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거 사이

할머니 방에서 봉천동 원룸까지

by 쟁이

우리는 다섯 자매다. 아들 하나도 없이 온전하게(!) 딸만 다섯. 충청도 한 시골 마을에서 외동아들로 자란 아빠는 종손이기까지 했다. 애초 "아이는 둘만 낳자"는 아빠의 제안을 엄마는 수락할 수 없었다. 딸딸딸 계속 낳는 동안 아무도 아빠 탓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은근히 혹은 대놓고 한 소리 하는 친인척, 동네 할머니들에게 그 대상은 늘 엄마 혹은 자매들이었으니까.

"아이고 이 집 딸들은 하나같이 똘똘하네. 쯔쯧, 고추만 하나 달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우리 앞에서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동네 할머니께 나 역시 대놓고 "딸이 뭐 어때서요?" 당돌하게 맞받아쳤지만 늘 속상하고 억울했다. 다행히 엄마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 일곱, 여덟 고집하지 않고 다섯 자매에서 끝냈다! 그 후로도 엄마는 내가 다 알지 못할 힘든 시간들을 무던히도 견뎌냈겠지만 다섯 자매는 똘똘 뭉쳐 동네에서 어떤 남자애들도 절대 건드릴 수 없는 '독수리 오자매'로 한 덩어리처럼 지냈다.


독수리 오자매


언니, 나, 동생 셋까지 다섯 자매. 두세 살 터울의 우리는 부모님과 함께 지내다 동생이 태어나면 하나씩 할머니 방으로 옮겨갔다. 언니는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맨 먼저 할머니 방으로 보내졌다. 나는 셋째가 태어나자 할머니 방으로 건너가 언니와 합류했다. 넷째가 태어나자 셋째까지 할머니 방으로 옮겨갔으니 할머니 방은 어느새 부모님 방보다 더 북적이는 공간이 되었다.

열 살 남짓 무렵 잘 때마다 이불을 걷어차고 웃목으로 자꾸 기어 올라가는 우리 때문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우리의 엉덩이를 팡팡 치곤 하던 할머니가 기억난다. "아이고, 얌전히들 좀 자라." 꿈결인 듯 들리던 그 목소리. 꿈결인 듯 아프지도 않던 그 팡팡 맞던 엉덩이의 감촉. 지금도 가끔 그 시절 한 이불 속에 옹기종기 모여 서로 이불을 끌어당기던 우리들의 모습이 그려지곤 한다.

자라면서 언젠가 그런 얘길 했었다.

"우리 커서 5층으로 집 지어 한 층씩 사는 거 어때?"

별로 소질 없는 그림 실력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 집을 그려보기도 했다. '언젠가'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생각도 해보지 않은 채, 그냥 막연히 커서 돈을 벌면 함께 집을 지어 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때 나이 순으로 층을 나눠 살자고 했었는지, "나는 3층!, 나는 꼭대기층!" 주장을 했었는지 잘 기억나진 않는다.

어쩌면 그때 그려본 5층짜리 집이 자매들의 집짓기 프로젝트의 리허설쯤 되는 거 아닐까.

집을 짓게 되면서 처음으로 우린 서로의 취향을 제대로 알아가게 됐다. 대부분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었지만, 어떤 것들은 참 의외인 면들도 있었다.

그동안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환경 탓이었으리라. 하나같이 옥탑의 다락방을 갖고 싶은 우리 모두의 마음은 현실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던 '온전한 나만의 공간'에 대한 오래된 로망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서울에 자리 잡은 건 나와 셋째가 대학을 졸업하면서다. 셋째는 취업을 하고 나는 취업 준비를 위해 봉천동 언덕배기에 원룸 전셋방을 얻었다. 일 년 후 대학 진학을 하는 넷째가 합류했다. 집 없는 설움은 수시로 닥쳤다. 2년을 살고 나면 무조건 올려줘야 하는 전셋값, 우리는 그때마다 이사를 택했다. 서울 지리가 훤해지도록 발품을 팔아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는 성내역 잠실시영아파트에 두 번째 집을 얻었다.

너무 낡아 칠이 다 벗겨진 13평짜리 아파트에 들어가 막내까지 합류한 게 대망의 2000년이다. 밀레니엄으로 떠들썩했던 그 해, 00학번이라는 낯선 숫자에 신기해하며 막 스무 살이 된 막내부터 서른을 코앞에 둔 나까지 넷이 요란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신중한 추진형, 셋째는 기분파에 행동파, 넷째는 수동적 수긍파, 막내는 능동적 책임형. 너무 다른 성격의 넷이 모여 사는 내내 조용할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그때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넷이 다시 모여 함께 집을 짓고 있을 줄은.

직장인 둘, 대학생 둘로 시작한 네 사람의 동거는 2002년 여름 월드컵 시즌 최고의 절정기를 맞았다. 네 자매와 네 자매의 지인들까지 서른 명이나 몰려들어 월드컵 응원을 함께 했다. 지금은 제부가 된 넷째와 막내의 남자친구들도 이미 그때부터 함께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두 제부를 만난 게 남편을 만난 것보다 한참 전이었구나, 그들은 나와 월드컵 응원을 함께 했던 동지 사이였구나, 되짚어보니 참 새삼스럽다.

네 자매의 동거는 절정기 이후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지난 것처럼 서서히 막을 내렸다. 우리가 함께 살던 아파트는 재건축에 들어갔고, 우리는 학업과 직장, 결혼을 이유로 하나둘 흩어져갔다.


다시 넷이 모여 살 계획을 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전의 동거 기억을 떠올렸다. 공동의 것과 개별적인 것들에 대해 의논했다. 굳이 따로 사지 않아도 되는 것들, 공동으로 사용해도 괜찮을 것들을 먼저 정해놓고 각자의 집에 따로 있어야 하는 것들을 챙겼다.

보통 자매들은 옷 때문에 많이 싸운다는데 우린 같이 사는 동안 대부분 옷을 공유해왔다. 빌려 주고 빌려 입는 데에 익숙했고, 심지어 공동 소유인 것들도 있었다. 아, 앞으로 격식을 차리기 위해 한두 번 입을 옷을 살 필요는 없겠다 싶어 너무 좋았다.

특히 아이들 물품이나 책, 그릇 같은 것들도 지나치게 많이 구비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불편하지 않을 만큼 적절히 공유하며 사는 것, 그게 공동체 생활의 기본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집을 짓는 일이 새로운 삶의 형태를 구축해가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못내 아쉬운 한 가지는 언니네가 합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언니와 형부는 고향에서 평생을 살아왔고, 갑자기 낯선 도시로 옮겨 생활할 상황이 아니었다.

언니만 빼고 네 자매가 집을 짓기로 결정했을 때 언니는 동시에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나만 왕따네." "근데, 내가 도와줄 건 없어?"

딱 언니다운 모습! 오랫동안 유치원생들을 가르쳐온 사람답게 언제나 천진난만한 우리집 장녀다.

언니에게 대답했다.

"왕따 아냐, 서운해 하지 마. 언젠가 함께 할 수 있을 거야. 엄마아빠 모시고 자주 와서 자고 가."

언니가 대답했다.

"알았어. 땅 사는데 얼마나 부족해? 너 집 팔기 전까지 빌려줄 수 있는 돈 조금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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