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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키드니 Apr 10. 2022

며느리가 의사라서요.

" 여기 잠깐 의사 선생님 좀 바꿔줄게. 통화해봐." 


집안에 의사가 있으면 아무래도 좋겠지라고 하지만 며느리가 의사라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나는 나의 환자들에 대해서는 감이 좋은 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족만은 예외였다. 겸연쩍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가족 중 누군가 '아버지 뇌졸중 초기 증상이 아니냐'라고 물었을 때, 도리질의 선두주자가 바로 나였다. 말하는 것마다 맞은 적이 없으니 어쩌면 나는 엑스맨일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병원에서의 상황을 어머니가 이해하기 쉽도록 번역하는 것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놈의 루돌프까지 걸려가지고...'라고 말하는 어머니를 보고 '루푸스'임을 알아차렸다. 누구의 잘못이냐, 무엇을 잘못 먹어서 걸린 것이냐고 물었다. 그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신을 공격하는 면역 질환임을 설명했다. 면역력이 떨어지고 기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독한 약을 쓰면 더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약을 쓸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어머니는 내가 한 말은 이해했지만, 병원에서 들었던 다른 의사의 말은 어려워했다. 무슨 말을 들었던 건지,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어머니는 의사가 오고 가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용기를 내었던 것이다. 


오후 3시. 아버님의 상태를 점검하러 온 재활의학과 의사에게 어머니는 간청했다. 


" 우리 며느리가 내과 의사라서요. 통화 한번 해주세요." 


시간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던 그는 어머니의 강권에 마지못했다. 컴퓨터 의자에 앉아 의무 기록 창을 열었을 것이다. 재활의학과 전임강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는 아버님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는 환자의 인지 상태가 좋지 않아 효과적인 치료가 이루어질 확신이 없다고 했다. 최근에 악화된 인지 상태는 혈관성 치매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의무 기록을 보며 영상, 혈액 검사 결과를 알려주고 다른 과의 협진 진행 사항도 전달해 주었다. 


Urinary tract infection, enterococcus, high CRP

multiple cerebral infarction, r/o cerebroamyloid angiopathy


처음 알게 된 사실들도 많았다. 요로 감염이 있고, 입원 당시 염증 수치가 200이었다가 최근엔 100까지 감소했다. 하지만 여전히 높은 수치였다. 의학 용어가 난무한 그의 말을 나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일했던 S병원. 그곳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그곳에 내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병실에 누워 계실 아버님과 그 옆의 어머님. 병실 안팎의 분주한 의료진들.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종종 거리며 병동을 뛰어다녔던 그때. 지금도 다르지 않을 그곳이었다. 그곳은 과거와 현재의 구분이 의미 없는 곳이다. 과거 나와 인연이 닿았던 수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이 떠올랐다. 그들 중 사연 없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현재 나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바쁜 생활 속 일부를 쪼개 시간을 할애해 준 그가 고마웠다. 나는 통화를 마치며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해댔다. 나의 감사에 그의 멋쩍음이 느껴졌다. 그는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교수님과 상의하에 추가적인 검사와 치료가 필요한지 점검해 보겠다고 했다. 


그와의 통화로 새로운 해법을 찾은 것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던 것은 아버님의 상황을 이해한다는 동의뿐이었다.


다시 어머니와의 통화가 이어졌다. 의사 대 의사에서 의사인 보호자로. 이제 남은 건 며느리 노릇이었다. 재활의학과 의사와의 대화 내용을 어머니에게 전달했다. 어려운 의학 용어를 배제하고 보면 결론은 간단했다. 모두가 사방으로 노력하고 있으니 기다려보자는 것이다.


어머니는 "알겠다. 이제야 속이 다 시원하다."라는 말로 동의를 표했다. 


내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안심을 표하는 어머니를 보고 깨달았다. 어머니에게 필요했던 건 의사 며느리가 아니었다. 병실 안에 홀로 남겨진 유일한 보호자. 어머니는 자신이 듣고 보았던 것을 누군가 함께해 주었으면 했을 것이다. 자신 혼자 지고 있던 보호자라는 부담스러운 짐을 함께 들어줄 이가 필요했다. 병실의 보호자에게도 보호자가 요구된다. 


엑스맨이었던 나는 무엇 하나 해 드리지 못해 미안했던 마음의 빚을 덜게 되었다. 오늘만은 의사 아닌 며느리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었다어머니는 내가 했던 통화 한 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 같다고 했다. '집안에 의사 하나 있으니 든든하다'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기회를 준 것은 어머니였다. 의사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었을 어머니. 적절한 타이밍을 잡아 나에게 도움을 청했던 어머니 덕분이었다. 


내가 동의하고 어머니를 이해시켰으니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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