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있을 때 운전면허부터 따.”
수능이 끝나고 정답을 확인하기도 전에 들은 말이다. 시간이 없었다. 면허를 딸 시간이 없었다. 누워있을 시간은 있었는데 면허를 딸 시간은 없었다. 그때부터 징하디 징한 면허 지옥이 시작됐다. 매년 타종 행사가 끝나면 새 노트 첫 장에 ‘올해의 다짐’을 적는다. 그 목록에 붙박이처럼 있는 항목은 ‘운전면허 따기’. 초반에는 1번이나 2번에 썼다면 언젠가부터 저기 저 아래 6번 정도에 있다. 다짐을 다지기에 가장 좋은 1월, 2월, 3월이 지나가면 누군가 지우개로 살살살 지워버리는 것처럼 몇 가지는 흐릿해진다. 그렇게 지워지기 딱 좋은 6번 정도. 운전면허는 언제나 그런 항목이었다.
“그래서 운전면허는 언제 딸 거야?”
엄마와 함께하던 생활에서 분리되고, 시가 다른 곳에 살다 보니 매일 저녁 식사 후에 하는 통화는 암묵적인 약속이 되었다. 내용의 주제는 비슷비슷하다. 일과, 저녁 메뉴, 동네 새소식 그리고 끊을 때쯤 면허 이야기. 엄마는 무사고 장롱 면허 소지자다. 엄마가 이십 대 초반일 때 면허를 땄고, 내가 유치원생일 때 동네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장롱에서 면허를 꺼냈다가 난폭운전 택시 기사 덕분에 다시 장롱으로 들어갔다. 연수를 위해 차를 끌고 간 곳이 집에서는 가깝지만, 초보에게는 험난한 북악스카이웨이였으니 겁쟁이 엄마는 운전 안 하겠다는 뜻이지 뭐. 그런 엄마는 무사고 면허 소지자 아빠라는 파트너가 있고 불편함 없이 지낸다. 그래도 가끔 혼자, 훌쩍 운전대를 잡고 어딘가 가고 싶은 생각이 드나 보다. 본인은 잡을 자신이 없으니까 나라도 면허를 제발 좀 땄으면 하는 거다.
“그래서 운전면허는 언제 딸 거야?”
“다음 달에 딸게.”
“면허는 있는 게 좋아.”
첫 직장. 수습이었고, 직속 선배는 지나가는 말로 면허를 언급했다. 정말 지나가는 길에.
“면허 있니?”
“아뇨.”
“면허는 있는 게 좋아.”
선배의 차는 짙은 녹색, 90년대 빈티지 중형차였다. 앞이 길고, 뒤도 긴, 그냥 전체적으로 긴 차였다. 선배가 운전하고 조수석에 탔던 날. 애매한 상대와 밀폐된 곳에서 가장 어색한 순간은 정지상태일 때다. 가령 신호 대기 중 같은 상황. 왼팔은 창문이 열려있는 문 위에 걸치고, 오른손은 핸들에 살짝 얹은 선배가 여유롭게 말했다.
“운전하면 좋아. 날씨 좋을 때 좋아하는 음악 틀어놓고 달리면 기분이 좋거든.”
“네, 그럴 것 같아요.”
“너도 얼른 면허 따.”
“넵”
몇 달 뒤, 퇴사했고, 면허는 없었다.
“나도 조수석에서 사진 좀 찍고 싶다.”
나의 유일한 동료 A는 베스트 드라이버다. 운전도 잘하고, 주차도 잘하고, 길눈도 밝다. 무엇보다 안전운전의 대가다. 앞차와 안전거리 유지하기, 무리하게 끼어들지 않기, 보행자가 없어도 신호는 칼같이 지키기, 안내선에 딱 맞게 주차하기, 아무리 바빠도 과속은 금물, 경적은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기. 운전을 안정적으로 하는 사람 옆에 앉는 건 아무래도 고마운 일이다. 마음은 편안해지고, 오른쪽, 왼쪽을 돌아보며 지는 해가 물들이는 붉은 하늘을 보거나, 좋아하는 라디오 채널을 크게 틀거나, 막히는 도로 위에서도 쉽게 짜증이 올라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동안 나만 편했던 거다. 함께 한 지 몇 년째 되던 해의 어느 날. 그날도 눈치 없이 “오늘 하늘 너무 이쁘다.(찰칵찰칵)”며 촐랑거리는 셔터음을 남발했다. 조용히 듣던 동료가 던진 한마디에 며칠 뒤 면허시험 절차를 찾아봤다. 그리고 2년 뒤 학원을 등록했다. 그렇다. 2년 뒤.
“30번 탈선, 탈선, 점수 미달 불합격입니다.”
“27번 주차 탈선, 탈선, 점수 미달 불합격입니다.”
“26번 합격입니다.”
한동안 매일 아침 9시 집에서 나와 학원으로 갔다. 주변에서 빨리 따기에 좋은 학원을 알려줬는데 아침에는 나만의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살려 시뮬레이션 학원을 등록했다. 처음에는 생생한 자동차 게임장에 가는 기분이었다. 차의 진동은 느낄 수 없지만, 진동을 뺀 나머지는 다 진짜였다. 기능 시험장의 코스를 외우고, 주차까지 익혔더니 이제 그만 시험 봐도 되지 않겠냐는 선생님의 말에 자신감이 붙어 곧장 시험장으로 갔다. 예감이 좋았다. '한 번에 합격하면 어쩌지'라는 쓸모없는 걱정까지 했지만, 정말 쓸모없을줄이야. 우회전할 때 말썽이던 탈선과 주차 탈선으로 점수 미달 불합격. '한 번에 붙으면 재미없지'라는 마음으로 본 두 번째 시험에서 주차 탈선 두 번, 시간 초과 점수 미달 불합격. 이쯤 되니 현실로 다가왔다. 운전면허 딸 수 있을까? 무슨 억울함이었는지 눈물이 고였다. 이게 뭐라고 나를 이렇게 초라하게 만들지? 학원 가는 길이 지루해질 때쯤 본 세 번째 시험. 우회전 탈선도 무사히 통과, 주차장 진입, 주차 수정, 제한 시간까지 가까스로 통과, 나머지도 다 통과. 세상에 100점 만점 합격이었다.
“그래서 도로 주행은 언제라고?”
나는 아직 면허가 없다. 기능 시험의 합격을 지나치게 만끽했고, 도로주행 시험에서 받은 처참한 점수와 감독관의 짜증을 온 몸으로 방어하며 지쳐버렸다. 운전면허증을 받는 게 길고 긴 여정이 되리라고 알았다면 부지런했을까? 아닐 거다. 낙지가 된 것 같다. 면허만 생각하면 몸이 꼬인다. 아직 면허가 없는 사람의 투덜거림. 베스트 드라이버 동료 A는 아주 잘 하고 있다는 응원을 하루에도 수십 번 해주고, 엄마의 질문은 조심스러워졌다. 여기저기 들춰봐도 합격했다는 감격스러운 수기만 가득하고, 나처럼 포기하고 싶은, 포기했다는 수기는 없다. 그래서 나는 언제 합격한다고?
사진 정은지 (AVEC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