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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Sep 20. 2021

감정엔 유통기한이 없다.

내 감정에 솔직해 지는 것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영화 ‘중경삼림’에 나오는 대사다. 사실 그 말을 한 영화 속 인물은 만년은커녕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되지만 말이다. 정해진 기한만큼은 변함없음을 증명하는 유통기한 덕분에 우리는 안심하고 식품을 구매하고 그 기간만큼 보관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은 버려지기 마련이다. 

    

 감정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10년 전 친구 누구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되었던 말들이 유통기한이 만료되어 기억에서 삭제되거나, 어릴 적 끔찍했던 트라우마도 성인이 된 기념으로 기한이 지나 사라진다면 좋겠다. 바람과는 다르게 불행히도 감정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상처가 되었던 감정은 당장은 아문 듯해도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구겨 넣으려 애써도 더 깊이 숨어 버릴 뿐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대부분 낡아빠진 과거를 들춰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지난 일을 굳이 끄집어내봤자 도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구차하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지금을 열심히 살아냄으로써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고 여기고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는 것을 당연시한다. 옛일을 끄집어내는 것은 ‘긁어 부스럼’일 것이란 암묵적인 규칙이다. 맞는 말이다. 과거에 얽매인 채 사는 것은 결코 미래지향적이지 못하다.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회상이나 추억팔이가 아니다. 그때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묵혀진 감정이다. 사실 깊숙이 숨겨놓은 부정적 감정들은 발화 시점의 감정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그때의 감정 그대로 꺼내 본다는 것은 어렵다. 이미 변질하여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많다. 다만 처리하지 못하고 감춰둔 부정적 감정은 긍정으로 변화되지 못했기에 여전히 상처로 남게 된다. 


 해결되지 못한 감정엔 유통기한이 없다. 당시엔 이불 몇 번 걷어차고 괜찮다고 넘어갔던 감정이라도 어느 날 갑자기 분노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면 지나쳤던 그때의 감정을 다시 만나야 한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하고 자기 삶의 주인이길 바란다. 소중한 가치를 누리는 삶에 방해가 되는 것이 풀지 못한 감정의 매듭이다. 좋은 생각만 한다고 힘들었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긍정성과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달갑지 않지만 나를 흔들었던 부정적 감정들과 화해해야 한다. 그 존재를 무시하고 외면하면 할수록 내 안에서 펼쳐질 수많은 갈등을 부추길 뿐이다. 우리에겐 꼬일 대로 꼬인 감정과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의식적으로 꺼내지 않아도 순간순간 마주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는 기억은 무엇인가? 감정의 이름은 무엇이고 어떤 느낌으로 나에게 고통을 주는가? 바라보는 것으로도 힘이 들고 때론 남겨진 상처의 잔흔보다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숨겨둔 감정들의 매듭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복잡했던 생각은 정리될 것이고 서서히 매듭도 느슨해질 것이다.    


 감정을 들여다보고 꼬인 마음의 매듭을 푸는 방법은 각자 다르다. 정면으로 부딪치며 하나씩 풀어나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내려놓음으로 감정을 다스릴 수도 있다. 관계를 정리하면서 저절로 풀어지는 매듭도 있다. 누가 대신해줄 수 없기에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혼자만의 힘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는 도움을 받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엉클어진 감정의 실마리를 잡고 풀려고 하는 자신의 의지이다. 아프게 했던 것들과의 조우에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마주할 수 있을 때 내 안에 숨겨진 상처와의 대면에도 당당할 수 있다.    

 

 감정은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한다. 긍정적인 감정이나 부정적인 감정 모두 생존을 위해선 필수적인 욕구이며 자신을 표현하는 의식적인 존재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긍정의 마음보다 부정의 마음이 더 강렬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부정적 감정은 상처가 되어 자신을 괴롭히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부정적 감정은 나쁜 감정으로 치부되어 더 깊은 곳에 숨기려 한다. 부정적 감정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단정 지어선 안 된다. 설사 그렇더라도 뭐 어떤가. 나쁜 감정이 생겼다고 나쁜 사람이 아니다. 감정은 순간이고 엉켜버린 부정의 감정일수록 정성 들여 풀어내야 한다. 


 단언컨대 당신만 힘든 상황에 놓여 있진 않다. 주변을 돌아보면 불행에 직면한 사람은 의외로 많다. 그저 자신의 시선으로 상대를 보기에 편안하고 행복해 보일 뿐이다. 늘 행복한 모습만 보였던 당신 옆의 친구 역시 아픈 상황을 지나왔거나 지금 겪고 있을 수 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누구나 어려움은 있고 상대적으로 내 고통이 더 커 보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중요한 것은 내면의 감정을 제대로 읽어내고 부정의 감정을 긍정으로 승화시키며 인생의 중요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이정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감정은 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화된다.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이름으로 수없이 변한다. 믿었던 친구에 대한 감정이 의심으로 바뀌기도 하고 ‘너 없인 못 산다.’는 말은 어느새 ‘너 때문에 못 살겠다.’가 되기도 한다. 감정은 항상 출렁이고 변화무쌍한 모습이다. 나에게 상처였던 감정 역시 어느 순간 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감정은 묵혀둬야 별 쓸모도 없이 저장될 뿐이다. 적당히 변화시키고 승화시켜 좋은 것은 기한을 연장하고 필요 없는 것은 버려야 한다. 감정의 유통기한은 오롯이 당신만이 정할 수 있다. 만약 감정의 유통기한이 하루라면 어떨까? 끔찍한 일이지 않은가? 오늘의 감정이 내일이면 사라진다면 세상에 사랑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건 막을 수 없다.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는가가 중요하다. 여전히 세상은 아름다운데 화가 나는 이유는 나만 상처받고 있다는 생각 때문은 아닐까? 행복이 지속하는 감정이 아니듯 아물 것 같지 않은 상처와 절망도 언젠간 지나간다. 아프게 했던 상처는 단지 삶에서 만나는 작은 장애물일 뿐이다. 조그마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몇 걸음 앞에 존재하는 수많은 행복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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