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노벨상의 계절이다. 세계 최고 권위의 이 상을 받는 영광의 이름들이 10월 첫 주부터 발표된다. 그 순서는 생리의학상, 물리학상, 화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상이 된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절반을 차지하는 과학 분야 3개 상이다. 그래서 10월은 1년 중 유일하게 과학 뉴스가 대중의 관심을 받는 때이기도 하다. 아직 노벨상을 받을 만한 과학자가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남의 집 잔치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노벨상은 1896년 타계한 스웨덴 사업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발명가였던 아버지를 뒤이어 다이너마이트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다만 노년에는 자신의 발명품인 다이너마이트가 살상 무기로 쓰이는 것을 보며 엄청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유산의 94%에 이르는 440만 달러를 기부해 노벨상을 제정했다. 그 유언의 내용은 이렇다.
“유산으로 발생하는 이자는 다섯 등분하여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화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견이나 개발을 한 사람, 생리학 또는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문학 분야에서 이상주의적인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 국가 간 우호와 군대의 폐지 또는 삭감과 평화 회의 개최 혹은 추진을 위해 가장 헌신한 사람에게 준다.”
노벨상을 제정하는 계기가 된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장(1895년 11월 작성)
노벨이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에 상을 주라고 한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것들이 과학의 기초를 이루기 때문이다. 현대과학이 발전하면서 연구의 대상과 범위도 엄청나게 커졌다. 그러나 이 세 분야가 여전히 ‘근본’임은 변함이 없다. 그만큼 자연과 우주의 가장 깊은 뿌리를 추적하는 학문들이다.
그렇다면 수학은 왜 없나? 과학의 근본을 따지는 데 수학이 빠질 수 없다. 수학은 과학의 공식 언어나 마찬가지다. 과학연구는 (분야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수학적 방법을 기본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과학 이전에 수학이 있었다. 근대과학의 기원을 16~17세기 과학혁명에서 찾지만, 그때는 과학이라는 단어조차 없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 르네 데카르트 등 과학혁명의 선구자들도 실제로는 수학자에 더 가까웠다. 뉴턴만 하더라도 공식 직함이 케임브리지대학 루커스 수학 석좌교수였다. 그는 세계 3대 수학자로 꼽히기도 한다. 아마 뉴턴이 지금 환생한다면, 사람들에게 자신을 수학자라고 소개할지도 모를 일이다.
노벨이 수학을 제외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질투설. 노벨과 사이가 나빴던 수학자 예스타 미타그레플레르가 상을 받는 것이 싫어서라는 해석이다. 둘째는 노잼설. 미타그레플레르와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는데, 그의 위상이 압도적이라 경쟁이 무의미해질 것을 우려해서라는 해석이다. 셋째는 치정설. 노벨이 사랑했던 여자가 노벨을 버리고 수학자에게 가버려서라는 해석이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셋 다 근거 없는 도시전설에 가깝다.
이보다는 과학사학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해석이 더 신뢰할만하다. 피셔에 의하면 노벨은 공학자였고, 그래서 실용적 연구를 통해 인류에게 이득을 가져다준 학자를 높이 평가했다. 수학은 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이론적인 학문이었다. 실제로 초창기 노벨상 시상에도 이 경향이 드러난다. 1901년 첫 노벨물리학상은 X선을 발견한 빌헬름 뢴트겐이 받았다. X선이야말로 현대의 일상에도 널리 쓰이는, 아주 실용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그 후에도 노벨물리학상은 방사능, 전자, 무선전신 등 실생활과 연관이 깊은 실험적 발견에 주로 주어졌다. 1918년이 되어서야 변화가 생겼다. 이 해에는 막스 플랑크가 양자가설을 제시한 공로로 수상했다. 이론물리학의 성과로는 최초의 사례다. 플랑크가 이렇게 한번 혈을 뚫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에르빈 슈뢰딩거 등 수학을 쓰는 이론가들도 줄줄이 수상하게 되었다.
그럼 수학자는 애초에 노벨상을 못 받나? 그렇지는 않다. 2020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로저 펜로즈는 수학자였다. 물론 이전에도 수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론물리학에서 수상자가 꽤 나왔다. 하지만 이 해만큼 수학이 중추적인 역할을 한 업적은 없었다. 펜로즈를 대표하는 수학이론은 특이점 정리이다. 그는 이걸 이용해 일반상대성이론으로부터 블랙홀이 존재할 가능성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과학 분야는 아니지만 199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존 내시도 수학자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실제 모델이 된 그 사람 맞다. 경제학과(행정학과, 정치학과도 마찬가지)에서 필수로 배우는 게임이론의 기초 격인 내시균형을 고안한 공로다. 그는 전설의 추천서로도 유명하다. 19세에 카네기멜론대학의 학사와 석사를 마친 내시는 프린스턴대학 박사과정 진학을 위해 지도교수의 추천서를 받았다. 거기에는 사실상 단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그는 수학의 천재입니다."
로저 펜로즈(왼쪽)와 존 내시(오른쪽)는 수학자이면서 노벨상을 받았다.
수학에도 노벨상에 버금가는 권위의 상이 있다. 필즈상, 아벨상이 그렇다. 필즈상은 2022년 우리나라 출신인 허준이 교수가 수상해서 더욱 친숙해졌다. 주로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지만, 어떻게 보면 노벨상보다 받기 어렵다. 4년에 한 번 시상하되, 자격도 40세 미만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2002년 제정된 아벨상은 최근 권위가 빠르게 높아지고 있는 상이다. 필즈상을 젊은 수학자들이 받는다면, 아벨상은 평생 수학에 헌신한 노학자들이 받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필즈상과는 다른 의미로 수상이 어렵다. 앞서 언급한 존 내시도 2015년 86세의 나이로 이 상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아직 수상자가 없다. 다만 기초과학연구원의 황준묵 연구단장이 2023년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사례는 있다. 수상 후보자를 추천 및 검증하는 역할인 만큼, 수상자 이상의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