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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Sep 12. 2021

외향성을 강요하지 마세요.

“강사님은 아무래도 외향적이시고 말도 똑 부러지게 하시니 법적인 내용을 다뤄 주세요. 저는 감성적인 부분을 할게요”

함께 참여하기로 한 프로젝트에서 다른 강사가 한 말이다. 나는 딱딱한 강의를 맡고 자신은 부드럽고 감성적인 내용을 하겠다는 얘기로 들렸다. 물론 그런 뜻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얄팍한 내 마음이 왜곡하고 뒤틀리며 그리 들였을 뿐이다. 나 역시 감성적인 부분을 맡고 싶었고 잘할 자신도 있었다. 외향적이라고 판단한 기준은 무엇이고 왜 자기 마음대로 내 역할까지 결정했는지 불쾌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외향적이라는 말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외향적인 사람일까? 내향적인 사람일까?

카를 구스타프 융은 마음의 에너지 방향에 따라 ‘외향성’과 ‘내향성’으로 구분했다. 외향성은 에너지가 밖으로 향한 것으로 ‘사교성’으로 자주 표현되고, 내향성은 ‘내성적’인 것을 의미하며 에너지는 내부로 향한다. 아마도 수많은 심리검사를 통해 자신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외향적인 사람은 호탕하고 활기차게 분위기를 주도하다 보니 사람들과도 잘 어울린다. 밝고 긍정적 이미지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보통은 외향적인 사람을 좋아하거나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으로 본다. 그러면 내향적인 사람은 어떨까? 매사 조심하고 왠지 힘이 없어 보이고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뻘쭘하게 말 한마디 못하는 어두운 사람일까?     


 한동안 비즈니스 전문가와 심리학자들은 훌륭한 기업가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외향성’을 꼽았다. 매사 적극적이며 사교적이고 기업 분위기를 주도 할 수 있는 외향성이 있어야 성공한다고 믿었다. 외향적인 사람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며 내향적 CEO에게 더 외향적인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 잘못된 지침이었음은 바로 드러났다. 


 수많은 기업가와 CEO는 내성적인 경우도 의외로 많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공동 창립자 빌 게이츠, 애플의 공동 창립자 스티브 워즈니악, 구글의 공동 창립자 래리 페이지, 페이스북의 공동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 그리고 야후의 사장 겸 CEO 머리사 메이어가 포함된다. 이들은 장기간 집중할 수 있는 능력, 균형 잡힌 비판적 사고, 조용히 다른 사람에게 권한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인 내향성이 짙은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외향적인 사람을 선호한다. 외향적인 모습을 선망하는 이유는 에너지의 흐름이 밖으로 향해 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긍정에 예민하다 보니 외향적인 사람은 항상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다. 반면 내향적인 사람은 긍정적인 부분에 늦게 반응하거나 둔감하다. 그러다 보니 내향적이라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주눅 들고 성격을 바꿔서라도 외향성을 키우고 싶어 한다. 


 내향적인 사람이 모두 불행하거나 우울한 것은 아니다. 조금 덜 웃는다고 그 사람이 비관적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내향적인 사람은 그저 반응이 조금 느리거나 서투른 것뿐이다. 지나치게 자신의 성향을 비하할 필요는 없다. 


 에너지가 내면으로 향해 있기에 사색을 즐기고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을 내향성인 사람이 갖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말하기보다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관심사에 집중한다. 그것은 곧 창의력과 연결되기도 한다. 말하기 대신 글을 쓰는데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밑천도 가진 셈이다.     


 외향적인 사람 중에도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원치 않는 모임 자리를 끝끝내 지키길 강요하거나 재미도 없는 농담을 눈치도 없이 지속하는 사람도 있다. 걸핏하면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이 무례한지도 모른 채 마음 상하는 말만 골라서 내뱉는 사람도 봤다. 배려가 결핍된 외향성의 단점을 가진 사람이 분명 존재한다.     


 원래 내향적이었지만 일 때문에 외향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 나 역시 이런 경우에 속한다. 강사가 되기 전엔 내향적 성향이 강했다. 강사라는 직업의 특수성 때문에 내 안에 잠재된 외향성을 끌어내 사용하다 보니 일과 관련된 곳에선 외향적 성향이 나오게 되었다. 처음엔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불편하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힘들었다. 시간이 흘러 몸에 익숙해지니 자연스럽게 변했을 뿐이다.      


 누구나 한가지 성향만을 갖고 있진 않다. 어떤 성향이 더 좋다 나쁘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분류는 옳지 않다. 문제는 한쪽 성향만을 편애하는 사회 분위기다. 사람은 저마다의 성향을 어느 정도 타고 나지만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어 한쪽의 성향만 갖고 살진 않는다. 야누스처럼 두 모습을 모두 갖고 있지만, 자신에게 편안한 혹은 익숙한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절대적이지 않다. 그러니 무엇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을 바꾸려고 애쓰기보다 좀 더 긍정적인 모습을 만들어 가는데 몰두해야 한다. 자신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해야 좋은 사람이 된다.     


 나를 외향적이라고 단정 지었던 많은 사람은 오히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어릴 적 혼자 놀기 좋아하고 땅바닥을 스케치북 삼아 그림을 그리던 수줍음 많은 아이였다는 사실을 알 리 없다. 시끌벅적 떠들며 다니는 여행보다, 한곳에서 조용히 머물고 책을 읽으며 그곳의 풍경을 즐기는 자체를 행복해한다는 것을 굳이 밝힐 필요도 없다. 온몸의 에너지를 다 쏟아내는 강연 모습과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직진성, 즐거운 일이라면 저지르고 보는 무모함만으로 나를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열정 가득한 모습과 내 안에 숨어 있는 소심함이 모두 ‘나’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나마 아름답게 돌아가는 것은 모든 것의 조화 덕분이다. 더운 곳이 있어야 추운 지역도 있기 마련이고 밤이 있어야 아침도 찾아온다. 해와 달 중 뭐가 더 소중한지 따지는 사람이 없듯 우리의 성향도 그렇다. 내 안에 존재하고 밖으로 나오려 꿈틀대는 것이 어떤 것이든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성향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발전하기 위한 자기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성향의 경계를 뛰어넘는 용기와 담대함으로 편향된 시선에 자유로울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      


“내향적이시군요?”

“그게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당신을 향한 편견에 반박할 수 있는 용기가 당신에겐 있다. 

“고것이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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