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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키드니 Apr 23. 2022

나는 이제야 가족이 되었다.

" 이 구두는 정말 편하게 신을 수 있을 거예요. 고객 10명 중 9명은 편하다고들 하세요." 


새로 산 구두였다. 편하다고 소문난 신발이었지만, 적응하기까지 발등이 붓고, 붉어지며, 때때로 발가락이 쿡쿡 쑤시곤 했다. 끝내 상처가 생기고, 터져버린 물집으로 밴드를 붙여야 했다. 


나의 결혼도 그랬다. 남편은 나에게 자신의 부모님을 소개하며, 분명 편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전혀 편하지 않았다. 그의 집 사람들은 엉덩이를 한번 붙이면 떨어질 줄 몰랐다. 모이기도 자주 모였다. 하루 종일 붙어서도 별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하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투닥거리기도 잘했다. 반면 친정집 가족들은 전화하기보다 문자로 대화하기를 선호했다. 급하거나 심각한 용건이 있어야만 수화기를 들었다. 어느 가족의 표현이 더 좋을 리 없었지만, 나는 내가 살아온 방식이 편했다. 자주 만나고, 틈만 나면 연락하고, 서로를 궁금해하는 시댁 식구들이 불편했다. 


가족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진다. 가족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를 알던 사람들이다.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먼저 나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에 대해 알고 있었고 나를 품었던 이들이 가족이다. 그런 점에서 가족이란 서로를 가장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일 것이다. 


가장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 가족이라 할 때 막내며느리인 나는 시댁 식구들 중 가장 늦게 합류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나도 그들에 대해 잘 몰랐다. 제도적으로 우리는 가족이었지만, 가족관계 증명서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어머니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홍삼으로 진즉 알아봤다. 신혼 시절, 어머니는 각기 다른 브랜드의 홍삼을 각각 1통 내밀었다. 오리지널 홍삼은 남편것이고, 비 오리지널이 내 몫이라고 했다. 농담이 섞인 말이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시댁 식구들 사이에서 며느리인 나는 언제나 비 오리지널이었다. 


가족이라면 괜찮아야 했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들이 많았다. 내가 출근하고 없는 집에 시부모님이 오신다고 하는 남편의 말에 나는 질색팔색 했다. 빨래통에 넣지 못하고 대충 벗어 놓인 옷과 땅바닥에 너부러진 수건이 떠올랐다. 화장실, 부엌 싱크대 상태를 확인하지 못하고 출근한 것이 후회되었다. 가족이었지만 함부로 집으로 초대하지 않았다. 편하지 않다는 이유로, 초대는 큰 마음먹을 때에만 하게 되었다. 초대하기 일주일 전부터 집안을 샅샅이 뒤져 먼지 하나, 머리카락 한올도 찾아냈다. 내가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 나의 흠을 찾아낼 것만 같았다. 


초대상을 위해 출퇴근 틈틈이 메뉴를 선정하고, 3일 전부터 갈비찜을 위한 밑 작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준비된 초대상은 늘 과했다. 음식의 가짓수, 양은 넘쳤다. 내가 차린 밥상이었지만, 나는 편하게 식사하지 못했다. 나의 음식에 대해 그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 마음만 졸였다. 

 여기에 추가로 LA 갈비를 준비했지만, 먹을 것이 많아서 굽지도 않았다. 아버님을 위한 마지막 식사였다. 그때는 몰랐다.

"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식사에 여러분의 명예를 걸 필요는 없다. (중략) 그것은 나를 식사 초대한 사람이 요리에 대해서 취하는 지나치게 과시적인 행동이다. 나는 그것을 주인이 다시는 자기를 귀찮게 하지 말아 달라는 아주 점잖고도 은근한 암시를 보낸 것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그런 곳에 다시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 데이비드 소로 <월든> 


월든의 저자 데이비드 소로가 간파했던 것처럼 시댁 식구를 위한 나의 밥상은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말아 달라는 은근한 암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맹세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상을 차린 것은 아니었다. 정말 아니다.  


어머니 대신 '시'어머니가 붙고, 아버지 대신 '시'아버지로 부르면서 나는 딱 그 시옷만큼의 거리를 지니고 있었다. 시옷이 만들어 내는 거리. 그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 줄 몰랐다. 


그 거리가 좁아지게 된 것은 아버님 때문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아버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시댁 식구가 유일했다. 나보다 더 많이, 더 오랫동안 아버님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버님을 떠나보낸 뒤의 슬픔을 위로해 줄 사람들은 그들뿐이었다. 아버님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서로가 필요했다. 나를 지배하고 있던 슬픔의 무게는 가족이 함께 함으로써 덜어졌다. 아버님이 이어준 소중한 인연. 가족들의 온기로 슬픔을 달랠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온 가족이 한데 뒤엉켜 쪽잠을 청했다. 장례식장의 음식을 함께 품평하며, 서로에게 식사를 권했다. 서로의 눈물을 보고 또다시 눈물이 흐르고, 코를 훌쩍이는 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시댁 식구들이 올 예정이었지만, 나는 청소하지 않았다. 출근하느라 나는 없었지만 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버님 없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성탄절에 온 가족이 모여 만두를 빚었다. 공휴일에도 출근해야 하는 나를 빼고. 내가 없는 우리 집에서 말이다. 한창 일하고 있는데 남편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교자상 위에 잔뜩 펼쳐진 만두, 만두소, 밀가루와 도마가 난잡하다. 다들 만두 만들기에 열심이었다. 사진 속에 나는 없었지만, 마치 그곳에는 만두 빚는 내가 있는 것 같았다. 


나의 퇴근을 기다려 모두가 한데 어울려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나는 여느 때와 달리 우리 집 음식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마음을 졸이지 않았다. 누가 구워도 맛있는 삼겹살. 서로가 맛있다를 연발하며 돼지고기를 품평했다. 이토록 편하게 시댁 식구와 식사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새로운 신발에 적응을 하는 데 시간이 걸리듯 나도 시댁 식구들과 편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해가 쨍하고 축축한 땀이 나는 여름을 견디고, 만물이 얼어붙는 겨울의 차가운 기운에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고 나서야 나에게 꼭 맞는 편한 신발이 된 것처럼. 힘든 시기를 함께 경험한 이유로 나는 이제야 그들의 가족이 된 것 같다. 여전히 나의 원 가족만큼 편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할 만큼의 사이는 아니지만, 내 마음속에 품었던 시옷 사이의 먼 거리가 조금은 줄어들게 되었다. 언젠가는 그 거리가 한 곳으로 좁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시옷은 결국 한 곳으로 좁혀지게 되어 있는 글자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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