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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키드니 Feb 22. 2021

의사면, 공부 잘했겠네요.

열심히 하긴 했어요, 그런데요. 

"의사면, 공부 잘했겠네요."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네. 열심히 하긴 했어요."라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다. 괜한 겸손이 아니다. 


'모든 완전한 것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묻지 않는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현재의 모습만을 보고 과거를 단정 짓곤 한다. 완전한 것들이 밟았던 그 과정도 쉽지 않았을 텐데. 나는 완전이라는 단어를 올리기에 한참 부족하다. '완전하지 못한 나'이기에,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많은 헛발질이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열심히 했는지 한 번쯤은 말하고 싶었다. 쌀로 밥 짓는 뻔한 이야기로 들릴 법 하지만, 한 번은 해야겠다. 


내게 그 시작은 공부가 될 수밖에 없다.    


(출간 준비중입니다.)


"밤이 늦었다. 그만 하고 자거라."  


이번에는 엄마다. 또래들이 흔히 듣는 공부하라는 잔소리는커녕, 엄마는 내게 그만하라고 한다. 시간이 몇 시인지 알리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딸에 대한 대견함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많다. 하지만 나는 침대에 몸을 뉘일 수가 없다. 되지도 않는 머리로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방법이 없었다. 이 밤의 끝을 붙잡고 늘어질 수밖에.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어느덧 창밖의 어두움은 바뀌고 있다. '진짜 이것까지만.' 내 볼멘소리는 푸르른 새벽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재능이 없었다. 내게 공부는 결코 신나고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공부 너도 그렇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 나는 오래 보아야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으레 중간고사, 기말고사 일정부터 살폈다. 그리고 그때부터 생각했다. 내가 이 시험을 준비하는데 오랜 시간을 확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정을 조절했다. 그리고 남들보다 일찍 시작했다. 당신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 그것보다 월등히 먼저. 많은 시간을 확보하고도 시간은 부족했다. 남들보다 먼저 시작했음에도 시간은 더 필요했다. 오랜 시간을 공부했음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나는 이따금씩 교과서 아래를 살폈다. 책 두께의 더럽혀진 선이 어디까지인가 확인하는 버릇이다. 그 두께가 회색빛으로 변할 때까지 보고 또 봤다.     


1만 시간의 재발견에서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 비범한 능력을 개발한 사람은 없다.'라고 했다. 내가 해야 하는 모든 것에 내가 가진 시간 대부분을 투자했다.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나는 비범하지 못했다. 내가 했던 노력에 비하면 분명 한참 부족한 성적이었다. 가끔씩 드러나는 실망스러운 결과에도 나를 꾸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이런 나를 보며 다들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이렇게 평가한다. '무엇을 하든 무던히도 애쓰는 안타까운 인간' 나 스스로에게 내린 평가와 일치한다. 변명도 자책도 하지 않았다. 시간을 다시 돌이켜도 이보다 더한 그 어떤 노력은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가끔 시험 보는 꿈을 꾼다. 그 꿈에서 나는 미처 다 준비하지 못했다. 시간은 부족했고, 마지막까지 손에서 교과서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악몽이다. 꿈이라서 다행이라고 느끼며 꿈에서 깨곤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나는 늘 시간이 부족했다. 내가 꾼 꿈이 꿈이었는지, 과거의 내 모습인지 헷갈린 적도 여러 번이다.  


의사면, 공부 잘했겠네요 라는 물음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바로 이거다. 


"네, 그때 제가 가진 시간의 대부분을 공부하는데 썼습니다. 공부했던 기억밖에 없네요. 그러고도 지방에 있는 의대에 갔고요. 그게 제가 한 최선이라서 후회는 없습니다."



'살면서 성실하게 노력한 만큼 공정하게 돌려받은 경험이라고는 몸을 쓰는 일밖에 없었다'라는 작가 허지웅의 말처럼. 내가 살면서 그나마 공정하게 돌려받은 유일한 것은 공부였다. 공부야말로 내게 몸 쓰는 일이었다.  


나는 머리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분명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뒤돌아서면 헷갈리기 시작했다. 눈도 믿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내 두 눈으로 멀쩡히 봤던 것도, 눈 한번 껌뻑하고 감으면 깜쪽같이 사라지곤 했다. 머리와 눈은 믿을 수 없었지만, 손은 믿을만했다. 눈으로 보지 않고 손으로 완벽하게 쓸 수 있을 때까지 쓰고 또 썼다.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손은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손이 기억할 때까지 쓰고 또 썼으니까.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라는 수능 만점자들의 뻔한 대답처럼 나 역시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 하지만 내 교과서는 남들과 달랐다. 검은색 글씨에 빨강, 파랑, 초록색 펜과 화려한 형광펜으로 나만의 교과서를 새로 만들었다. 색색의 펜으로 손의 지루함을 달래고, 자꾸만 잊어버리는 눈에게도 자극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몸을 쓰며 공부한 건, 결국 집중력을 높이게 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공부하기 위해 나는 내 몸과 싸워야 했다. 자꾸만 들썩 거리는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외워질 때까지 손으로 반복하여 썼다. 손의 기억을 돕기 위해 입이 마를 때까지 소리를 내며 읽었다. 그리고 자꾸만 내려오는 무거운 눈꺼풀을 이겨야 했다. 


의사면 공부 잘했겠네요, 라는 물음에 두 번째 대답은. "네, 저는 제 몸과 싸웠어요." 이렇게 몸을 쓰며 공부한 증거는 아직까지 남아있다. 오른쪽 세 번째 검지 손가락은 굳은살, 오른 손목의 결절종, 그리고 유난히 앞으로 튀어나온 내 오른 어깨. 이런 내 신체 기형은 내가 내 몸과 싸운 증거다.        



'친구 M이 내 말을 듣고, 기분 상하지 않았을까?' 하굣길에 있었던 친구와의 대화를 곱씹는다. 저녁 내내 책상에 앉아 이 생각에 빠져 있다. 책상에 앉아 있지만, 공부하지 않고 있었다. 몸은 책상에 있지만, 마음은 그 친구에게로 갔다. 언제나 제 멋대로인 마음은 내 책상을 떠나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몸의 본능을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오늘은 영 공부할 기분이 아니다.  


친구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감정이 흔들리는 상태에서 나는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신경 쓰이고 불편한 기분으로 공부가 될 리 없었다. 친구에게 언제나 먼저 손 내밀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애초에 그런 여지를 만들지도 않았다. 언제나 예스 걸, 착한 아이로 살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화려한 내 수제 교과서를 원했다. 거기엔 수업시간에 적어두었던 시험에 나올만한 것들이 다 들어 있었다. 기꺼이 빌려주었다. 그건 그들을 위한 선의가 아니었다. 언제나 제멋대로인 내 마음, 기분을 위해서였다. 친구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말에 더 귀 기울이고, 친구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또박또박 적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마음을 평안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작은 것에도 쉽게 요동치는 가벼운 사람이었다. 사소한 것들을 무시할 만큼 심지가 굳지 못했다. 하지만 공부에 집중하고 싶었다. 내 기분을 휘젓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야 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기분을 선택하고 싶었다. 착한 아이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철저하게 계획된 일이었다. 


이것이 의사면, 공부 잘했겠네요 라는 질문의 마지막 대답이다. 



나는 공부 잘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타고나길 잘나지 않았기에 나를 이기려는 수많은 본능과 싸워야 했다. 내가 가진 모든 시간을 모두 쏟아 공부와 친해지려고 했다. 작은 것에도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었기에 주변의 모든 것들을 평화롭게 만들어야 했다. 이기적인 본능을 누르고 이타적인 인간이 되어야 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었다. 쉴 틈 없이 이 모든 걸 매일 거듭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리 거듭해도 비범함 같은 건 영영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제 했던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매일 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지금까지 매일 매 순간 철저했던 노력의 산물이다. 한순간 긴장 풀고 쉽게 살아갈 수 없는 이유다.


어설픈 이 글도 지금 다섯 번째 고치고 있는 중이다. 이 글을 앞으로 몇 번을 더 고쳐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마 수십 번은 더 고쳐야 되고,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후회는 없다. 그동안의 내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애쓰며 살아냈지만, 최고의 결과를 내지 못해 늘 아쉬운 인생. 이게 바로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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