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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Oct 01. 2021

조금 비겁하면 어때

내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심리학 교수 숀이 주인공 윌에게 했던 말이다. 닫혔던 윌의 마음이 녹아내려 숀을 안고 펑펑 울었던 장면에선 나 역시 눈물이 터져 나왔었다.


 천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트라우마로 자책하는 윌은 MIT의 청소부로 일한다. 공부에 대한 열망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상을 향해선 마음을 열지 않는다. 버림받고 학대당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는 윌의 상처를 처음으로 어루만져주었던 말이 바로 “네 잘못이 아니야!”였다.    

 

 누구나 마음속에 상처를 품고 살지만, 아픔에 공감하고 상처를 쓰다듬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경우는 드물다. 주변 사람이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부분 스스로 상처를 꺼내놓지 않아서다. 먼저 알아차리고 위로를 건네주면 좋으련만 실상 표현하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자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더더욱 마음 문을 열기 힘들다. 다가가 마음에 노크라도 하려면 태연한 척, 강한 척 오히려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렇게 더 깊은 웅덩이에 상처를 꼭꼭 숨기고 살아가다 보면 작은 일렁임에도 쉽게 주저앉게 되기도 한다. 마치 불행이 오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무기력하게 바라보게 된다.      


 중학교 운동회 때 배구 시합을 위해 각 반에서 몇 명의 선수를 뽑아 연습을 시킨 적이 있었다. 시합에 나가고 싶어 지원했지만, 담임선생님은 반을 위해서 내가 빠지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키가 작다는 이유였다. 작아도 잘 할 수 있다고 여러 번 사정해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배구 연습 때마다 벤치에서 구경하는 것이 신이 날 리 없었다. 선생님이 하셨던 “넌 키가 너무 작아서 안 돼.”라는 말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평균 이하의 키다. 지금이야 키 따위로 신경 쓰거나 상처받을 일은 없지만, 그 시절엔 커다란 상처였다. 모든 것에 작은 키를 결부시키고 이런 키를 물려준 부모님을 원망했었다. 키 큰 친구들 옆에선 주눅 들기 일쑤였고 성인이 되어서도 키는 자존감을 추락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구두는 10센티는 되어야 신었고(이건 구두에 올라가는 수준이라고 보는 게 맞다.) 무조건 키가 커 보이는 옷만 입었다. 작은 키를 숨기려고 하는 내가 미치도록 싫었고 키라는 게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닌지라 자신감을 늘 바닥이었다.  

   

 프리랜서가 되기 전 다녔던 직장에서 선배가 소개팅을 시켜준다면서 친구 여섯 명을 모아 보라고 했다.

“무슨 단체 미팅도 아니고 여섯 명씩 이나요?”

“그게 말이야. 상대가 백설 공주에 나오는 일곱 난장이거든. 하하하.”

뭐가 재밌었던 것일까? 선배는 한참을 저 혼자 웃어 대다 굳어진 내 얼굴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재밌으세요? 선배가 저 자랄 때 우유 한 통이라도 사주셨어요? 무슨 권리로 제 키를 놀림거리로 만드세요?” 사무실 분위기는 싸 해졌고, 다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선배를 쏘아봤다. “키만 크면 뭐 하냐? 인격이 저따윈데.” 듣고 있던 다른 선배가 나를 놀린 선배에게 날린 일격이었다.


 정말 우습게도 그 사건 이후로 키에 대한 콤플렉스를 떨칠 수 있었다. 내 잘못도 아니고 인격을 대변하는 것이 키도 아니다. 키가 작은 게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나를 괴롭히는 짓을 멈추게 됐다. 다른 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고 키는 관심사에서 사라졌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키를 ‘셀프 디스’하기도 한다.     

 

 ‘잘되면 내 덕이요, 안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듯이 흔히 일이 성공하면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 생각하고 실패하면 주변의 상황을 탓하기 마련이다. 일이 잘 풀리는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으면 나의 가치가 그만큼 올라가니 기분 좋은 일이다. 일이 안 되는 이유를 밖에서 찾으면 상처가 덜 되니 좌절로 인해 아파할 일도 적어지긴 할 것이다.      


 자신을 높이는 데 유리한 편향된 생각을 심리학에서는 ‘자기 고양적 편향’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편향적 사고는 자칫 다른 사람의 가치를 절하시키고 실패를 남 탓만 하게 되며 결국 발전의 기회를 잃게 될 수도 있다. 실패는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발전할 기회를 준다. 남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실패를 발판삼아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향해 발길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모든 일에 발뺌하고 모르쇠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더 발전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 역시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에 자신 탓을 하며 벼랑 끝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도 숨이 턱까지 막히는 현실 속에서 ‘내 탓이요, 내 탓이요.’로 일관하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지 않은가.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하는 자신에게 구태여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다. 실수로 인정할 수 있는 것들과 내 탓이 아닌 것과의 구분이 필요하다. 내 탓이 아닌 것까지 짐을 떠안으면 안 된다.   

   

 모든 일에는 내 탓도 있고 남의 탓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남이 아니라 내가 원인이 된 일뿐이다. 남의 탓은 나의 통제밖에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내 탓을 한다고 달라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잘한 것에 대한 격려와 칭찬엔 인색하고 잘못하고 실수하는 것엔 엄격한 사회에 살고 있다. 각박하다 못해 처절한 현실 속에서 나라도 내 편이 되면 좋겠다.


 만약 지금 너무 힘들고 지쳐 내 탓도 남의 탓도 할 여유조차 없다면 조금 비겁하지만 내 탓이 아닌 이유라도 찾아내 보자. 남 탓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탓이 아닌 정당한 이유 말이다. 가끔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아무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지 않는다면, 나라도 내 편이 되어 상처를 보듬어 주어야 한다. 적어도 내 잘못이 아닌 것까지 책임지느라 안 그래도 힘든 마음을 들쑤시지는 말아야 한다.      


 소설가 백영옥의 산문집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세상에 누구도 없는 듯 아픔이 찾아오면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위로의 말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해요.”

 영화 속 숀이 윌에게 그랬듯 스스로 위로를 던져 보자.

“내 잘못이 아니야. 최선을 다했고, 지금도 잘하고 있어.”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 기나긴 삶에서 잠시 비겁한 것쯤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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