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비 Oct 06. 2021

거울과 친해지세요

나는 나를 응원한다

 오랫동안 나의 아지트는 좁디좁은 욕실이었다. 변기와 세면대가 찰싹 달라붙어 샤워라도 하면 사방에 물이 튀고 앉기도 서기도 버거운 작은 욕실. 거기에 어울리지도 않게 커다란 거울이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혼자만의 공간이라곤 없던 내게 욕실은 방해받지 않고 숨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자 피난처였다. 그곳에 거울이 있었다. 친구이자 상담자이고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는 거울이 있었다.      


 당시는 차라리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였다. 자존감은 지하 수십 층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고, 감정은 온갖 찌꺼기로 가득 차 퍼내도 퍼내도 화수분처럼 터져 나왔다. 그때 거울 속의 내가 말을 걸었다.

“너 많이 힘들구나?”

“정말 마음이 아프겠다.”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기 시작하면서 ‘내 안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욕실이 안식처이자 위안의 공간이 된 이유는 거울이었다. 그 덕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얘기했을 때 누군가는 미친 거 아니냐고 했다. 다중인격이냐고. 청승맞다는 말도 들었다. 남이 봤다면 그랬을 수도 있겠다. 뭐라 해도 상관없다. 그때의 나에겐 절대적으로 내 얘기를 편견 없이 들어줄 사람과 아무런 조건없는 공감과 위로가 필요했다. 그 역할을 그저 타인이 아닌 내가 했던 것뿐이다. 

 거울을 보며 내 안의 그림자와 엉킨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내는 작업을 했다. 넘어져 아프다고 징징거리고 있을 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땐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말해줘야 한다. 그냥 잠시 넘어진 것뿐 이라고. 괜찮다고.     


 어떤 일에 실패하거나 좌절했을 때, 제삼자의 입장으로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현상을 ‘벽에 붙은 파리 효과’라고 한다. 미국 버클리 대학의 심리학자인 오즈렘 에이덕(Ozlem Ayduk)과 미시간 대학의 이선 크로스(Ethan Kross)가 벽에 붙은 파리를 예를 들어 설명한 데서 유래했다. 견디기 힘든 아픔도 타인의 시각으로 보면 조금 더 객관적이고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이론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핵심이다. 


 에이덕과 크로스는 피험자들에게 두 가지 다른 관점으로 과거의 실패를 재경험하게 하고, 이들이 어떤 감정적 반응을 나타내는지 조사했다. 1인칭 시점에서 자신의 실패를 떠올리게 하자 혈압과 심장 박동 수가 높아지고 그때와 똑같은 불쾌함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객관적인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보도록 한 경우엔 불쾌감과 같은 생리적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실패 경험에 대해 긍정적인 해석을 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과거의 나는 ‘내면 자아’고 현재 고통스러워하는 나는 ‘현실 자아’다. 그리고 이 두 자아가 만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나는 ‘객관적 자아’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그대로’ 바라보면 오히려 과거의 감정이나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객관화 기법은 다양한 심리치료에 활용되고 있다. 벽에 붙은 파리(fly on the wall)’는 원래 ‘그대로’라는 뜻이다.    

 

 누구나 크고 작은 일로 상처받기는 매한가지다. 실연의 아픔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시험성적이 떨어져 우울할 수도 있다. 기분 나쁜 말로 상처를 준 친구 때문에 화가 나고 사업 실패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벽에 붙어 있는 파리에겐 모든 것이 그저 관찰의 대상일 뿐 우리가 느끼는 분노, 우울, 슬픔은 먼 나라 얘기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란 마음처럼 쉽지 않다. 과거의 모습에 자꾸만 감정 이입되기 마련이라 다른 이의 눈과 마음으로 나를 들여다보려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을 ‘그대로’ 보는 것만으로도 여유를 찾을 수 있고 긍정성을 높일 수 있다. 제삼자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내면의 또 다른 자아와 만나는 것 역시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다. 오래전 거울과 친했던 그때, 나는 나의 그림자와 끊임없이 대화했었다. 내면의 어두운 나와 대면하고 인정하고 사랑하려 무던히도 애썼다. 나를 온전히 만나는 것만으로도 상처와 화해할 기회가 찾아온다.


 나는 함께하는 주변 사람들을 좋아한다. 곁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친구와 가족을 사랑한다.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름답고, 멋지고, 성공해서가 아니다. 때론 화나게 만드는 친구도 있고 가족 역시 남보다 못할 때도 있다. 장점도 알지만, 결점도 알고 있다. 그 결점이 비수처럼 공격하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충·조·평·판으로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진 않는다. 여전히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고 때론 다투고 힘들어할 땐 기꺼이 공감과 위로를 건넨다. 아무 조건 없이. 


 얼마 전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예전에 내가 엄청 힘들어했을 때, 네가 나한테 그랬어.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언제나 날 응원할 거라고.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그때 정말 그 말이 힘이 됐었어.”

솔직히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어떤 의미로 얘기했는지는 안다. 지금도 사랑하는 이들이 힘들어할 때마다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과연 나에게는 얼마나 그 말을 자주 해주고 있을까? 사랑하는 이들과 다름없이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평소에 남에게 하는 따뜻한 말, 공감의 눈빛을 정작 나에겐 해주지 못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직업, 자동차, 외모, 학력이 나를 표현하는 전부가 아니며 타인이 보는 시선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결점투성이인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순 없다. 실수를 저질러도, 상처받아 쓰러져도, 바보 같은 짓으로 밤마다 후회로 눈물 흘려도 자신을 윽박질러선 안 된다. 타인을 사랑하고 아끼고 이해하는 것처럼 자신에게도 똑같이 해주어야 한다. 


 거울 속의 내가 상처에 짓눌려 힘들어한다면 조용히 말을 걸어보자.

“많이 힘들지? 괜찮아. 잠시 넘어진 것뿐이야. 난 항상 너를 응원해. 항상 네 편이 되어 줄게.”

이전 08화 조금 비겁하면 어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