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언어 1화에서 10화까지
지나고 보면 "나는 참 잘 견뎌왔다"며 어느 석양을 보는
영화 속 한 장면은 우리의 인생과는 많이 다르다.
자못 그러하지 않은가?
석탄 실은 완행열차가 기찻굴을 통과하고 난 후에
지금은 타고 보기도 힘든 비둘기호나 통일호를
타고 저 굴을 이어 지나오면, 그러고 나선,
창문을 시원하게 열고
"아 내가 저기를 지나온 것이구나"라고 말함이
오히려 인생에 대한 제대로 된 말함이 아닐까?
초역 채근담의 삶의 언어를 연재하며
그 글의 1화에서 10화까지 쓰고 난 후
그저 멈추어 서서 한번 돌아보며 쓱 이 책의
제목만 둘러보아도, 이게 삶인지 언어인지
사람인지 인생인지 간에 따지고 보면
나도 모르게 헛디뎌 굴러서 여기 어름에
멈추었을 때 그냥 이게 인생이라고 하는
정도의 느낌의 덩어리로 받아질 뿐이었다.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말하려 그게
삶에서 말하는 본연, 소박하고 우직하게
산다는 의지의 표현, 진짜 고수는 책략을
쉽사리 쓰지 않는다는 신념, 쓰디쓴 충고
일수록 받아들이고 말리라는 조언 등등까지
우리는 밀려온 바다의 그 모래사장에서
빈 소라껍데기에 귀를 대고 심해의 소리를
들어봄처럼 그저 지나고 와서 보니
그렇게 인생이 갔고 가고 있음을 느낀다고
해야 하겠다.
단지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생각 없이 돌아다니지는
않을 값에 조금 더 인생의 방향이 맞는지 둘러보고
내 속도가 맞는지 신발도 내려보면서 움직이기
위해서 우리는 이 초역 채근담의 삶의 언어에서
한 자락 같이 앉았다 일어나는 모양새라 해야 하겠다.
하동시장 장마당에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내려가고 누군가는
양산과 김해를 지나 부산으로 가듯이
우리는 단지 어떤 즈음에서 어떤 말들과 잠시 잠깐
앉았다가 각기 자신의 방향대로 걸어가는
노마드 아니던가?
그 삶의 언어가 채근담의 고아한 한마디였듯
누군가 삿된 자의 욕설이라고 할지라도 딴에는
내가 배움이 있고 얻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지나옴을 당하고 나서 보니 세상을
입때껏 살아가게 된 것이고
또한 내세 울 것 없이 비루하게 살아온 듯해도
어제 죽은 사람이 천금이고 억만금을 주고선
살아 보들 못하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아까워한
그날이 바로 오늘 아니던가?
어떤 종교의 어떤 신에 일러서는 나를 욕하는 자의
말에 답하지 않으면 마치 메아리에 대고 개의 새끼이고
소의 새끼를 이야기할 때 메아리가 재우쳐 다시
말 뱉은 자의 귀로 들어가게 한다고 함을 떠올려보자.
거기에서도, 그 경전에서도 배움이 있으며,
그 욕한자는 필시 듣는 자가 모욕감으로 속상해하라
하건만, 대답하여 다투지 않음으로 메아리로 욕한자의
귀에 가 닿으니 그의 욕 한마디에서도 인생에서
생각할 바, 느낄 바는 있는 것이라 하겠다.
혹여 혹자가 그 욕을 듣고 댓거리라도 하면 그럼 결국
내가 진 게임이오? 물으려고 굳이 그 궁금증을 참지
못한다고 한다면, 필자가 생각기로는
"돼지목에 진주목걸이가 어울리던가요?"
동문서답이라도 하고 싶은 바, 그것은,
"돼지가 꿀꿀 거리는 것은 그의 할 바이요. 그가 가진
돈이나 위세나 권력이나 타인의 부러움을 얻을
무엇인가가 있어도 돼지 소리는 돼지 소리요
만물의 영장이 관여하여 같이 댓거리를 할바가 아니요
인간 아닌 자가 진주목걸이를 걸고 있음에 그게 그리
부럽더이까?"라고 필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필자는 이 초역 채근담 삶의 언어 연재를 쭉 읽어오며
스스로 역시 다 이해되고 다 기꺼운 말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완연히 껍데기만
있는 사람도 아니요 그렇다고 어느 대단한 선각자가
된 것마냥 생각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 글을 읽고 그
글의 값을 충분히 할 량이면 내가 골자에서 무엇을 얻고
내가 행간에서 무엇을 더 읽더면 이 유한한 내 인생이
값있게 쓰이고 그 초역 채근담의 책값이 허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뿐이었다. 하긴, 딴에는, 이런
생각도 사치이기는 했다. 그 시간에 이왕 읽은 책이고
잡은 페이지 속에 오직 몰입했던 것뿐이라고 해야겠다.
삶이란 모름지기 예전 선인들의 말마따나
'가고 아니 옴'이다.
그러고 보면 초역 채근담의 모든 삶의 언어가
맞았던 안 맞았던 뭐가 중요하고, 내가 거기서 무얼
느끼고 무엇은 아니라고 봤는지가 뭐가 중할까?
단지 유한한 인생에 굳이 의미를 두고, 그 순간이
잘라서 보면 억겁의 무한한 순간이었고 긴 광년의
세계에서는 티끌과 먼지이긴 하건만 내게는 그게
같이 있고 같이 앉았다는 실존이 무엇보다 중한
1번이요 거기에 내가 의미를 찾아봄이 2번이
아니었나 싶다.
우린 그렇게 거기 잠시 같이 앉았다.
오늘 독자께서 일어나시어 벤치 한 번에
앉아보시고, 이 차가운 겨울에 온돌로 데워놓은
공중버스정류장의 돌벤치에 앉아보면 어떠하던가?
굳이 심히 생각기로는 여기에 앉은 사람 중
이 세상 사람이 없을 수도 있건만 그 온돌에
나는 앉았고 따끈한 게 실로 감사치 않은가?
그렇게 잠시 서로 그 어느 장마당에 같이 앉았던
것처럼, 그 어느 순간에 초역 채근담의 삶의 언어가
나와 같이 앉았다 일어났다는 것이 나는 중요했다.
"실로 따분하니 이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저기 2만 원을 주고 산 책이 나를 한번
감동시키면 얼마나 좋으냐? 이 저자는
남의 돈 2만 원 먹은 만큼 얼마나 잘 썼나
이 몸이 한번 보실까?"
하는 분이 있다면, 순간에, 또 찰나에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그 시간을 금처럼
쓰며 행간에서 좋은 것을 찾고 골자에서
감정을 득하려 노력하는 사람을 과연 이길수
있을까?
오늘 이 순간도 지고, 오늘 하루도 지고, 내일도
지면 어느 순간 그는 지고 싶지 아니하나 반드시
그 순간에 집중인 자에 인생전체를 모았을 때
필시 지고야 말지 않겠는가?
설혹 개떡 같은 논리나 궤변을 듣고 내 시간이
아까워 욕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좋든 싫든
그 안에서, 가진 것 안에서 좋은 것을 찾아보자는
말을 필자는 하고 싶은 것이다.
아마도 짚신장수 아들과 우산장수 아들의 장단점을
알고 오늘은 짚신이 팔려서 좋고 내일은 우산이
팔려서 좋다고 생각한 그 어머니는 임금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정사를 다 잘 볼 수는 없어도 적어도
타국에 외교전을 펼치며 통상에서 수출을 곧잘
하였으리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자 이제 다시 필자는 이제 다음 연재, 시리즈에
가기 전에 한번 쓰윽 열개의 초역 채근담 글과
필자가 적은 이 브런치의 열개 글을 번갈아 한번
본다.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맙다.
우리는 그 순간 같이 어느 장터 마당에 같이
앉았던 순간만큼은 서로 알고 있는 동지 아니던가?
삶의 언어로 어떤 말을 하건 또 들었건 간에
각자 자기 삶 살기도 바쁜 와중에 내가 가장
소중한 나의 순간을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누가 굳이 일러 타인의
시간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축복해 줄텐가.
그리 개안하듯 순간순간 긍정과 희망과 낙천으로
인생을 살아감을 생각해 본다.
이미 이쯤 되면 초역 삶의 언어 1화에서 10화까지
무엇인지는 다 잊어버렸다.
다 잊어버림에도 마음이 보름달처럼 충만하고
다 놓아버림에도 마음이 그믐달의 흑색처럼 까아만 한
고요 속에 놓여있으니 참으로 고맙고 기껍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