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날 향한 크신 계획
임신 기도하고 있어요? 기도해 봐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가 있다. 내게 임신이 그렇다. 정말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잘 구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임신을 그만큼 간절히 원하지 않는 것인지. 임신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 내 인생에 가장 아리송하고, 애매하며 쉽지 않은 부분이다.
그럼에도 우리 부부는 임신을 두고 나날이 기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을 꼭 붙들고 기도했다. 바로 나를 생각해 달라는 것.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_사무엘상 1장 19절 말씀, 아멘
한나를 생각하여 아이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붙들며 기도했다. "생각"이라는 단어가 어떠한 의미인지 깊게 이해하진 못했으나, 하나님 나를 생각해 주셔서 아이를 허락해 달라고. 그 기도 하나만을 반복하는 새벽이 이어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시작한 임신을 위한 기도.
감사하게도,
새벽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새로운 마음을 하나씩 열어서 보여주셨다.
그중 하나는 바로 이 아이의 주권은 오로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아이가 아닌 하나님의 아이라는 것. 나의 것, 나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아이라는 것이다. 내가 떼를 써서, 울어서, 징징대서, 또는 더 간절히 울어서 마치 내가 잃어버린 나의 아이를 하나님으로부터 도로 찾는 과정이 아니라 애초에 온전히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만드시고 보내시는 존재가 바로 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어느 정도 자유해진 것이다. 좋은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기에, 부모가 된다는 것은 내게 늘 부담이었다.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를 아이에게 그대로 되돌려주면 어떡하나. 아이보다 내가 더 중요할 나의 한계를 어쩜 좋나. 그러나 내가 책임져야 하는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엄마의 태로부터 만드시고 키우시고 책임지시는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답답한 마음에 숨통이 틔이는 듯했다.
맞다. 나는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키우시는 것은 하나님이, 나는 이 귀한 손님을 온 마음다해 기도하며 사랑하며 대해주면 되는 것이다. 내 것, 내 책임이라는 부담에서 자유해야만 아이를 살릴 수 있다니. 우리 아빠는 부모로서 자식을 잘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을 아직도 품고 계시다. 부모가 될 나이에 가까이 와보니 그 사명이 절대 틀린 생각은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아빠의 엄격함으로 바르게 성장한 부분이 상당히 많으니까. 그러나 아빠의 과한 열심히 나를 사랑 안에서 얼마나 풍부하게 자라게 했는가, 돌아보면 결코 부유하게 자랐노라 말하기 어렵다. 주눅 들고, 눈치 보며, 자책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나는 사실 꽤나 힘들었다. 내게도 아이가 생긴다면 결코 되물려 주고 싶지 않은 삶이다. 아빠가 아니래도 하나님은 나를 충분히 잘 키워내셨음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나니, 우리 아이에게도 동일하게 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사고뭉치인 나도 하나님이 이만큼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열매를 맺게 하셨으니. 미래의 아이에게도 동일하고, 어쩌면 보다 넘치는 은혜로 키워주실 것을 기도하며, 기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도 소중한 마음을 하나 허락해 주셨는데, 바로 아빠가 된다는 책임감에서부터 자유하게 해 주신 일이었다. 나와 어느 정도 비슷한 부담감을 가졌던 남편이었는데, 지난 3년간 그 부담감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던 것 같다.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병원 검사 결과를 듣고도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이 마침내 해결되었는데, 그를 짓누르고 있던 "아빠"로서의 무거운 역할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니 심리적으로 더욱 자유해지며 평안을 누리게 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 두 사람이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하셨구나. 세상은 당연하다고 말하는 부분을, 부부간의 관계와 임신, 그리고 새 생명에 대해 자연스레 듣고 자랐던 부분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새롭게 보기를 원하시는구나.
대부분은 병원을 가보면 쉽게 끝날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왜 아직 병원을 가지 않느냐고, 시험관이라는 아주 쉬운 선택지를 가볍게 제시하는 요즘이다. 나도 때로는 마음 편히 병원에서 인공수정이든, 시험관이든 시작해보고 싶다. 그렇게 해서 답답한 기다림의 시간을 줄이고 싶고, 좌절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다. 고통스러울 과정을 금방 끝내줄 것만 같은 시험관을 나도 당장 해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그러나 어딘가 평안할 수 없다.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이나 자연임신이나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은 없지만, 유독 병원에 가는 문제는 나에게 참으로 어렵게 느껴진다. 아프면 병원에 가고, 도움이 필요하면 의사의 손길을 받는 것이 응당 자연스러운 시대임에도, 임신에 관련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허락된 지금의 기다림을 스스로 재단하여 어떻게든 끝내려는 나의 성급한 선택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싶다는 이유로 마음 한편이 불편한 선택을 기어코 강행할 이유가 우리 부부에게는 없다. 조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불안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충분히 괴로우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실을 너머 일하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진정 어려운 일임을 다시 고백하는 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주여 나를 생각해 주옵소서, 기도하는 수밖에.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새로운 마음을 기다린다. 과연 그것이 내가 생각하던 방향으로 흘러가던, 내가 예상치 못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들어 가던 말이다.
우리 부부의 소망은 바라건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사랑의 열매를 하나님의 때에 만나는 것이다. 이런 노력으로, 저런 시도로 아이를 얻었다는 말이 우리 입에서 먼저 나가기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창조하신 아이를 만났노라고 확신 있게 고백할 그날을 간절히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