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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희 Feb 19. 2021

생활 민원인의 생활

©️EZ(AVEC STUDIO)



시작은 동료의 부탁이었다.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차를 돌려야 할 때 봐야 할 도로반사경이 찌그러져 있었다. 당시 근처 어딘가에서 신축 빌라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좁은 골목길에 비해 거대한 공사차가 오갔다. 높이로 추정하건대 시멘트를 옮기는 레미콘 차의 둥근 부분이 치고 지나갔을 거다. 운전 중이던 동료는 조수석에 앉아 있는 나에게 구청에 대신 민원을 넣어달라고 했다. 위치를 말해주며 “도로 반사경이 파손되었으니 고쳐달라. 좌회전할 때 위에서 내려오는 차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으니 위험하다.”라는 신고 문장을 정리해줬다. 돌아서 생각하면 생활 민원인의 생활의, 서막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민원이란 주민이 행정 기관에 대하여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일이란다. 동료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민원인의 생활 근처에도 닿지 못했을 나는 이제 생활 민원인이다. 본바탕에는 귀찮음이 있기 때문에 자주 신고를 하는 건 아니다. 도로 반사경처럼 안전과 연결되는 문제가 생기면 곧장 한다. 가령 오늘 집 앞에서 본 싱크홀로 추정되는 땅 꺼짐 현상처럼 당장 신고가 필요할 때. 현장에서 바로 할 수 있는 건 핸드폰으로 신고가 가능한 애플리케이션덕분이다. 서울스마트불편신고. 이름이 조금 오묘하다. 뭐 스마트하고 스피디하게 불편함을 신고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현재 위치를 GPS로 알아서 찾아내고 - 자주 오류가 난다 - 위치를 파악하면 신고할 내용의 사진과 간단한 내용도 적는다. 이런 식이다.



카테고리 선택 (생활불편, 민생사범, 안전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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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및 동영상

신고 내용

자원봉사 인증사진 등록 (이건 뭔지 모르겠다)



며칠 전 구로구에서 생긴 싱크홀 뉴스가 생각났다. 구로구에 비하면 쥐똥만 한 구멍이었는데 이미 거대한 구멍을 본 뒤라 상상의 구멍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내가 사는 건물이 무너지는 지경까지 갔다. 상상은 과하고, 과한 상상은 꿈으로 연결된다. 신고는 어쩔 수 없는 방지책이다.



2020-08-31 22:55:08 신고 접수
싱크홀로 추정되는 땅 꺼짐 현상이 있습니다.
매우 위험해 보입니다.



집으로 들어와 설거지를 하는데 전화가 울린다. 늦은 시간이라 갸우뚱했지만, 대충 관공서 번호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받았더니 신고한 곳의 정확한 위치를 물어보고 끊었다.



2020-09-01 01:03:08 신고 완료
현장 방문하여 모래로 임시조치 완료하였으며 도로과에서 사후관리 예정입니다.



신고가 완료되면 인증 사진이 온다. 나의 신고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후기를 보내준다. 이런 걸 보면 뭐든 빠른 곳에서 살고 있다는 걸 느낀다. (아닐 수도 있다) 덕분에 그동안 신고한 내용을 쭉 읽어봤다. 컴퓨터나 전화로 신고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진 않다. 전화로 신고한 건 공사 소음이나 분진 때문이었고, 컴퓨터로 한 건 흡연과 관련된 거였다.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고, 고단하고, 속상하다)



2019-07-08 20:21:11
땡땡 사거리 붉은 신호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아 위험합니다.



2019-11-05 16:39:17
도로반사경이 파손되어있어 위험합니다. - (이건 다른 곳의 도로반사경 이야기다)



2019-11-27-11:45:29
울퉁불퉁한 도보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해당 도보로 차량 진입이 많은 편인데 보행할 때 매우 위험합니다.



2020-01-08 20:00:18
불법 쓰레기와 주차로 인해 도보 통행이 어렵고 불편합니다.
차도로 돌아서 걸어야 할 때가 많아 위험합니다.



"위험합니다. 위험합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위험합니다."


아, 내가 위험한 걸 위험할 정도로 싫어하는구나. 웃음이 났다. 뭐가 그렇게 위험하다고 했을까. 신고 사진을 하나씩 눌러봤다. 위험해 보인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닌데 웃음이 났다. 위험함의 위험한 상상이 엄지손가락과 카메라를 바쁘게 움직이게 했나 보다. '이 신고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이라는 생각보다 내가 다칠까 봐. 신고했던 그 부근은 며칠 째 모래주머니 몇 개가 쌓여있다. 기분 나쁜 미세한 구멍을 안 봐도 되니까 괜찮다. 긴 태풍이 지나가면 구멍에 뭐라도 채워 넣겠지.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고 마치 일어난 것처럼 겁을 먹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주 있다. 진짜 일이 일어나면 ‘그래. 결국 이렇게 돼버렸잖아. 내 말이 맞잖아.’ 라고 생각한다. 고치고 싶은 습관 중 하나다. 고쳐지지 않는 습관 중 하나이기도. 옆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낙천적인 시기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이렇게 반대 지점에 와있는지 모르겠다. 거르지 않고 드는 나이와 자연스럽게 쌓이는 경험 때문일까. 내 생활에 온갖 쓰러지는 수식어들만 달려든다고 느꼈나. 새해가 되면 속으로 몇 가지 소원을 빈다. 좀 더 친절할 것. 책을 더 많이 읽을 것. 화를 줄일 것. 상대에게 표현을 많이 할 것 등등. 착실하게 빌다가 소원 개수에 짓눌리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빈다. 그래도 하나는 지키겠지. 내년에도 착실하게 몇 가지를 빌어볼 계획이다. 걱정을 줄일 것. 싱크홀 걱정을 줄일 것.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 건강 염려증을 줄일 것. 아프면 병원에 갈 것. 벌써 많다. 그냥 생긴 대로 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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