 떠난다. 떠나기 전 명준은 그녀가 떠나면 왠지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에 떨며 제발 가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한다. 알겠다고 대답을 하였던 은혜였으나 결국 명준 몰래 출국해 버린다. 그리고 6.25 전쟁이 터진다. 명준은 북한군으로 전선에 투입된다.


전쟁이 북한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명준은 그곳에서 기적처럼 은혜를 다시 만난다. 전쟁이 나자 북한으로 돌아온 은혜는 명준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를 만나기 위해 제일 먼저 자원하여 간호병으로 입대한 것이다. 둘은 명준이 찾아놓은 굴에서 수시로 만난다. 그들은 절망적인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연합군의 총공격이 있었던 날 명준의 아이를 가진 은혜는 전사한다. 다시금 명준은 자신의 광장을 잃었다.


포로가 된 명준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 국행을 택한다. 돌아가려고 했던 북한은 포로신분이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본주의 균을 옮아 온 반동분자로서 살길이 없게 되었고, ‘타락할 수 있는 자유와 게으를 수 있는 자유’만 있는 남한에서는 결코 살아가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인도행 배를 타게 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를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다. 눈길을 느낀 명준이 얼굴을 드는 순간 그 눈동자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얼굴 없는 눈동자는 끈질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 눈동자의 주인공을 알게 된다. 내내 배를 따라오던 갈매기 떼들, 하얀 어미 갈매기와 그 반만 한 새끼 갈매기. 그들이 바로 무덤 속에서 아이를 낳은 은혜와 둘 사이의 딸이었음을 깨닫는다. 눈을 든 명준의 눈에는 푸른 광장이 펼쳐져 있고 그는 은혜와 그의 딸과 함께 그 광장에서 살아가기 위해 푸른 광장으로 뛰어든다.


한 전도유망한 청년이,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했던 젊은이가 시대를 잘못 만나 북의 광장으로도, 남의 광장으로도 가지 못하고 하늘의 혹은 바다의 푸른 광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가 얼마나 가슴 아픈지.

그가 상상했던 대로, 아무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에서 병원 문지기라든지, 소방서 감시원이라든지, 극장의 매표원으로 살아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병원 문간을 깨끗이 치우고 꽃밭에 물을 주며 간호사들의 조촐하고 따뜻한 호의를 받아가며 살았더라면.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망루에서 소방서 불지기로 지붕 밑의 삶을 둘러보며 삶을 이어갔더라면. 극장 매표원으로서 적당히 낮에 일하고 밤에는 단골 술집으로 가서 가볍게 한잔 하는 한량 같은 삶을 살았던들.

그랬다면 또 삶은 이어졌을 것이고 그의 광장은 넓어져갔을 것이고, 그의 광장을 채워줄 따뜻한 이들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상상 속에만 있었던 그의 미래가 아쉽고 애달프다. 그는 결국 사랑이 채워지지 않아 남한을 떠났고, 사랑이 죽어버려 북한을 떠났다. 이명준에게 있어 사랑의 완성도란  ‘몸의 길’이 완전히 이어지느냐 이어지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몸의 길이 이어지지 못하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 소설은 모두가 말하듯 ‘이데올로기 소설’인가, 아니면 혹자가 이야기하듯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인가. 어느 쪽이든 혼돈의 시대를 살아간 인생의 선배들의 이야기일 테다. 그저 광장과 밀실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깊이 파고들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세대에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진부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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