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8화 초역 채근담의 삶의 언어
초역 채근담의 여덟 번째 글은 말한다.
인덕으로 얻는 재산이나 명예는 들꽃과 같아서
저절로 가지를 뻗고 무성히 잎이 돋아 잘 자라나
업적으로 얻은 재산이나 명예는 화분 속 꽃과 같아
불현듯 옮겨지거나 버려질지 몰라 불안정하니
이처럼 권력으로 얻은 재산이나 명예는
뿌리가 없어서 며칠이면 시들어 버리는
꽃병 속의 꽃처럼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다 고 말한다.
무릇
사람이나 화초나 들풀이나 모두 햇빛을 보고
위로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곳이 욕구인지 순수한 의지의 발로 이든 간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꼼지락 거리며 성장하고
발전하려 함이 있다.
하다 못해 생의 의지가 없는 인간이라고 쳐도
숨을 단 3분만 못 쉬어도 사망에 이름에
코와 입으로 부단히 들숨과 날숨을 내쉬지 않던가?
이처럼
사람의 생의 의지라고 할 것은 그가 단지 소파에
누워만 있고 쥐 죽은 듯 벌러덩 침대에 엎드려 있다손
하등의 살아감의 의지가 없다고 미루어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 하루의 햇살을 받고, 하루를 보내고
해와 가깝기 위해 성장하고 생장하는 모습은
인간과 화초와 들풀이 전연 다르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덕 있는 것을 이 초역 채근담의 여덟 번째
이야기는 마치 영원한 생명수처럼 이야기를 하거니와
덕 이란 무엇인가?
은일자중하면 덕이 있던가? 아니면 보아서 예쁘고 멋있으면
덕이 있던가? 그것도 아니더면 사람들의 존경과 박수를
받을 정도가 있어야 덕이 있다고 할 텐가?
덕을 어떻게 규정짓고 명명하는 것과는 별개로 덕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 빛을 내는 반딧불이와 같다 하겠다.
태양의 빛을 받아 커다란 달이 뒷산 위로 두둥실
떠오르기는 하건만, 각도가 맞지 않고 때가 맞지 않아
그믐달로 떠오를 때는 우리는 달빛은 그날밤 안으로
보지를 못하나 연약하고 미약하기도 한 반딧불이의
궁둥이에서 빛나는 빛은 온전하게 보고 즐길 수가 있다.
인덕을 남들이 본다 함이 마치 이 반딧불이와
딱 똑같은 데칼코마니이다.
그렇게 덕 있음은 자립이요 스스로의 노력이요
부단히 움직여 타인에게 보여줌이 있고 타인의
마음에 열정이랄지 감화라고 할지를 줌이 있으니
이 정도면 넉넉하게 우리는 덕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덕 있음으로 인해 결과물로 생겨나는 재산이나
명예는 자연히 더욱더 풍성해지게 마련이다.
이미 자신이 만들어 보았고, 어떻게 운용할지를
알고 있으며 지금껏 그랬고 어제도 그리하였듯
오늘도 스스로 운용함이 그치질 않으니 일면
덕이 여여하고 그침이 없다면 그 재산이나 명예
등등의 성세도 장강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흐르리라
생각해 봄이 마땅하지 아니할까?
그런 점에서 덕 있는 자의 모양새와 반딧불이의
궁둥이와 들꽃의 모습은 하나로서 일러 데칼코마니라
해야겠다. 허나 화분 속 꽃은 어떠하던가.
그 뿌리는 이미 뜬 구름과 같은 형국이며, 정해진
화분의 틀 안에서만 있어 왔으며 생장이 멈추었으니
화분을 누가 깨고 종국에 그 흙이 산산이 흩뜨려 지면
비가 오는 날을 기다리지 않으면 필시 햇볕에 노출된
뿌리가 말라 그 꽃의 생을 마감하고 됨이 결과일 것이다.
업적이나 권력으로 얻은 바를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다.
아무리 대단한 대제국을 건설한 장수나 임금이 있다고 해도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면 한 장의 페이지를 역사서에 차지했
다고 하더라도 역사가 쌓이는 한, 점점 그 페이지의 할애가
줄어들어 끝에는 이름 석자만 남기게 된다.
허나 인덕이 있는 자의 향기는 만리도 가고 세대를 넘나
들어 흐름이 끊이지 않으니 그의 이름은 오히려 역사서에
있는 비중보다 사람의 입길에 오르내리며 후손에게 칭송
받음이 있으니 그 명예나 인복이 끝이 없고 더욱 성세라고
해야 하겠다.
자신의 업적으로 얻음도 이와 같을진대, 타인의 권력에
아부하여 얻은 재산이나 명예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른바 모래 위에 큰 성을 지음과 같고, 을사오적이나
민족의 반역자로 역사서에 치욕적인 이름을 남기는 자와
진배없으니 참으로 그 값싼 재산이나 명예를 위한 그의
조그마한 아부나 수고로움도 더더욱 값없게 날림만
있다고 해야 하겠다.
문득 남에게 손톱만큼도 도움 되는 인생을 사는 것이
무엇이던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업적은 자신을 위해, 그리고 권력을 얻기 위한 아첨과
뇌물은 어떤 사람들에게 소용됨이 있고 인덕을 베푸는
도움이 있었던가를 이 즈음에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안도현 시인은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고
시 안에서 부르짖기도 하는 바, 참으로 그 말이
이 초역 채근담의 여덟 번째 글에서 더욱
읽을 만하고 읽어서 맛이 나는 글귀가 아니던가?
잎이 아프고 땅 속에 물을 찾아 그 연약한 뿌리로
깊게도 내려갈 때는 힘이 들기 마련이다. 허나 그 끝에
깊이 박힘 이후로는 태풍이 불 때 순리대로 눕고
너무 뜨거운 햇볕도 잎의 견딤과 고됨의 순간을
지나고 나면 끝내는 그 깊이 박힌 뿌리로 또
자신의 힘으로 수명을 누리고 살다 가는 것이
들풀의 생이요 운명이다.
치열하게 삶으로 인해 업적에 기대고, 권력에
기대는 것은 항상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든다.
업적이 사라지고 은퇴를 하게 되는 날이 올수록
두렵고, 권력자에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게만 살다가 가는 게 인생이라면 한 번쯤
멈춰 서서 사유를 해 보아야 한다.
화향십리요. 인향만리의 세상 이치 속에서 우리는
화분 속의 꽃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들풀로 갈
것인가? 영화 관상의 이정재 배우 대사처럼
지금 지나온 것은 싹 다 잊고 오늘과 미래의
일을 안배하고 방향을 정함에 있어
"너무 늦게 결정함은 없어야지 않을까?"
인생은 유한하기에 말이다.
초역 채근담의 여덟 번째, 권력보다 높은 것이
인덕임을 마음속 어름의 어느 길까지 같이
데리고 가며 음미하는지는 독자님들의
생각에 모두 달려 있을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