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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Aug 13. 2021

구원자는 없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느닷없이 비가 올 때가 있다. 지금이야 가까운 편의점에서 비닐우산 하나 사면 될 일이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맞벌이했던 터라 하교 시간에 예기치 못하게 비라도 오면 쫄딱 맞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교문 앞에서 우산을 챙겨 들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온 친구의 엄마를 그저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무슨 자존심인지 친구가 자기 우산을 같이 쓰자고 해도 바득바득 우겨 비를 맞고 청승맞게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우산을 가져다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못내 서러웠던 어린 시절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구원자는 현실에선 만나보기 힘들다. 어렵고 힘들게 들어간 회사에서 상사에게 호되게 당하고 있을 때 왕자님처럼 ‘짠~’하고 나타나 내 편을 들어준 사람이 알고 보니 재벌 2세라든가, 자신의 손해를 감수해가며 살뜰히 챙겨주는 친한 동료가 평생의 동반자가 되는 로맨틱한 일은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는다. 어차피 오지 않을 엄마의 우산을 기대하고 한참을 서 있었던 비 오는 하굣길의 나처럼 희망은 그저 희망일뿐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네 일은 네 일이고 자기 일은 자기 일일 뿐이니까 말이다.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어 도움을 주다가 도리어 일을 복잡하게 할 수도 있으니 모른 체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영미 씨는 신입사원 L이 안타까웠다. 이리 채이고 저리 차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신입 시절이 생각나 모른 척 넘어가기 어려웠다. 자기라도 친절하게 대해주자는 마음에서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라며 먼저 다가갔다. L은 곤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영미 씨를 찾았고 점점 조직에 익숙해지는 듯했다. 문제는 그다음에 생겨났다. 도움이 필요 없을 만한 일에도, 자신이 처리할 일도 영미 씨에게 떠넘기기 시작한 것이다. L의 일 처리를 해주느라 정작 본인 일을 끝내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건 정도가 좀 지나친데.’라고 생각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L의 구원자를 자청했던 영미 씨는 스스로 발등을 찍은 셈이 됐다. L이 고맙다거나 미안한 기색도 보이지 않은 것이 영미 씨는 더 서운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친한 친구 사이,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도와주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때론 그러면서 자신이 대견하고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자신의 이상적 자아를 과대 포장하게 되면 누군가를 구원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구원 환상’이라고 한다.


 조금만 노력하면 상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말 그대로 환상일 뿐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깊은 내면엔 열등감이 존재하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헌신함으로 얻는 만족감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는 심리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구원 환상에 빠진 사람은 지나치게 남에게 헌신한다. 특히 가족 사이에 많이 생겨난다. 경제력을 잃은 부모를 대신해 자신이 가족 구성원 모두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던 현미의 경우가 그렇다. 자신만이 가족을 부양할 수 있고, 가족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고 믿었다. 처음 얼마간은 구렁텅이에 빠진 가족을 구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해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은 점점 더 현미에게 의지하게 됐고 후엔 경제력이 생겨서도 책임지지 않고 모든 것을 현미에게만 맡겼다. 과연 현미는 행복했을까? 가족은 현미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기는 했을까?

 현미는 속된 말로 뼈 빠지게 일한 돈을 가족 생계비로 쓰느라 변변한 옷 하나 없는 자신이 초라해졌다. 결혼은 꿈도 못 꾼다. 모아 놓은 돈도 없고 가족은 현미와 책임을 나눌 의지조차 없었다. 오히려 가족은 현미의 헌신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했고 고마워하기는커녕 당연한 일로 여겼다. 현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런 경우, 정신 차리고 나부터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구원 환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안타깝게도 현미는 자신을 챙기는 대신 다른 환상을 만들었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또 다른 ‘구원 환상’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우리네 삶은 영화와는 다르다. 드라마틱한 상황이 간혹 연출되긴 해도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긴다고 어벤져스나 로봇 태권 V가 나타나 해결해 주지 않는다.      

 지나친 구원 환상은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대가 자신이 받는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면서부터 관계도 흐트러진다. 호의가 지나치면 권리라고 생각하듯 도움받는 사람은 어느 순간 상대가 보여준 배려나 희생에 더는 감사하지 않게 된다. 구원자를 자처한 사람은 남의 어려움과 아픔만 신경 쓰느라 정작 자신의 상처는 돌아보지 못한다.


 물론 성격상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들 모두가 구원 환상에 빠진 것은 아니다. 다만 주변 사람을 배려하며 챙겨주려 하는 것이 상대방의 요청에 의한 것이어야지 아무런 요구가 없었음에도 스스로 구원자를 자청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챙기지 못하면서 남을 구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각박한 세상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건강한 마음과 여유가 있을 때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한 경우에 한한다. 세상에 나를 구원 할 사람은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삶의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듯 어려움을 짊어져야 할 책임도 각자에게 있다. 당연히 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을 남에게 떠맡겨서는 안 된다.  

   

  비를 맞기 싫으면 미리미리 우산을 준비해야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혼자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대신해 어려운 일을 처리하느라 정작 자신을 돌보는 일에 소홀하다면 당장 멈춰야 한다. 구원자에 대한 어리석은 기대감으로 시간을 허비해서도 안 된다. 인생의 모든 결정은 각자의 몫이며 구원해야 할 대상은 오직 자신뿐이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오직 나만이 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 클레어 올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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