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찾아 삼만리

소개로 만난 사이도 괜찮아

by 쟁이

여러 차례 고민과 회의 끝에 설계 상담을 두 곳으로 정한 후 각각 약속을 잡았다. 하나는 내 고등학교 선배 H, 또 한 곳은 남편 거래처에서 소개해 준 건축사사무소다. 토지 잔금 납부도 하기 전이었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계약과 대출 승인 완료됐으니 큰일 날 일은 없지 않을까.

평일 이틀 간격으로 약속을 잡아놓고 보니 네 자매 모두 시간을 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황이 되는 만큼 참석하기. 나와 셋째만 두 번 다 참석했다.


요즘 건축은 용적률 싸움이야!

첫 설계 미팅을 잡은 화요일 아침, 카페에 먼저 도착해 노트북을 켜놓고 기다리던 선배가 반갑게 맞아준다. 기본적인 부지 상황이나 우리가 짓고자 하는 집의 정보는 미리 전화와 이메일로 얘기해둔 상태다.

H대 건축공학과를 나온 P선배는 국내 건축사사무실에서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와 취업을 했다. 미국으로 가기 전 한동안 종종 모여 술 마시던 멤버 중 한 사람이다. 나중에 집을 짓게 되면 선배랑 작업을 해봐도 좋겠다고 예전부터 생각해 왔었다. 십여 년 전쯤 미국에서 돌아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집 짓기를 구상하며 궁금한 게 생기면 선배한테 연락해서 묻고는 했다. 귀찮을 텐데 기꺼이 답해주고, 설계를 부탁하면 해주겠노라 대답도 들은 터다. 그런데 막상 동생들이랑 같이 하는 일이다 보니 나랑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이 연관되는 게 살짝 부담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라도 갈등이 생겼을 때 동생들과 선배 사이에서 내가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은 우려들.


P선배와의 설계 미팅은 사실상 건축의 기초적인 것들을 배우는 공부 시간이었다. 80평 대지에 얼마나 큰 집을 지을 수 있나부터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 구조 변경이 어렵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것까지. 한 달 내내 우리끼리 백 번도 넘게 넣어다 뺐다 한 시설들이 현실 속에서 와장창 깨져나가는 절망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제부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스크린골프장도 "쉽지 않다"고 단언하는 바람에 실망도 이만저만 아니었다.

'어떡하지, 그걸로 꼬셨는데.' 아마 동생들 중에서는 그런 생각이 가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의 허무맹랑한 바람에 현실적인 감각을 불어넣어 준 좋은 계기도 됐다. 책에서 보긴 했지만, 지자체마다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규제가 다 다르고 특히 신도시의 경우는 훨씬 까다롭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마냥 넓고 높게 지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우리 네 가족이 살려면 구획을 나누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가 택한 토지는 주택으로는 3층만 사용할 수 있는 곳이다. 다락층은 온전하게 한 층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한 집에 한 층씩 쓸 수가 없다. 한 층에 한 집 들어가기엔 좀 넓지만 그렇다고 한 층에 두 집 들어가기는 좁은 애매한 크기의 땅. 이걸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설계의 전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건축은 용적률 싸움이야. 연면적 제한이 있기 때문에 연면적에 포함되지 않는 서비스 면적을 설계에서 얼마나 잘 확보하느냐가 관건이지."

P선배의 그 말은 두고두고 새겨야 할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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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 같아요


안녕하세요. OOO 대표님 소개로 연락드린 ***입니다.

네 자매와 가족들(4가구 15명/40대 어른 8명, 5~15세 아이 7명)이 함께 살기 위해 상가주택 부지 약 80평 정도를 매입했습니다. 1층은 상가(또는 가족공용공간), 2~4층(옥탑까지)에 4가구가 살 집을 지을 계획입니다.

용적률 제한이 있어 충분한 공간이 나오기 어려울 것 같아 고민입니다. 세 가구는 4인, 한 가구는 3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함께 할 공간이 마련된 집을 꿈꾸고 있습니다. 토지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는 파일로 첨부합니다. 현장 사진에서 건물 사이 빈자리가 부지입니다. 다음 주에 찾아뵙겠습니다.

- 2020년 9월 28일 건축가에게 보낸 이메일


이틀 후 두 번째 미팅을 가졌다. 미팅에 앞서 기본적인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놓은 터라 신사역 근처 건축사사무실에 들어서니 회의 자료가 잘 세팅되어 있었다. 스티로폼으로 만든 다양한 건축 모형들이 놓인 입구를 지나 큰 모니터에 우리집 부지 사진이 전체화면으로 띄워져 있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진짜 저곳에 우리가 집을 짓는구나!'

보내준 자료들을 토대로 첫 번째 미팅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중요하다. B건축사사무소에서 최근 해온 작업 중 우리가 지을 집과 개념이 비슷하거나 형태를 참고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함께 보여주었다. 두 번째 미팅엔 나와 셋째, 넷째 부부가 참여했다.

첫 번째 미팅으로 건축의 아주 기본적인 내용을 습득했다면 두 번째 미팅에서는 그 개념들을 구체적인 형태로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나마 나는 20여 년 전 건축잡지에서 2년 남짓 취재기자로 일하며 기웃거린 분야라 어설픈 지식이라도 있지만 동생들은 집 짓는 일에 1도 관심이 없었으니 완전 백지 상태다. 사실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던 나의 얄팍한 지식들도 막상 일을 진행하면서 보니 매번 '그 다음엔 뭘 해야 하지?'가 되었다.


"자매 4명이 함께 건물을 짓는다는 거죠?!"

건축가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굉장히 맡기 꺼려지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다양한 요구와 의견이 있을 것이며, 의견 취합은 얼마나 어려울까. 만나기도 전에 웬만하면 맡지 않겠다는 결심부터 했을 수도 있다. 처음 통화에서도, 미팅 초반에도 살짝 그런 느낌을 받았다. 뭐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팅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 때 건축가가 말했다.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 같아요."

내가 기다리고, 기대하던 답이었다. 나는 그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싶은 것이었으니까.

꽤 유쾌하게 질문하고 답하고 예를 들어 보여주며 미팅을 끝내고 나올 때 어쩐지 이분들과 함께하게 될 거라는 따듯한 예감이 들었다. 나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라 동생들과의 작업이라 더더욱.




두 군데의 미팅을 끝낸 후 우린 짧고 굵게 의견을 나눴다. 분명한 장단점이 있었다. 특히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고민이 필요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각 대학별 건축학과 출신들의 성향에 따른 특징적인 차이도 명확한 편이었다. 살짝 선입견과 편견이 포함되긴 하지만 서로 다른 두 H대의 대표적인 차이랄까. 내 개인적인 느낌은 그랬다.

두 번째 미팅을 한 건축사무소를 최종 결정했다. 비슷한 류의 작업을 해온 경험이 많았고 제시하는 스타일이 우리가 생각했던 부분과 잘 맞아떨어졌다. 한 가족이 아니라 네 가족의 집을 구성하는 것이다 보니 아기자기한 건축을 많이 해온 두 번째 건축가에게 마음이 좀 더 기울었다. 근사한 상가주택 모형과 최근 완성된 수원의 상가주택 사진을 보니 마구 설레기 시작했다.

초반에 도움을 많이 준 P선배에겐 좀 미안했지만 최종 결정을 내렸다. P선배에게 연락을 드려 양해를 구하고 H건축가에게는 곧바로 계약하자고 연락했다.

“저희 언제 계약하러 가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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