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살아 있는 이들이 공평하게 거치는 단 하나의 사건이 있다. 평생 단 한 번 태어나고 딱 한 번 죽는다. 그 중요한 이벤트에 공통적으로 개입되는 것은 의사요, 병원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는 의사의 손에서 태어나서 의사에 의해 사망을 확인받는다.
산부인과에서 태어나는 것이 당연하듯,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되었다. 2020년 사망자의 75.6%. 4명 중 3명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죽음의 순간뿐 아니라 삶의 마지막 대부분을 병원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S 병원에서의 시간은 어느새 두 달이 지나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어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었다. 제법 서늘해진 바깥의 공기는 차가운 계절이 오고 있음을 알렸다. 아버님은 사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없는 동일한 대기를 가진 병실 안에서 지내고 있었다. 침대에 그대로 누운 채 소속만 바뀌었을 뿐이다. S 병원 신경과에서 재활의학과로 전과가 되었다.
재활 치료의 목표는 휠체어에 앉는 것이었다. 병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버님을 휠체어에 앉혀 병원 한 바퀴를 산책할 것을 꿈꿨다. 매일 하던 동네 한 바퀴 대신이었다. 재활 치료 역시 그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재활 치료실의 직원들과 안면을 트고 익숙해졌을 때쯤이었다. 재활의학과에서는 면담을 요청했다. 예정되었던 재활 치료 4주가 끝나가고 있었지만 상태는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치료는 의미가 없으니 S 병원에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애초에 재활 치료 시작 시 기본 4주에 추가로 2주까지 입원할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의 입원 치료는 안된다고 했던 그들이었다.
에누리 없는 냉정한 에어비앤비 시스템이었다. 결국 병원 마당 산책이라는 목표를 채우지 못한 채 또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전원이 아버님의 첫 외출이 되었다.
방 빼라는 주인의 통보에 남은 2주 동안 보호자들은 동분 서주 했다. 입원해있는 환자를 대신한 서류 뭉치를 들고 서너 군데의 병원을 방문했다. 대학 병원 소속의 재활 병원, 2차 병원이었다. 그 사이 아버님은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했다. 의식저하뿐 아니라 지속적인 발열도 문제였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루푸스, 폐암 등이 원인일 것으로 생각되나, 확실하지 않았다. 열이 난다는 급성기 환자를 그 어떤 병원에서도 환영하지 않았다. 발열을 해결하지 않으면 전원이 불가하다는 답변만 받고 돌아왔다.
아버님은 환자가 틀림없었지만, 어느 병원도 반기지 않았다. 최소한이자 최우선이었던 재활 치료조차 의미가 없었다. 아버님의 치료 목표는 지난 1년간 항암치료에서 재활치료로. 이제는 그저 요양만 하는 쪽으로 변경되어야 했다. 주기적으로 가래를 석션하고 콧줄로 식사 제공이 필요해 집에서 요양할 수도 없었다. 아버님에게 마지막이 될 병원을 찾아야 했다.
아버님은 어디로 가야 할까.
가장 먼저 삶의 마지막을 정리할 수 있게 해 준다는 호스피스 병원을 떠올렸다. 호스피스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임종을 맞이하려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을 예약했지만, 그곳은 2주 정도 대기가 필요했다. 누군가 떠나야 들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다. 재촉하는 병원의 퇴실 명령으로 아버님은 당장 몸을 뉠 곳이 절실했다. 마지막을 예견하고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일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예지자는 없었다.
다음은 누구나 생각하는 요양 병원이다. 요양병원이라는 말에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어머니가 꺼려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한 것이리라. 요양 병원을 죽음의 무덤이라고들 한다. 요양병원 환자들은 중증 만성질환으로 일상생활 수행 능력을 상실 한 이들이 모인다. 대부분 거동을 할 수 없는 와상 및 중증질환자들이다. 모집단 자체가 고령, 중증 질환자들이기에 예후가 좋을 수가 없다. 치료와 요양이 필요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곳이 바로 요양 병원이다.
지난 2주 동안 우리는 대학병원, 2차 병원, 호스피스 병원을 찾기 위해 분주했지만, 누구나 마지막으로 가게 된다는 요양병원이 아버님의 마지막 병원이 되었다.
마지막 병원은 사람이 태어나 처음으로 가게 되는 병원을 정하는 기준과 다르지 않다. 나는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며 선택했던 병원의 기준을 떠올렸다. 아기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의료진이 있는가. 시설은 위생적이며 깨끗한가. 병원비는 적절한가. 집과의 동선은 괜찮은가. 무엇보다 밥은 잘 나오는가.
아버님의 마지막 병원도 마찬가지다. 여러 후보지 중에서 의료진의 역량, 경제적인 부분, 거주지와의 동선, 편의 시설을 고려하였다. 100% 완벽한 곳은 없었다. 서너 군데의 요양병원을 섭외하고 한 군데를 직접 방문했다. 처음에는 의심을 하던 어머니는 병실을 직접 확인한 후 조금은 안심인 눈치였다. 어머니가 안심할 수 있는 곳이 아버님의 마지막 병원이 되었다. 내 마음 편한 곳이 아기의 첫 병원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가족의 바람은 하나다. 그곳에서 아버님의 마지막은 편안하기를. 더불어 어머니의 몸과 마음도 편해지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