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의사로서 나는 얼마나 많은 말들을 해왔을까. 하지만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한 말은 대부분 마음에 담아두거나 기억할만한 말은 아니었다.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의사의 소견일 뿐이다. 반대로 나는 의사로부터 들은 말들은 잊지 못하겠다. 환자의 가족으로써. 그건 결코 흩날려 버릴 수가 없었다. 의사의 말 한마디는 희망이기도 절망이기도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아버님이 계시는 병원에서 요 며칠 계속 호출이었다. 호흡이 가쁘고, 혈액검사상 백혈구 수치가 3만이 넘어간단다. 주치의는 말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환자의 호흡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모르핀을 써야겠습니다. "
모르핀을 제안했다는 것은 죽음이 임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음의 준비는 늘 되어 있었다. 그 준비는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
미국에 계시는 큰 아주버님은 한국행 비행기 표를 급히 알아보고 있다. 영사관에 자가 격리 면제를 위한 신청을 하고 승인을 기다린다. 작은 아주버님은 상조를 가입하고, 남편은 장례식장을 알아본다. 상주의 지리적 위치와 장례식장 이용 비용, 조문객을 고려하여 세 군데 정도를 생각해 놓는다. 하지만 장례식장을 미리 예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연락이 오는 대로 바로' 그들은 그렇게 24시간 대기 중이다.
아버님에게 모르핀을 사용하겠다는 순간부터 나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떠나려는 아버님을 생각하면 코끝이 시려졌다가 내가 하얀 가운을 입고 있음을 알아채고 눈물을 삼킨다. 이내 내가 빠지게 될 이 병원과 환자들을 생각한다. 이곳에 일하는 의사는 오직 나 하나뿐이므로, 나 대신 일할 의사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진 의사를 구하는 일은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지만,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예정된 휴가야 내가 정할 수 있지만, 이별의 날짜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돌아온 집에서 무구한 아이를 보며 마음은 다시 분주하기 시작한다. 아이의 옷장에는 알록달록한 옷밖에 없다. 어떤 옷을 입고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야 할지. 앞으로는 할아버지를 영영 볼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장례식 기간 동안 아이는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애도를 준비할 겨를이 없다. 언제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마음은 그 어떤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의사로서 보호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건넸을 때, 그들의 준비되지 못한 표정과 마음이 이해되었다. 떠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은 결코 예비될 수 없으며, 영원한 이별의 준비는 완벽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