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절과 거리두기보다 나은 답
아빠한테 먼저 전화 좀 해!
요즘 내게 심심지않게 들려오는 말이다. 틈만 나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미주알고주알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데, 어느샌가 엄마는 아빠 눈치가 보이신단다. 워낙 사람들과 어울리지를 않는 아빠가 짠하니, 딸인 너라도 전화를 자주 해주라고. 아빠에게? 안부전화를? 왜?
평생 아빠에게 쌓인 감정이 많았지만 결혼 후 묵은 감정은 모두 쓸려내려 간 듯했다. 종종 들려오는 아빠의 잔소리도 견딜만했고, 마음을 깊게 후벼 파는 핀잔의 말도 큰 타격감 없이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더 마음이 넓어진 게 아니라, 이제는 아빠의 칭찬과 관심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됐으니까 가능했다. 필요 없음, 그냥 그 정도의 여유일 뿐이었다.
더는 아빠에게 큰 기대감이 없으니 전화 그까짓 거 번호 툭 눌러 알랑 방귀를 뀌면 그만인 건데, 그게 별로 내키지를 않았다. 각박한 세상, 내 마음 편하게 해주는 사람과 소통해도 부족한 나의 시간을 굳이 남을 편하게 하자고 쓰고 싶지가 않은 거다. 누군가는 어떻게 아빠에게 그리 무심할 수 있느냐 되물을 수 있겠지만 마음이 콩알 반쪽만큼 작디작은 내게는 소심한 이 작은 콩알을 깨지지 않게 잘 보듬고 보호하는 일이 최우선인 것을.
사실 아빠니까 더 무심할 수밖에 없다. 무심함을 치우면 기대감이 찾아와 그 자리를 차지하니까. 남편을 만나 마음의 빈자리가 충분히 채워졌어도, 아빠가 나의 아빠라는 이유만으로 자꾸만 조건이 붙는 것이다. 딸인 내 전화를 반갑게 받아줬으면 좋겠고, 맛있는 음식을 보내면 어째 입맛에 잘 맞지 않아도 마음만으로도 참 고맙다 반응해주면 좋겠고, 오랜만에 본가에 가면 TV 대신 내 얼굴을 좀 들여봐 줬으면 좋겠고, 가뭄에 콩나듯이라도 먼저 연락 한 번 해줬으면 좋겠고, 요샌 어떻게 사는지, 마음은 괜찮은지를 슬쩍이라도 물어봐주면 좋겠다. 오늘은 절대 기대하지 말아야지, 바라지 말아야지, 채근하지 말아야지 하고 두 손 꽉 쥔 채 하나님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기도를 해야만 나는 아빠를 만나도 상처입지 않을 상태가 되더라.
아빠뿐 아니라 시어머님께도 마찬가지다. 우리 아빠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딱 시어머님 같았을 거다. 평소 도통 살가운 말씀은 없으신데 불같은 말은 자주 내뿜으신다. 불 같은 뜨거운 말이 싫다기보다, 나는 따뜻한 사랑의 표현이 굉장히 많이 필요한 사람일 뿐이다. 그걸 해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특히 가족과도 같이 매여있는 관계에서는 결국 거리두기를 시행한다. 내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너무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취지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들려온 아빠에게 전화를 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는 요즘 나의 고민을 키워준 셈이다. 오래 참음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는 남편이 과연 나는 일상에서 얼마나 오래 참고 인내하는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알았다. 나는 단 하나도 참지 않는다. 답답하면 짜증을 내고, 늦어지면 조급해하며, 틀리면 다그치고, 나를 함부로 대하는 이를 미워한다 온 맘 다해.
이런 내가 틀린 걸까? 내 사람만 챙겨도 모자란 인생이라고들 흔히 말하던데, 다 그렇게 살지 않나?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을 모으고 인생의 결이 비슷한 이들과 어울리지 않나?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이 뺨을 맞았으면 저 뺨을 돌려대라고 하셨다. 하나님 왜요? 제가 왜 뺨을 맞았는데 다른 뺨도 내어주어야 해요?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저는 납득이 안되거든요. 왜냐면 맞으면 엄청 아파요! 제 뺨 아프다고요!!!
예수님의 사랑을 흘러넘치도록 경험했던 때가 있다. 그토록 갈망하던 그의 사랑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을 때 내게 있던 모든 빈 공간이 채워졌다. 나는 완전했고, 더 완전해질 필요는 내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제야 남이 보였다. 남이 내게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었다. 지킬 자존심이 없을 정도로 나는 충분히 완전했기 때문이다. 남이 필요한 걸 해주고 싶었다. 나는 이미 다 가진 사람이지 않은가.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날들이었다. 나를 벗어나는 인생은 남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절실히 배운 날들. 그 이후로 내게 분명한 기준이 생겼다. 아야 내 뺨, 내 뺨! 하고 외치는 것을 보니 나는 지금 철저히 나 중심적인 일상을 사는 중인 것이다. 한 마디로 선을 넘었다는 의미.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려 나에게만 몰두한다는 신호이다.
성경을 찾아 읽어보았다. 대체 어떠한 연고로 이런 어려운 일을 시키셨을까.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는 뭘까.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_누가복음 6:29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_누가복음 6:32
어? 내 사람만 챙기자라는 나의 다짐을 정면 반박하는 것 같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해주는 것은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일이라고. 그래 그렇긴 하지. 이것이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넓은 길인가 보다. 대부분이 당연히 쉽게 가는 길.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 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_누가복음 6:35
맞네. 나야말로 하나님의 원수 같은 죄인이었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_누가복음 6:38
원수를 헤아리면 나 또한 헤아림을 받는다는 것은 진정 자신을 아는 겸손한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위로이다. 쟤만 원수같이 구는 게 아니라 나 또한 누군가에게 원수같이 군다는 것을 알게 되면, 원수를 미워하는 마음과 동시에 원수인 내가 헤아림 받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에 그렇다.
하나님 앞에 나를 비추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나는 완벽한 피해자이며 완벽한 가해자라는 것이다. 지나가다 상처를 받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받은 만큼 돌려주기도 한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은 나를 짠하게 여기듯 남도 짠하게 여기라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원수인 내가 먼저 용서를 받았으니, 남 또한 나의 용납이 필요한 것일지도.
때마침 유튜브에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는 방법이 떴다. 봐야지, 아냐 안 봐야지 괜한 고집이 올라왔지만 그래도 봐야 했다.
김동호 목사님은 잠언 말씀을 들어주셨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 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_잠언 18:19
그만큼 마음의 문이 무겁다는 뜻이다. 미운 형제나 원수를 용납하고 마음 문을 열어 마침내 사랑까지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우리의 영역과 능력이 아니란다. 성의 문을 여는 것만큼이나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을 열 수 있는 것은 없다.
목사님은 그 형제와 화목하기 이전에 하나님과 더욱더 좋은 사이로 지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분노로 상처로 굳어진 마음이 풀어질 수 있다고.
외출 후 돌아오는 길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날이 좋은데 우리 아빠 뭐하시냐 물으니 드라이브를 가셨단다. 너무 잘했네,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잠깐 나누었다. 아빠도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나를 향해서도 참 부드럽다. 물론 간간히 잔소리를 해주셨지만 그조차 살살하시더라. 다음에 밥 먹으러 갈게 아빠, 다음에 만나자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나는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한 인격적인 관계를 주변과 맺고 있을까. 내게 독이 되는 것 같은 사람을 악착같이 떼어놓고 버려둔 과거의 나의 행동들을 돌아보게 된다. 손절이 답이었던 어린 날의 나는 어느 순간 거리두기를 대안으로 찾았다. 이제는 더 나은 답을 원한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결코 고치지 못한 악한 습관과 심각한 성격적 약점을 극복해낸다면 그것이야말로 인생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고백할 수 있는 간증이 된다고 하셨다.
위로가 된다. 소망이 생긴다.
내 힘으로는 당장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나도 언젠간 나의 약점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강하심으로 변화되는 날이 올 것이다.
조만간은 시어머님께 전화를 한 번 드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