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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속 편한 점심을 먹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짜 어른됨은 없겠지만요.

by 아링 Jan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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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슈가 듬뿍 들은 뽀얀 국물의 일본 라면이 먹고 싶었어요. 후식으로는 달큰한 생크림이 가득 들어찬 커피번이 먹고 싶었고요. 오랜만에 나온 김에 크림색 카디건 형태의 니트를 사고 싶었네요. 지난번에 새로 산 모직 스커트와 잘 어울릴 만한 적당한 가격의 니트를 찾아 살짝 둘러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면 대신 나물이 가득 얹혀 나온 육회 비빔밥을, 후식으로는 심플하게 따뜻한 유자 애플티 한 잔을 시켰어요. 오늘의 소비를 굳이 더 늘리고 싶지 않았으니 니트에 대한 생각을 접어 발걸음을 겨우 돌려냈고요. 입고 있는 니트도 크림색이잖아, 타이르면서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막연한 자유를 상징했어요. 어른이 되면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도 되겠지, 하고요. 부모의 통제를 벗어난 어른은 원하는 것을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것을 주저 없이 할 수 있는 자유가 온전히 주어지는 줄로만 알았어요. 학교라는 답답한 곳을 벗어나면 손을 들지 않고도 화장실을 마음껏 들락날락할 수 있잖아요!


누리려고 했지요. 어른이 되었으니까요. 그동안 무수한 것들을 참아내야 했기에 잠재의식은 끊임없이 브레이크를 걸었지만요. 아빠로부터, 엄마로부터,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들었던 잔소리들로 생겨난 브레이크 기능이었어요. 새로운 자아를 찾기 위해서는 번번이 브레이크를 무시하고 직진하는 결단이 필요했어요. 아니,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이런 게 하고 싶으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마음껏 해보라고!


언제까지나 어른은 그런 것인 줄 알았어요. 자신의 본능을 무시하지 않는 존재. 깊게 숨겨진 속마음을 가장 일 순위로 돌보는 사람.


퇴사 한 지 어느덧 10개월 차로 접어들었네요. 후드려 패듯 맞은 것 같았어요. 더는 견딜 수 없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선택했던 일인데요. 이것이야말로 참 어른다운 면모가 아닌가요. 더군다나 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한 마음으로 충만했으니 말이에요.


잠깐 쉬어보자고. 진짜 브레이크를 걸고, 과부하로 덜덜 대는 차 시동을 탁 끄고 가만 눈을 감고 한숨 푹 자는 거야. 운전대를 꽉 쥔 두 손을 내려놓고 온몸에 긴장이 풀리길 기다리면서. 앞뒤 좌우의 차 눈치 볼 필요 없이. 왜 안 가냐고 빵빵대는 경적과 고함을 뒤로하고.


한참을 쉬어서 그럴까요. 다시 시동을 걸 자신이 없어졌어요. 쌩쌩 달리는 차도에 끼어들 틈도, 신명 나게 고개를 뒤흔들며 차량의 흐름을 살피는 일도. 무엇보다 강약조절이 불가한 제 자신을 메인 드라이버로 믿고 출발해야 하는 게 영 걸려요. 일상의 여유를 버리고 자신의 건강을 희생해야 할 그 길로 도저히 뛰어들지 못하겠는 거예요. 본능을 따르며 살았던 지난 10개월은 저를 다시 겁쟁이로 만들어 놓았나 봐요.


어른은 막연하게 자유만 동경하는 사람이 아닌걸까요.


영화 모아나 2는 1편보다 더욱 화려한 노래와 춤, 아름다운 영상미로 대단했어요. 물론 정작 눈길을 끈 것은 화려한 영상미가 아닌 어린 모아나의 성장 었지만요. 1편에서 길잡이로 자라났던 모아나는 더 나아가 자신과 마을 사람들의 모든 운명을 짊어지고 더 큰 모험에 나섭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하고, 아끼는 일상과 작별하며 이전의 익숙함을 내려놓고 알 수 없는 미래로 향하는 여정. 확신에 차오를 때마다 번번이 무너지는 모아나에게 네가 생각한 그 길만이 유일한 길이 아니라고 박쥐 여왕은 이야기해요. 언제든, 다른 길은 있노라고. 헤매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면서 성장하는 것뿐이라고. 인생은 실패, 성장 그리고 죽음 그뿐이라는 모아나 친구의 말이 어쩌면 맞는 것일지도요. 두려움을 딛고, 실패를 넘어서며 성장한 모아나가 인상적이었어요.


어른은 자신의 본능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해요. 본능만을 쫓아 길을 개척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더라고요.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니까요. 파스타와 칼국수를 좋아하는 취향은 귀여울 수 있지만, 밀가루는 여성 호르몬을 자극해요. 임신을 원하는 저와는 맞지 않는 음식들인 거예요. 부드러운 휘핑크림이 입안 가득 들어차는 기분은 모든 우울을 물리칠 만큼 달콤하지만, 고지혈이 높은 사람에겐 어떻게든 피해야 할 음식 중 하나예요. 깔끔하고 단정하게 입고 싶은 마음은 훌륭하지만 이번 달 쓸 수 있는 예산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잖아요. 그럼에도 오늘 하루는 알리오 올리오를 먹을 수 있고, 이번 한 번은 크림 가득 한 와플을 주문할 수 있긴 합니다. 가성비템을 찾아 니트 하나 정도는 사도 무리는 아닐 거고요. 하지만 그 하루는 이틀이 되기 십상이고, 여러 날이 모여 습관이 되며 가치관이 되듯, 자유를 추구한 결과 또한 어른이 된 제가 책임져야 하는 것임을 이제는 알게 된 것뿐이에요.


어른으로서의 독립은 나의 주체성을 가장 앞세우는 일이며, 주체성에 따른 모든 선택은 스스로의 책임으로 완성되는 일이라는 것.


단지 자유를 누리는 일에 멈추어 있다면 더 깊은 어른의 느낌을 가질 수 없을 거예요.


모든 것을 마음껏 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통제를 시도하는 저를 자랑스레 여겨봅니다.


시어머님의 잔소리가 아닌, 아빠의 훈계 때문이 아닌.

오늘 내린 선택들에 아쉬움은 많을지언정, 왜 그랬을까 후회함은 남기지 않을 테고요.


그러니 오늘, 속 편한 점심을 택한 제가

참 어른스러웠다고 말할래요.


충분히 어른스러웠던 육회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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