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10화 초역 채근담의 삶의 언어
초역 채근담 삶의 언어 연재 10화에서는 이르는 바,
하늘이 행복을 내려 주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 행복을 구하며
하늘이 내 몸을 괴롭게 한다면
마음을 편히 하여 고통을 줄이라 한다.
이어
하늘이 내 갈길을 방해한다면
힘써 노력하여 뚫고 나아가며
그럼에 종래에 하늘이 어찌할 방도가
없으리라고 말한다.
우리의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 늘상 말하는 것이
세상은 무정하다고 말한다
이런말을 들으면 더러 듣는 이에 따라
굉장히 비정하고 몰상식한 저잣거리의
무뢰배나 보듯이 세상을 꼬아보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건만,
무정하다는 것은 그야말로 공평함이 이번이요
일번은 굳이 간섭하지 않는 중립의 이미지라
해야 옳다
그럼에 어찌 세상 이치가 실로 무정하다고 하여
무람없이 시정잡배를 보듯이 할 것인가?
공평하며 중립함이 있음으로 무정하더면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최선과 노력을 경주함에
적어도 발목은 잡지 않는다는 것일 진대,
그것이 어찌 선한 자는 반드시 괴롭히고
약한자에게 반드시 빼앗고 마는 무뢰배나
시정잡배와 비견될 수 있으리오?
낙엽이 여름에 초록빛으로 그 잎을 기껏 넓히고
뻗어가며 햇볕을 받아드는 의기양양함이 있으나
늦가을에 서리 내릴때 이제 물을 당김도 마르고
그 빛도 숙성하여 나이먹어가며 종국엔 가지에서
떨어져 낙하함은 세상의 이치인 것인데, 허나
가지도 잎도 낙엽도 서리조차도 그 어느 하나
세상섭리가 괴롭히고 간섭함이 없으니 실로
무정하다고 해야 하겠다.
그 잎이 낙엽이 되어 죽어가며
떨어지는 자유낙하로 지상에서는 퇴비가 되어
옹달샘 위로 떨어져 물에 파문을 일으킴에
세상이 유정하여 그 마지막 퇴비됨도 막고
물에 파문조차 못 내게 진공으로 가린다면
그것이, 그때야말로 유정하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세상이 좋은 유정함만 있어 나를 굳이 돕는다
치면, 그것은 제로섬 게임으로 누군가는
반드시 그 세상에게 발목이 잡히고 노력함이
무시당하는 억울함이 있어야 나의 즐거움과
상 받음이 있는 것이라고 해야할텐데,
그가 노력함에도 이런 결과를 받는
처사가 과연 온당한가?
또는 그 조차 무위도식하며 노력치 않은
자로서 나와 오십보백보 수준으로 편하게
있었으니 나는 굳이 그의 궁둥짝을 걷어차고
뒤통수를 갈김 받아도 된다고 굳이 맘먹어
본다고 할때, 만약 나에게도 세상이 유정하여
하릴없이 잘 자고 있는 사람을 궁둥짝을 걷어
찰 때에 이르면 나는 무엇이라고 불평을 할텐가.
필자는 오늘 이 초역 채근담 열번째에 들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라는 말을 보거니와
참으로 며칠전 쓴 그 연재 몇번째의 글이
생각나는게 아니던가?
참으로 이상키도 하여라~!
독서실 문을 닫을 새벽2시에 총무가 문을
닫아 걸 시각에 이미 타고난 머리도 있고
충분히 공부를 한 가장 상위권의 녀석들이
항상 나오고, 이미 이전 학년도의 것도 마스터
해야하고 지금 학년도의 것도 공부를 해야할
녀석들은 벌써 애저녁에 독서실에 와서
졸다가 몇시간전에 집으로 귀가한것이
아니던가?
그때 쓴 연재의 말대로, 프로야구 인기스타인
이대호 선수 말대로, 메이저리거 이정후 선수
정도되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대선수는
하루에도 몇백개씩 밤에 스윙을 돌리며
연구하는데, 평범한 야구 선수들이 오히려
하루에 열몇개도 방에서 야간스윙을 하지
않더면, 그러면서 세상이 유정하여 나만
도와주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온당하며
합당한 것일까?
필자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유정한지 무정한지도 모르겠고
유정이 굳이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공자께서 조차 귀신의 존재를 묻는 제자에게
"사람의 일도 모르거늘" 하며 꾸짖는데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이 노력이 어떻고
운명이 어떻고 세상의 섭리가 어떻고 하며
아까운 지금을 죽이고만 있다면 이는
그야말로 없는 뱀의 발을 그리다가
술잔을 뺏기는,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주저앉아 쓸데없는 갑론을박만
하다가 어느덧 북망산이 보이는 상황이
됨이 아닐까?
인명은 재천이요, 일의 성사는 하늘에
달렸다 할때 하늘이 그일을 보아가며
성사 시킬지 없애 버릴지를 보고 있는것
또한 의미가 없는 행동 아니던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이 이름 석자 달고는 딱 한번 뿐인 인생인데
그렇다고 접시물에 콱 박혀 바로 죽어볼
용기도 없는 인생에서
"내가 삼성가에, 현대가에 태어났으면"
또 "차은우나 장원영 이었더면"
그게, 다, 무슨 의미나 소용이 있던가?
난리굿을 피우고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지
아니하여도 어느 순간 귀밑머리가 희여지고
관속으로 인간은 서서히 들어가고 있는데,
까짓
세상이 무정하면 어떻고 유정하면 어떤가?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마치
불수의근을 나는 움직이게 해 보겠소처럼
참으로 허랑한 행동 아닌가?
이런 뻗대는 마음과 불덩어리 같은 것이
목구멍에서 가득차 혀쪽으로 넘어오려할때
득달같이 초역 채근담 연재 10화 삶의 언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라를 다시 보니
그래, 까짓꺼 한 다리가 없든 눈알 한개가
빠졌든 뭔 상관이랴 그냥 주억주억 거리며
한발 한발 재우쳐 이 달밤에 저 산을 넘어
보는게 좋지 않은가?
내가 아니면 내 인생을 대신 누가 살어
개척해 주리 만무하고, 하늘도 굳이 내
발목을 잡지 아니한다면 그저
휘파람이나 불고 풀피리나 꺾어 불면서
저기 저 산등성이를 올라가나 보자.
한 발 앞에 전개를 펼치고
한 발 디디며 진보를 하리니,
이럼으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
딱 좋은
달밤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