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은 꺼내 놓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늘 무언가에 목마르다. 마셔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으로 허기지고 지친다. 매일 운동과 식단을 게을리하지 않는 A는 자신이 뚱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말만 하면 다 아는 서울의 유명 대학을 다니는 B는 부모 모두가 서울대 출신인 것이 오히려 마음의 짐이다. 잘 나가는 쇼핑몰을 운영하는 C는 자신이 고졸 출신인 것이 창피하다. 강남의 중형 아파트에 살지만, 초고층 펜트하우스에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모두 자신에게 없는 것,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과 결핍으로 스스로 상처를 만들어 낸다.
자신이 백조인 줄 모르고 천덕꾸러기가 된 ‘미운 오리 새끼’처럼 언젠간 화려하게 다시 태어날 것을 믿고 싶다. 하지만 백조가 아니라 생각한 나머지 어차피 ‘오리 인생’ 뻔하다며 자포자기하기도 한다.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그 무엇은 외모가 될 수도 있고, 경제력이기도 하며 능력이나 성격이 되기도 한다. 결핍이 무엇이든 열등감으로 둔갑하여 자존감을 갉아먹고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열등감을 자신 있게 드러내는 사람은 드물다. 자랑거리도 아니거니와 인정하기 싫은 애물단지처럼 떨어지지도 않는다. 더 못 참아내는 건 옆에 있는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하고 있는 자신이다. 타인에게 지고 싶지 않은 애처로운 마음은 자신의 결핍을 더욱 꼭꼭 숨기려고 한다. 그것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찌르는 흉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렇다. 단순히 나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자신에게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마치 짓무른 상처를 헤집어내는 것과 같다. 더 감추고 부정하고 꺼내 놓는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열등감은 감추면 감출수록 더 깊은 내면으로 흘러 들어가 나와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갉아 먹는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피아노를 살 형편은커녕 배울 수도 없는 처지였다. 내가 다룰 수 있는 악기라고는 리코더가 전부였다. 악보도 볼 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때 악기 연주 시험에선 방학 한 달간 배워 기타를 쳤다. 형편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짧은 기간 피아노를 배워 시험을 치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생각해 낸 것이 기타였다. 당시 많은 친구가 리코더로 시험을 치렀지만, 나는 기어이 기타를 고집했다. 딱 한 곡만 죽어라 연습했다. 한 달간 배운 실력이 좋을 리도 없었고 시험을 위한 것이라 그 이후론 기타를 쳐본 적이 없다.
피아노를 못 가르친 게 한이 되셨는지 아빠는 여동생이 이제 겨우 바이엘을 치기 시작했을 때 덜컥 피아노부터 장만하셨다. 우습게도 동생은 관심도 없었고 피아노는 어느 순간 거실 대부분을 차지하는 천덕꾸러기 장식품이 되어 버렸다. 아무도 건반을 두드리지 않는 피아노.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지만 쉽게 누군가에게 넘기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피아노는 우리 가족의 드러내 놓지 못한 가난이라는 열등감의 상징이었다. 어쩌면 피아노 가방을 메고 교습실로 향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던 마음과 아예 배운 적이 없단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던 그들의 눈빛이 더해져 무거운 돌덩이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열등감은 꺼내 놓으면 수치심이 되어 버릴까 두렵다. 하지만 의외로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우린 깨닫지 못한다. 웅크리고 있는 열등감을 꺼내 놓는 건 타인과 비교하기 위함이 아닌 나에게서 떠나보낼 목적이어야 한다. 부정하고 숨기기 바빴던 시간을 인정하고 다른 길로 가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어야 한다.
내가 못난 것이 아니라고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증명할 필요도 없다. 모두가 같은 재능과 같은 미모와 똑같은 부를 가질 수 없듯 각자 걸어야 할 길도 다르다. 어느 길이 옳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길은 내가 걸어야 의미가 부여되고 내가 중심이 되어야 비로소 내 삶이 되는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타인은 나에 대해 그다지 관심도 없다.
카를 마르크스는 “집의 크기는 상관없다. 다만 옆에 궁전이 들어서면 내 집은 오막살이가 된다”라고 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자신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이뤄야 할 꿈일 수도 있다. 길거리 포장마차의 어묵 하나로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첩반상에도 반찬 투정을 하는 이도 있기 마련이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좋은 직업, 탁월한 능력, 경제적 여유가 어느 정도 필요한 조건인 건 맞다. 가난은 죄도 창피한 것도 아니지만 생활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을 여전히 하고 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고 상처받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것이라면 세상의 잣대로 만들어진 조건들이 굳이 다 필요할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실상 당신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돌아보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많다. 그런데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남이 가진 것이 당신에게 없기 때문이다. 남의 떡은 늘 커 보인다. 바꿔서 들어봐도 여전히 다른 사람 손에 있는 떡이 커 보인다. 그래서 괴롭기만 하다.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은 타인의 것과 비교하지 않기에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간혹 없는 것도 있는 척하는 사람이 있다. 당장이야 가려질 수 있겠지만 과연 언제까지 숨길 수 있으며 행여 들킬까 두려워 순간순간 힘들어 할 것은 너무도 뻔한 얘기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나로 당당하기 위한 첫걸음이며 내 안에 도사리는 열등감을 내보내고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미운 오리 새끼는 백조가 되고 싶었을까? 사실 백조가 아니라 무리와 같은 오리가 되고 싶었다. 나와 다른 이들만 부러워하며 슬퍼했던 우리처럼. 자신이 백조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모습이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스스로 열등감의 늪에 빠졌다. 모두가 주어진 모습은 다르지만, 자신만의 길을 걷고 그 곳에서 행복을 찾는다.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세우고 좌절하느니 목표를 낮게 잡거나 할 수 있는 다른 목표를 찾는 것이 맞는다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다. 단점을 당당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남의 시선에 휘둘려 있는 척, 잘하는 척 인정받으려 발버둥 치는 모습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모두가 백조가 될 이유가 있을까?
백조는 백조의 모습으로 오리는 오리답게 살아가는 것이 자기다움이다. 화려한 공작의 깃털을 시샘하며 떨어진 깃털을 주워 자신에게 장식하려 애쓰는 삶이 편안할 리 없다. 나다움을 지키며 남과 다른 길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