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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Aug 12. 2021

친구인가 호구인가

 제1차 세계대전 중 몇몇 독일 특수병의 임무는 적의 후방에 깊숙이 침투해 사병을 포로로 잡아 취조하는 것이었다. 이전에 여러 차례 임무에 성공했던 독일의 특수병이 다시 적진으로 출발했다. 그러다 적군의 사병이 무기를 내려놓은 채 먹을 것을 쥐고 홀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직 먹던 빵을 손에 들고 있던 사병은 갑자기 나타난 적을 보고 놀랐지만, 자신도 모르게 빵을 건넸다. 독일 병사는 순간 사병의 행동에 마음이 흔들렸고 뜻밖의 결정을 내렸다. 적군의 사병을 포로로 잡지 않고 그냥 돌려보낸 것이다. 그대로 돌아가면 자신이 얼마나 질책을 당할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독일 병사는 어째서 그렇게 쉽게 빵 한 조각에 감동한 것일까? 

사람의 심리란 참 미묘하다. 대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득을 얻거나 호의를 받으면 상대에게 보답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다. 독일 병사가 적으로부터 얻은 것은 작은 빵 한 덩어리였지만, 상대에게서 선의를 느꼈고 은혜에 보답하려는 '호혜의 법칙'에 의해 마음이 흔들렸다. 그것은 받은 만큼 베풀고자 하는 인간사회의 뿌리 깊은 행동 규범이기도 하다. 


 인간관계에선 친밀하건 그렇지 않건 받으면 돌려줘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을 지키며 산다. 친구에게 밥을 얻어먹으면 커피를 사거나 나중에라도 자신 역시 밥 한번 사야 마음이 편하다. 경조사비를 장부에 일일이 적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누구나 도움을 받으면 자신도 언젠가는 갚을 것이라는 마음의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받기만 하는 사람을 좋아할 리 없고, 아무리 베푸는 것이 습관인 사람도 아무런 대가 없이 주기만 한다면 이내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그것이 물질이든 감정이든 서로 주고받아야 안정감을 느낀다. 마음의 빚을 지고 사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서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사랑도 우정도 관계의 깊음도 생겨난다.    

 

 심리학자 애덤 그랜트는 ‘호혜의 법칙’에 따라 사람의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받는 것보다 상대방에게 더 많이 퍼주는 기버(giver), 준 것보다 더 많이 받으려는 테이커(taker), 받은 만큼만 주는 사람은 매처(matcher)에 해당한다.

 테이커와는 상종하고 싶지 않고 주변에 좋은 기버만 있으면 좋겠지만, 세상일은 언제나 그렇듯 호락호락하지 않다. 대부분 받는 만큼만 주는 매처가 주변의 다수를 차지하고 알게 모르게 테이커도 검은 속내를 숨기며 호시탐탐 당신을 노리고 있다. 

 이들 중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주기만 하는 기버는 자칫 테이커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말 그대로 ‘호구’가 될 수 있다. ‘호구(虎口)’는 범의 아가리라는 뜻으로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쉽게 상대의 말을 듣고 지갑을 여는 호갱님이 되기도 하고 그저 퍼주기만 하다 뒤통수 제대로 맞는 경우도 많다.      



  J는 자신도 모르게 전형적인 테이커를 옆에 두고 있었다. 친한 친구라는 탈을 쓰고 말이다. J의 친구인 K는 어려운 처지에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늘 J에게 손을 내밀었다. 평소 기버의 성향이 강한 J가 거절할 리가 없다는 것을 K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J는 최선을 다해 K를 위해 헌신했고 K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문제는 K가 끝없이 뭔가를 요구하고 J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필요할 때만 불러댔다는 사실이다. 같은 업종의 일을 하면서도 도움을 받는 쪽은 늘 K였고 J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J가 도움이 필요한 경우엔 이익을 따지며 어떻게든 손해 보지 않으려 했다.     


 테이커는 언젠간 그 속내를 드러내며 검은 아가리를 벌리기 마련이다. J가 운영하던 카페를 처분하려 하자 K는 도와주겠다더니 은근슬쩍 자신이 헐값에 매입하려 했다. 물론 중간에 다른 사람을 끼워 넣어 마치 다른 사람이 인수하는 것처럼 속이는 철저함까지 보였다. 어차피 제값 받기는 어렵다며 말도 안 되는 금액으로 J를 압박했다. 누가 봐도 날로 먹자는 심보였다. 가격을 조율하려는 J를 오히려 어마어마한 이익을 보려는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제시한 것도 황당했지만, 실제 인수하고자 했던 사람이 친구인 K였다는 사실을 알고 J는 망연자실했다. 친구라 믿었던 K에게 자신은 그저 호구였으며 이용당하고 있었다는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 마음엔 커다란 생채기를 남겼다. 아마도 J는 이제 친구라는 이름으로 K를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친구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채 상대를 호구로 만들려는 사람이 있다.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을 때만 연락해 시간 때우기용으로 생각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 확연히 차이 날 정도로 유독 한 친구에게만 막 대하는 사람도 있다. 도움받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남들이 손을 내밀면 똑 부러질 정도로 야멸차게 거절한다. 매사 계산적이며 손해 볼 일엔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래 잘 먹고 잘살아라.’하고 떼어내고 싶지만, 테이커가 만만한 기버를 가만 놔 둘리 없다. 크게 손해 보지 않을 작은 일로 마치 큰 도움을 주는 양 생색내며 조금씩 다가와 때를 기다릴 것이다.    

 



 지금까지의 얘기만 종합해 보면 전형적인 테이커가 항상 모두의 우위에 있는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나타내는 피라미드에서 맨 위를 차지하는 것이 테이커가 아닌 기버라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맨 아래의 피라미드도 기버가 차지하고 있다. 같은 기버라도 누구는 사회적인 평판이 좋아 주변에 좋은 사람이 몰리고, 또 다른 기버는 이용당하고 착취당하면서 정작 자신을 챙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무조건 주기만 하고 자신을 챙기지 못해 금세 녹초가 되고 마는 기버는 그야말로 ‘호구형 기버’다. ‘나는 호구’라고 명찰을 차고 다니는 셈이니 테이커가 놓칠 리 없다. 반면 성공한 기버는 테이커를 멀리하는 것은 기본이요 자신을 챙기는 일에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호의를 이용하거나 악용하는 테이커의 먹잇감이 되지 않는다.     

 남에게 베푸는 삶이 아름다운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척박한 세상에서 가끔씩 전해지는 미담은 힘들게 살아가는 삶에 희망을 준다. 누구도 얌체처럼 손해 보기 싫어 남을 착취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베푼 선행이 손해까지 감수하며 남 좋은 일만 하는 것은 아닌지 가끔은 돌아보아야 한다. 타인과 나의 일에 적절히 균형을 맞추고 자신을 챙기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호구형 기버’가 되지 않는 길이다. 


 베푸는 것을 손해만 보는 것으로 여길 필요도 없다. 주변에 기버와 매처가 많다면 베푼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호의는 돌아오게 되어있다. 간혹 주저 없이 퍼주었다 해도 겪어보니 테이커였다면 이제 조심스럽게 그들을 멀리하면 된다. 내가 호구가 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단호하게 보여주고 스스로 그들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지 않으면 된다. 호의와 베풂은 받을 자격이 있는 이에게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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