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7화 초역 채근담 삶의 언어
초역 채근담 일곱 번째에 이르니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 나가려면
시대의 흐름을 읽고 상대를 분별하여 행동하라 하고
평화롭고 안정된 시대에 자신의 신념과 의지대로
일관되게 살고
규칙과 질서가 다소 흐트러지면 유연하게 살아가고
규칙과 질서가 종래 무너진 시대면
의지와 신념에 유연성을 겸하여 양방향을 균형 있게
오가라고 한다.
이어 이르되,
선인에겐 관대하고 악인에게 엄격하며
평범자에게는 관용과 엄격한 두 가지를 모두
병행하라고 말한다.
길이 30센티미터짜리 철자를 가지고
세상밖으로 나아가 저 사람의 심중은 어느 깊이며
나쁜 쪽으로 얼마나 멀리 간지 그 자를 대어 알고
저 세상은 얼마나 좋은 곳인지 들고나간 철자를
대어 그 좋음이 몇 센티미터 플러스로 가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고
그런 사람들로 모여진 세상에서 세상의 난리법석을
알고, 사람의 선악을 안다면 우리는 참으로 살기가
좋은 시대를 타고났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저 '분별'이란 무엇인가?
구분하여, 나누어 내어 자리를 매길 수 있음을 이야기
하는 바, 우리는 구분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거기에서
"이것은 악한 방향으로 5보 들어가시오"
"저것은 착한 방향으로 십이 보를 갔다가 동쪽으로 이보
뒤로 물러서시오"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참으로 쉽지가 않은 것이다.
삼천갑자 동방삭인들 그 수백수천 번 죽고 살고를
해본들 이용당하지 않으며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행복을 영위하는 인생이 과연 몇 프로나
될 것인가.
그러매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괴테는 일찍이 "즐거운 것에 이르러 즐거움의 진득한
맛을 어찌 알리요? 고뇌에 빠져야 즐거움의 제대로 된
맛을 알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입맛을 다지며
고뇌의 시간 속을 걸으며 즐거움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안에 있다. 기다림은 즐겁다"라고 하였거니와,
필자 역시 그렇게 생각을 한다.
조직행동학에서 나오는 '쓰레기통이론'처럼
잠시 같이 머물렀던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기준과 신념으로
잣대를 삼아 타인을 구분하여 선악으로 구별하여 놓다 보면
틀린 경우도 있고 맞는 경우도 있고, 또 틀린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러 갔더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경우도 있고 또한 나 자신만에 이르러서도 내가
선인이건 악인이건 간에 억울할 때도 있고 횡재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반경 10km에 분뇨를 엎은 차가 있다면
내가 수만 명을 죽이는 권세를 지닌 진시황이라도 그 분뇨냄새
를 아니 맡으려 숨을 참다 죽느니 어쩔 수 없이 그 콧구멍으로
분뇨냄새 꽉 들이참과 같다.
필자는 그리하여 바람을 탄다고 누차 말하는바,
인간은 갈대의 신세처럼 들풀로 살아가며
착하게 살았지만 이른 서리에 얼어 죽기도 하고
나는 동쪽으로 눕고 싶지만 서쪽으로 바람이 불면
그제 같이 눕는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의지와 신념이 있어야 인생이 재미진 것이고
내가 잘못된 판단을 할지언정 사람과 세상을 나의
들고 있는 잣대로 선하고 악하고 좋고 모질고를
나누는 것이 아무것도 없이 뇌를 비움보다는 맞다는
것이 지극히 맞다.
우리는 오직 최선을 다하여 갖고 있는 땅 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풀이다.
고대광실 같은 곳에서 온실 속에 태어난 화초를
재벌 3세 재벌 4세 구경하듯이 부러워하고
왜 소나기가 내 잎만 때리느냐 고민해 봤자
이 겨울에 눈 내리고 영하 10도 한번 찍으면
죄다 죽어 없어질 시간 속에 살아감이 있는 것
아닐까?
머리 틀어쥐고 걱정해도 한 세상이고,
가진 것 안에서 열심히 살아도 한 세상이다.
영화 '인생은 즐거워'처럼
노동요 한 자락 부르면서 일도 하고
시간에게 주도권을 뺏기지 않게
먼저 생각하고 먼저 행동하고 현실에
몰입하고 그 행간에서 고아하고 즐거운
재미짐을 찾는 것이 진정한 인생을
사는 길이다.
가진 척도로 저놈도 얼추 재어보고 가진 자를
들고 저 세상에도 얼추 맞혀보면서 그렇게
노력해 갈 뿐이다. 현실에 열중하고 지금에
집중하며 이 순간에 몰입한다는 것이 바로
이러함이다.
그럼에 삿된 자에게 홀려서 미혹될 시간도 없고
나쁜 시대에 흐리멍덩하게 있다가 비명횡사됨도
없어야 진정하게 내 삶을 주인으로 살고
정말 좋은 자에게 내 금 같은 시간을 투자하고
정말 아수라판의 세상에서도 빛이 내리쬐는 한켠의
세상에서 노닐 수 있는 자유가 생겨나는 것이다.
두 눈을 감고 인도의 정신적 성숙에서 피어난다는
제3의 눈 챠크라를 상상해 보자.
미간에서 제3의 깨달음의 눈이 떠오르듯
시각에 미혹되는 양 눈을 감고 명상을 해보자
무엇이 보이던가.
이번 7탄에서는 찰나에 깨달음을 얻고
순간에 사람이 환골탈태하듯 바뀌어봄을 생각해 보자.
그러고 눈떠 이 초역 채근담의 연재 일곱 번째
시대에 사람에 알맞게 처신하라를 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필자는 식민지 지식인의 비애로 그 파아란 녹이 낀 구리거울을
닦아 내 맘과 눈을 닦아서 깨끗하게 보려고 했던 윤동주 시인을
언뜻
생각해 내었다.
분별, 평화, 안정, 의지, 신념, 선인, 규칙, 질서, 유연성, 관용
그리고 엄격함 등을 이어 생각해 본다.
시대와 불특정 다수에 끼어 걸맞을 나는 어떤 인간 또
어떤 세상에 부응하고 협력하는 인간향인가?
좋은 시대와 좋은 사람이 많기를 갈망하는 바
나는 그 시대에 1그람도 무게를 던져주는 사람이던가?
필자는 그리 제쳐 또 한 번 초역 채근담의 일곱 번째 글
시대와 사람에 알맞게 처신하라를 또또 한번 본다.
왠지 오늘도 초역 채근담 일곱 번째를 보았건만 어제처럼
글을 읽고 말을 기억하지 못한 듯도 보인다.
필자는 윤동주 시인이 파아란 녹이 낀 구리거울을
닦듯이 "너는 너의 거울을 닦고 있는가"에
불현듯
더욱 생각이 꽂히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후 네시가 다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