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오늘 엄마랑 한판 했어.”
나야 엄마랑 싸우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만 주리는 달랐다. 이십 대 초반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가정을 이룬 주리는 가족들과 떨어져 살고 있지만, 엄마한테만큼은 지극 정성이었다. 어쩌면 멀리 있어 자주 볼 수 없기에 더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랬던 주리가 무슨 일일까 싶었다.
늘 말 잘 듣고 항상 먼저 전화하고 멀리 있어도 생일은 물론 시시콜콜한 일까지 다 챙기는 딸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건 지독한 무관심이었다고 한다. 매번 섭섭한 정도로 넘어갔는데 엄마가 처리할 일이 있다며 연락을 했고 그날은 주리 생일이었다.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필요한 것만 얘기하고 엄마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서운한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했다.
그날 단톡방은 저마다 엄마와 불편했던 이야기로 북새통이 되었다. 자신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하는 엄마 얘기,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엄마, 만나기만 하는 으르렁대는 모녀. 저마다의 사연이 넘치도록 많았다.
‘엄마’의 이미지는 희생, 지고지순한 사랑 뭐 이런 거 아니었나?
엄마와 딸은 가장 끈끈한 관계라지만, 내면엔 원망과 애증이 함께 도사리고 있다는 건 숨겨진 진실인지도 모른다. ‘엄마’라는 존재는 그 이름만으로도 눈물이 나고, 살면서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미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우리네 부모들은 늘 바빴다. 자식에게 온갖 정성과 관심을 주지 못했다며 뒤늦은 후회를 하는 부모도 많다.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먹고 사는 것에 온 힘을 쏟은 탓에 자식들을 정성스레 돌본다는 것이 역부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늘 엄마의 사랑을 목말라하며 치맛자락에 매달렸고 조금이라도 관심받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나마 ‘착한 딸’이나 ‘착한 아들’은 칭찬을 통해 사랑을 확인받는다. 엄마의 잘했다는 칭찬 한마디를 듣기 위해 늘 분주했다. 동생에게 양보하는 행동에 눈을 찡긋거리며 미소를 던지는 엄마의 모습에 행복감을 느끼고, 공부를 잘해야 칭찬을 받는다. 그도 아니면 칭찬받을 뭔가를 찾아내야 했다.
누가 등 떠밀어 시작한 것도 아닌데 ‘착한 딸’이 되기 위해 엄마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면서도 뭔가 불편하고 갑갑한 마음이 해석되지 않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자신의 만족이 아닌 ‘엄마의 인정’에 목말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마저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착한 딸’이라는 타이틀에 매달려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달고 살았다. 맏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엄마가 끔찍이도 미웠다. 그런데도 곁을 지키고 있었던 건 익숙한 고통이 엄마를 떠나 독립적으로 산다는 낯선 변화보다 더 쉬운 선택이기 때문이었다.
‘착한 딸’의 가면은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내가 가면을 벗어던질 용기를 얻은 건 어느 책에서 읽은 ‘엄마와 나는 타인이다.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구절을 접한 후였다. 지금껏 엄마의 기준에 모든 것을 맞추느라 정작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독한 말을 쏟아내도 ‘내가 더 잘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엄마의 감정 쓰레받기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던 ‘착한 딸’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싶었다. 아무리 잘해도 엄마는 결국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더군다나 내게 퍼부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상처가 됐다는 것을 정작 엄마는 모르고 있었다. 아니 기억조차 못 했다.
저 혼자 착한 딸이라는 가면을 쓰고 북 치고 장구 치며, 이제 와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딸을 엄마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서운해하는 쪽은 오히려 엄마였다. 그래. 나 역시 ‘어린 시절의 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을 인정한다. 성인이 되어서는 엄마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해야 했고 엄마가 아닌 나에게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어쩌면 나란 사람은 엄마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그동안 감정의 불순물을 내 안에 차곡차곡 쌓아 놓으며 마음 깊숙한 곳에선 엄마를 미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작 엄마는 기억조차 못 하는데 말이다.
어느 날 엄마는 습관처럼 불쾌한 감정을 쏟아냈다. 어디서 누구한테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엄마를 화나게 한 일은 따로 있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화풀이하듯이 내게 들이부었다. 소리를 지르고 세상 못된 년을 만들더니 결국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까지 뱉고 말았다.
“엄마 알았어. 엄마가 오지 말라면 안 올게. 근데 어디서 누구한테 화 난 건지 모르지만 그 사람한테 화내야지.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물론 엄마는 내 말을 듣고 사과는커녕 더 거칠게 화를 내고 몰아붙였다.
며칠이 지난 후에야 동생을 통해 당신이 실수한 것 같다며 미안해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엄마가 미안해한다니. 처음이었다. 직접 듣지 않아도 엄마의 변화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후로 함부로 대하는 경우는 현저히 줄었다. 독한 말을 뱉었다가도 눈치를 보는 듯 힐끔 쳐다보곤 말을 접곤 했다. 아이고 울 엄마.
그래, 수십 년을 그리 살아오셨는데 변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더는 착한 딸의 가면을 쓰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엄마의 부탁도 상황이 안 되면 거절한다. 아무리 딸이라도 상처가 되는 말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얘기한다.
어릴 적 나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 우리 집 형편에 피아노를 배우는 건 어림없는 일이었고 눈치 백 단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로선 입도 뻥긋 못했었다. 그런 상황을 알아차린 유치원 피아노 선생님이 어느 날 엄마를 불러 얘기를 했었다고 한다. 학원비를 충당할 만한 형편이 안된다고 하자 학원비 대신 엄마가 자신의 집안일을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제안을 했다. (엄마는 동네에서 소문난 살림꾼이자 깔끔쟁이였다.)그 일로 아빠가 노발대발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엄마는 무조건 하겠노라고 우겼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선생님이 도움을 청한 거라며 딸아이 개인 레슨을 해준다는 데 엄마가 돼서 그것도 못 하냐며 결국 눈물을 터트리셨다. 그 모습에 나 역시 몰래 숨어서 울었다. 결국, 아빠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됐고 나 역시 어린 나이임에도 그렇게까지 해서 배우고 싶진 않았다.
엄마란 그렇다. 엄마의 모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쩌면 자신보다 자식을 먼저 챙겨주는 것이 마치 엄마의 의무로 생각했었던 순간도 많았을 것이다. 나는 또 어땠는가. 엄마니까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어쩌면 엄마의 희생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었는지 모른다. 엄마의 희생은 당연하지 않다.
엄마를 희생의 아이콘으로 몰고 가면 안 되듯 엄마 역시 ‘착한 딸’을 강요해선 안 된다. 엄마와 내가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둘 다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몫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누구의 엄마와 누구의 자식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온전히 ‘나’로 말이다. ‘착한 딸’은 로그아웃하고 서로가 다른 인격체임을 인정할 때 더 건강한 모녀 사이가 될 수 있다.
한바탕 엄마 성토 자리로 시작되었던 단톡방은 어느 순간 엄마와의 추억담으로 바뀌고 이제 누군가의 엄마 역할을 하게 된 자신을 향한 반성의 시간이 되었다.
“일단 네 맘 풀어질 때까지 기다려줘. 주위에서 뭐라 하든. 네 마음이 중요해. 엄마도 이해하실 거야.” 한 친구의 말로 그날의 단톡방 수다는 막을 내렸다.
내 마음이 중요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마음을 먼저 챙겨야 한다. 이제 ‘착한 딸’은 로그 아웃하고 서로가 독립된 인격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삶을 타인의 인정을 통해 확인할 필요는 없다. 온전히 나로 살기에도 세상은 어렵고 불편한 것 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