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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와 의학의 만남 내과의사의 두 번째 진료실, 주방

by 닥터 키드니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 - 히포크라테스


환자의 습관과 식탁을 바꾸지 못한 나의 처방전

올해로 11년 차 내과 전문의가 되었다. 진료실에서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만성 콩팥병 환자들을 만나며 검사를 하고 약을 처방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흰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목에 걸고 진료실에 앉아있는 것이 의사의 모습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살고 있다. 하지만 종종 한계를 느끼곤 했다. 환자들은 내가 처방한 약을 먹었음에도 수치가 나빠졌고, 약의 종류와 개수가 추가되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고민이 늘었다. 처방전의 약 만으로 만성 질환을 치료하기에는 부족했다.


의사로서 환자에게 "이 약을 드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약이 진짜 환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 아니면 단지 증상을 일시적으로 가리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문제가 습관이라면 해결책도 습관이어야 한다.

내가 만나는 환자들의 공통된 문제는 나쁜 생활습관이었다. 움직이는 습관, 먹는 습관, 잠자는 습관, 스트레스 관리 습관 등이 문제였다. 문제가 습관이라면 해결책도 습관이어야 한다.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깨달음이 나를 변화시켰다. 변화는 나를 움직이게 했다.

작년에 습관 처방에 대한 전문적인 가이드를 배우기 위해 국제생활습관의학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시험공부를 하면서 내 믿음은 더 확실해졌다. 그중에서도 먹는 습관은 만성 질환 발병의 핵심이다. 환자들은 먹어야 할 것은 먹지 않고, 먹지 않아야 할 것들 위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환자들에게 약 처방보다 더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올바른 음식 선택이었다.


의학 교과서에서 찾을 수 없던 환자들의 질문들

환자들은 병의 기전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질문은 단순하고도 명확했다. "이 음식 먹어도 될까요? 어떤 음식이 좋은가요?"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학 교과서에서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식재료가 혈압을 낮추는지, 고지혈증에 도움이 되는 음식은 무엇인지, 혈당 조절에 도움이 되는 과일은 무엇인지, 어떤 조리법이 영양소를 가장 잘 보존하는지, 건강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의과대학 6년, 인턴, 전공의 과정 중 어디에서도 배운 적 없던 문제였다. 그래서 환자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따로 시간 내어 공부해야 했다. 마치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듯,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전공 교과서만큼 요리책을 자주 보게 되었고, 퇴근 후에는 주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환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주방에서 찾을 수 있었다.


주방에서 공부한 뒤에는 SNS에 글과 영상을 만들었다. 내가 알게 된 것들을 진료실에서 습관 처방의 한 일종으로 전달하자 환자들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약보다 강력했던 환자들의 식습관 변화

습관이 변하면 삶이 변한다.


고혈압으로 10년 넘게 약을 복용해 오던 50대 회사원은 1년간의 식습관 교정 끝에 혈압약을 완전히 중단할 수 있었다. 회사 구내식당에서 샐러드를 더 많이 담고, 회식 자리에서 물을 조금 더 마시는 등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습관을 조금씩 바꿔나간 결과였다. 그는 이제 약봉지가 아닌 장바구니로 건강을 관리한다.


40대 주부는 간식 종류만 바꿨을 뿐인데 당화혈색소가 2%나 감소했다. 과자와 빵 대신 견과류와 계절 과일로 간식을 바꾸고, 단 음료 대신 생수를 마시는 작은 변화였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혈당 수치를 과자가 아닌 자연이 만든 단맛으로 조절한다.


야식을 끊고 아침 식사 습관을 개선한 30대 여성은 10kg의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 저녁 늦게 배달음식을 시켜 먹던 습관 대신, 아침에 단백질과 채소가 풍부한 식사로 하루를 시작하는 패턴으로 바꾼 것이다. 그녀는 이제 저녁의 유혹이 아닌 아침의 에너지로 하루를 채운다.


환자들의 성공 사례는 "문제가 습관이면 해결책도 습관이어야 한다."라는 점을 증명해 주었다.

요리와 의학의 만남 요리 의학

요리 의학(Culinary Medicine)은 단순한 '건강식' 개념을 넘어선다. 식재료, 조리법, 의학을 융합한 것으로 질병 예방 및 치료에 과학적으로 기여하는 식사법을 기반으로 한다. 국내에는 아직 생소한 분야지만 미국 하버드와 스탠퍼드 대학에서 활성화되고 있으며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임상의와 대중에게 요리 의학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요리 의학은 즉각 적용할 수 있으며 실용적이다. 질병을 진단받은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암, 비만, 자가 면역 질환 환자들에게는 건강한 식습관으로 약물 치료를 돕고 합병증 발생 위험을 줄인다. 아직 질병을 진단받지 않은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질병을 예방하는 식사 습관을 전한다.


다음은 내가 공부하며 알게 된 10가지 원칙들이다.

요리 의학의 10가지 핵심 원칙


1. 자연식물식 우선의 원칙

" 가공할수록 영양은 줄어든다."


야근을 마치고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던 그는 매끼 편의점 식품과 배달음식으로 살아가던 그는 현대인의 표본이었다. 현대인의 식탁을 가득 채운 초가공식품(Ultra-processed foods)은 만성질환의 주요 원인이다. 초가공식품은 공장에서 고도로 가공된 식품을 말한다.


요리 의학에서는 오렌지주스보다 오렌지를, 양파즙보다 양파 자체를 권장한다. 녹색 채소, 콩류, 견과류, 씨앗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닌 약이다. 브로콜리와 양배추 같은 십자화과 채소의 항산화, 항염증 효과는 이미 수많은 연구에서 입증된 바 있다. 자연 그대로의 것이 가장 완벽한 형태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 아닌가. 자연 상태에 가까울수록 우리 몸은 본연의 기능을 회복한다.


2. 슈퍼 레시피 조리법

" 그냥 식품 VS 슈퍼 푸드, 한 끗차이는 조리방법이 결정한다"


같은 재료라도 조리법에 따라 그냥 식품이 될 수도, 슈퍼 푸드가 될 수도 있다. 토마토는 그냥 생으로 먹는 것보다 기름과 열에 가열해서 먹는 것이 영양성분을 더 잘 섭취하는 방법이다. 양배추는 겨자와 만나면 항암 성분이 더 높아진다. 같은 식품이라도 조리법에 따라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천차만별이다.


3. 긍정적 식이 패턴의 원칙

"금지보다 권장에 집중하라"


"이것은 먹지 마세요"라는 부정적 메시지보다 "이것을 더 많이 드세요"라는 긍정적 메시지가 행동 변화에 더 효과적이다. 얼마 전에는 진료실에서 매일 먹어야 하는 10가지 음식을 알려드렸더니,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르다며 기분 좋다고 하셨다.


금지된 음식 목록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반면 '먹어도 좋은 음식' 목록은 선택의 자유와 즐거움을 준다. 음식에 대해 공포감을 조장하는 것보다 선택 가능한 다양한 건강식을 소개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식습관 변화를 이끈다. 우리의 뇌는 '하지 마'보다 '이렇게 해'라는 메시지에 더 잘 반응한다. 식탁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4. 다양성 확보의 원칙

"장내 미생물의 다양성은 식재료의 다양성에서 시작된다"


봄날의 정원처럼, 우리의 장 내 환경도 다양성이 풍요로움을 만든다. 다양한 음식은 서로의 보완하며 시너지를 낸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다양한 식물성 식품을 먹을수록 장내 미생물의 다양성이 증가하고, 이는 면역력과 대사 건강에 직결된다.


장내 미생물이 다양할수록 면역체계는 강화되고, 염증은 감소하며, 기분도 개선된다. 매주 30종 이상의 다른 식물성 식품 먹기에 도전해 보자. 채소, 과일, 견과류, 콩류, 통곡물, 허브, 향신료를 모두 포함하면 생각보다 쉽게 달성할 수 있다. 우리 몸 안의 생태계도 다양성이 건강을 지킨다. 식탁의 색깔이 다양할수록 몸 안의 환경도 풍요로워진다.


5. 정량적 음식 처방

"약처방처럼 음식도 정확한 용량이 중요하다"


"적당히 드세요"라는 말은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약을 처방할 때 용량과 복용법을 명확히 하듯, 음식 역시 얼마나, 얼마나 자주 먹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지침이 필요하다. 녹색 잎채소는 하루에 양손 가득, 브로콜리와 양배추와 같은 십자화과 채소는 하루 한 줌, 견과류 하루 한 줌이다. 섭취 횟수와 용량을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음식 처방전이 필요하다.


의사의 처방전이 약물의 정확한 용량을 알려주듯, 의사도 식품의 정확한 용량을 알려줘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처방'이다.


6. 총체적 식사 패턴의 원칙

"단일 식품이 아닌 식사 패턴이 건강을 결정한다"


어느 날 한 환자가 공복 중에 올리브 오일을 먹는다고 했다. 그렇게 먹는 것이 몸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다. 그렇게 먹는 것이 즐겁냐고 하니 그렇지 않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단일 슈퍼푸드가 아닌 전체적인 식사 패턴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지중해식 식단이 효과적인 이유는 올리브오일 하나 때문이 아닌, 다양한 식재료와 식사 방식의 조합 덕분이다. 한 가지 색으로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없듯, 한 가지 식품으로는 건강한 몸을 만들 수 없다. 다양한 색의 조화가 필요하다. 한국의 전통 식단은 나물, 장류, 김치 등 발효식품, 다양한 해산물로 구성된 건강한 식사 패턴이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 최적의 '한국형 지중해식 식단'이 된다.


7. 접근성과 지속가능성의 원칙

"지속할 수 없는 식습관은 효과가 없다"


건강에 최고로 좋다는 식품이라도 구하기 어렵거나, 준비가 복잡하거나, 비용이 부담된다면 지속하기 어렵다. 접근성, 조리 용이성, 경제성, 라이프 스타일을 고려한 식습관 처방이 핵심이다.


1인 가구 환자들에게는 매일 신선한 야채를 손질해 먹기를 권하는 대신, 냉동 채소와 과일을 추천한다. 냉동 채소와 과일은 신선한 것보다 영양가가 떨어지지 않으면서 보관이 쉽고 경제적이다. 바쁜 직장인 환자들에게는 주말에 일괄 조리해 냉장 보관하는 '밀 프렙(Meal Prep)' 방식도 추천한다. 이는 시간을 절약하면서도 건강한 식사를 유지할 수 있는 실용적인 방법이다.


가장 좋은 식습관은 지속할 수 있는 식습관이다. 완벽하지만 실천 불가능한 방법보다, 조금 부족해도 꾸준히 할 수 있는 방법이 언제나 낫다.


8. 문화적 맥락 존중의 원칙

"식문화는 건강의 중요한 요소다"


흔히 볼 수 있는 친정 엄마의 소박한 반찬에서 나는, 서양의 슈퍼푸드보다 더 강력한 건강식 조합을 발견하곤 한다. 브로콜리 두부 무침은 데친 브로콜리와 고소한 두부를 함께 무쳐 만든다. 이런 반찬은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조합이지만, 그 효과는 슈포 푸드 못지않다. 독특한 각 문화권의 전통 식단에는 그 지역의 건강 지혜가 담겨 있다. 건강에 좋다는 특정 식단을 무조건 따르기보다 우리의 생활권 내, 자국의 전통 식문화에서 건강한 요소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9. 개인맞춤형 접근의 원칙

"같은 음식도 개인에 따라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


유전적 차이, 장내 미생물 구성, 기저질환 등에 따라 동일한 음식이라도 개인마다 반응이 다르다. 모두에게 같은 획일적 권고가 아닌 개인화된 접근이 필요하다.


한 예로, 만성 신부전 환자에게는 칼륨이 많은 과일은 껍질을 제거하고 섭취하도록 권장한다. 반면 당뇨 환자는 껍질에 식이 섬유가 많아 혈당을 조절하는 데 아주 귀한 성분이므로 껍질째 먹는 것이 좋다. 또한 고혈압 환자에게는 칼륨이 풍부한 바나나, 감자의 적극적 섭취를 권장한다.


우리는 모두 다른 DNA를 가지고 있듯, 각자의 몸에 맞는 식단도 다르다. 어떤 옷이 모든 사람에게 맞지 않듯, 어떤 식단도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지 않다.


10. 즐거움과 커뮤니티의 원칙

"음식은 영양소의 합 이상이다"


식사는 단순한 영양 공급을 넘어 즐거움과 사회적 연결을 제공한다. 음식을 공유하고, 함께 요리하고, 식사하는 것은 정신적, 사회적 건강에도 기여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하는 식사는 고독한 식사보다 영양 상태가 개선되고, 우울증 위험이 감소한다고 한다. '누구와 먹느냐'도 '무엇을 먹느냐' 못지않게 중요하다.


즐거움을 잃은 건강식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건강이 목적이라면, 그 과정도 즐거워야 한다. 가족, 친구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은 단순한 영양 섭취를 넘어선 치유의 시간이다.


나의 두 번째 진료실 주방

진료실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청진기 두르고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의사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제 앞치마 두르고 프라이팬을 잡고 양배추와 씨름하며 카메라 앞에 선다. 그렇게 우리 집 주방이 나의 두 번째 진료실이 되었다.


요리 의학은 "문제가 습관이면 해결책도 습관이어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진리를 바탕으로 한다. 식탁에서 시작되는 작은 변화가 건강에 큰 차이를 만든다. 때로는 처방전 한 장보다 요리 한 끼가 더 강력한 효과를 가져온다. 약은 증상을 조절하지만, 올바른 식습관은 원인을 해결한다. 의사로서 나는 이제 지속 가능한 건강을 찾는 마음으로 나의 두 번째 진료실인 주방에 선다.


그렇게 나의 진료실은 하얀 가운과 청진기의 공간을 넘어, 앞치마와 요리 도구의 세계로 확장되었다.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어쩌면 우리 곁에 있는지도 모른다. 환자와 의사가 그렇게 고민하던 문제의 정답은 의학 교과서가 아닌 매일 마주하는 식탁에 있다.


https://youtube.com/shorts/KI9puPK5Ugg?si=cufmKz_13aptEwQ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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