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O님 아드님이시죠? 환자분 상태가 좋지 않아서 어머니께 말씀은 드렸는데 충격을 받으셨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시네요. 지금 병원으로 와주셔야겠어요.
오전 8시. 남편을 찾는 S 병원의 내과 전공의였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병원의 부름에 채비를 하고 간 남편은 서류 한 장을 건네받았다.
Do not resuscitate (DNR) 소생술 포기.
적극적인 치료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를 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삶의 마지막에서 소생 가능성이 없는 경우 스스로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작성해 놓을 수 있다. 만약 환자 스스로 결정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가족 전원의 동의가 이뤄진 연명 치료 중단 동의서가 필요하다.
병원에서 치료를 하지 않겠다니. 누군가는 과도한 의료 행위를 막거나 책임을 면피하기 위한 행정적인 절차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환자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다.
나는 얼마 전 치료 중 의식을 잃고 심장이 멈추려는 70세 강 할아버지의 흉부를 압박했다. 뚜뚜둑. 갈비뼈가 으스러진다. 그는 말기 신부전 환자였지만, 당장 죽을 이유는 없는 환자였다. 살려내야 했다. 하나 둘 셋. 환자의 심장을 깨우는 주문을 걸었고, 잃었던 환자의 의식이 돌아왔다. 환자도 살고 나도 살았다. 환자는 가슴이 아프다며 인상이 잔뜩이다. 죽음 근처에 갔던 환자가 내 곁으로,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 환자에게 소생술을 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끊어진 환자에게 심폐 소생술을 하는 것은 의사에게 본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에게,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는 이에게 잠깐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심장을 뛰게 하기 위해서 심장 둘레의 갈비뼈가 으스러질 정도의 압박을 가해야 하기에 그것은 폭력에 가까운 일이다. 환자는 아파도 고통을 표현할 수도, 그만해달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미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는 사람이 언제 죽을지 한눈에 척하고 알 수 있는 신기(神氣)는 없지만, 여생이 길지 않은 환자는 알아볼 수 있다. 그럴 때 의사는 환자에게 혹은 환자 보호자에게 심폐소생술 금지 동의서를 받는다. 동의를 강요하지 않는다. 환자에게 연명치료 중단 동의서가 없다면 의료진은 기본적으로 소생술을 시행한다.
때때로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에게 심폐 소생술은 보호자들의 동의가 일치되지 않는 경우에 행해진다.
전공의 때였다. 심부전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80세 A 할아버지는 여러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며칠 동안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지 못한 자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환자는 생을 마감하려 했지만, 연명 치료 중단 동의서는 여전히 빈칸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환자의 심장은 멈췄다.
'내과 중환자실 8번 코드블루.'
원내에는 심정지 환자가 발생했음을 알리는 코드 블루 방송이 띄워졌다. 원내 내과 전공의 모두가 모여 심폐소생술이 시작되었다. 보호자들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환자의 심장은 의료진들에 의해 뛰어달라고 요청당했다. 보호자들의 의견이 모아질 때까지였다. 하나 둘 셋. 리드미컬했던 심장 마사지가 30분이 경과되었다. 심장을 뛰게 하기 위해서는 갈비뼈가 손상될 정도로 흉부를 압박해야 하지만, 축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침대 위의 환자가 안쓰러웠다. 다들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나'라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해외에 거주하는 자녀들의 동의가 이루어지기까지 심폐소생술은 계속되었다. 심폐 소생술이 시작된 지 1시간이 넘어서 환자의 심장은 멈출 수 있었다. 환자의 심장은 누구를 위해 뛰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환자가 받았던 심폐소생술은 가족들이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가는 길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흉부 마사지가 아닌, 그냥 마사지일 것이다. 그저 심장 뛰라고 강요받는 의료진의 손길이 아닌,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 말이다.
연명치료 중단에 동의합니다.
S 병원에 간 남편은 어머니에게 동의서의 의미를 설명했다. 앞으로 닥칠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겠다는 문서였다. 아직은 곁에서 숨을 쉬고 여전히 살아 있는 아버지가 이대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남편에게 연명치료 중단에 동의를 해야 함을 설명하면서도 속으로는 '아직은 아닐 거야.'라는 마음도 들었다. 어머니 역시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연명 치료 중단은 마지못해 한 동의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마음을 단단하게 먹었던 건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는 아버님을 위해서였다. 늘 참아왔던 아버님. 아버님의 인생 마지막까지 고통을 견디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모든 가족의 바람이기도 했다.
남편은 어머니와 함께 그 자리에서 서명을 했다. 함께 할 수 없었던 미국의 큰 아주버님, 작은 아주버님은 연명치료 중단에 동의하는 녹취록 파일을 첨부했다. 이로써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치료해 주지 말아 주세요.'라는 공식 문서가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